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26화 (126/164)

< 제실 - [1] >

“오스론이 자기는 흉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믿나? 믿는다면 거사는 그만둘 거고?”

모지의 물음에 카를이 대답했다.

“아니. 놈을 믿지도, 일을 그만두지도 않는다.”

“어째서인가? 일을 저지르기 싫어하지 않았나?”

“놈을 내버려둘 수 없다.”

“왜?”

“말 섞어본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런데 척 보니까 미친놈이더군. 그 미친놈이 제안했다. 영웅 대우해줄 테니 잠자코 지내라고 말이야.”

“너희로선 괜찮은 제안 아닌가? 이제는 그저 신전이 아니라 궁성에서 지내게 될 뿐이잖은가. 일반인들답게 얌전히.”

“아니, 다르다. 신전에서는 어두우나마 미래가 보였다. 언젠가 세 명처럼 괴물과 싸우게 되리라는 미래. 그날에 대비하여 우리는 나름대로 땀 흘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궁성에서는 무얼 하면 좋은 건가? 밥이나 처먹기? 오스론의 식객으로서? 편해보여도 절대 좋은 게 아니야. 오스론은 벌써부터 궁성에서 미움 받고 있다. 그가 죽는 동시에 그 식객이던 우리는 어찌 될지 몰라.”

“함께 지내봤자 전망이 어둡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겠다고? 멋진데.”

모지의 비웃음에 카를이 말했다.

“놈을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뭔가?”

“오스론은 우리가 영웅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놈이다. 그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영웅이던 우리의 대우를 일개 소환물로 격하시킬 수 있는 자. 오스론이 알아서 입단속 잘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미 음모를 꾸며 배신한 놈이요, 뭔가 수틀리면 우리들을 영웅 대우해주기 싫어질 지도 모르지. 아닌가?”

“아니, 맞아. 그럼 언제 어디서 저지를 건가? 마침 자객도 데려왔겠다, 그에게 암살을 지시할 건가?”

“시난에게 암살을? 아니. 나 말고 다른 인원에게만 더러운 일을 맡기지는 않겠다. 이왕 할 거라면 당당하게 저지른다. 모두의 앞에서, 곧.”

“고귀하시군. 그래서 새로운 이름은 정했나?”

“그래.”

그 대답에 이르러서야 모지는 비로소 만족했다.

모지는 카를 대제를 기억했다. 성격적인 흠도, 신하들과 다툼도 많았지만 기어이 모두를 이끌고 인류를 구원한 빛의 수호자.

그 거룩한 이름을 저 팔푼이가 쓰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롤랑은 떠날 채비를 한 동료들에게 말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소. 미안하오, 모두들. 내 사정으로 궁성에서 귀빈 대우 받던 그대들이······”

롤랑만 남기고 동료들은 궁성에서 떠나기로 했다. 몸을 피하기 위해서.

롤랑은 곧 일을 저지를 계획이었다. 동료들이 거기 휘말려서는 안 되었다.

롤랑은 문득 알론소를 보았다. 메디아의 소지주 기사. 롤랑이 메디아에서 미움 받을 경우 저 노인이 가장 손해를 볼 텐데.

그러나 속편하게도 알론소는 웃으며 말했다.

“아뇨, 아니오! 물론 떠나게 되어 매우 한탄스럽습니다만 그건 더 이상 연회음식과 푹신한 침대를 즐기지 못하게 되어서가 아닙니다. 롤랑 경의 활약에 동참하지 못하리란 게 아쉬울 뿐이에요!”

“말만이라도 고맙소, 알론소.”

롤랑은 고개를 꾸벅 숙였고 알론소는 당황하여 만류했다.

한편 제이슨이 물어왔다.

“롤랑, 정말 내 도움 필요 없어?”

“그래. 나 혼자가 나을 것 같다. 기사 하나 날뛰는 것도 보기 껄끄러울 판이잖나? 거인이나 야수까지 동참해 궁전을 어지럽히는 것은 더욱 보기 나쁠 테지.”

“십새끼가, 근사한 이벤트는 다 독차지하고······.”

“미안하네. 아무튼 만약의 경우 잘 부탁해.”

이후로 모지가 다가와 떠나갈 그들에게 투명화 주문을 걸어주었다.

그리하여 모두의 시야에서 벗어난 채, 제이슨과 두 현지인 동료들은 몰래 궁성을 나가 떠나갔다.

저들이 떠나는데 모지는?

자발적으로 남기로 했다. 투명화에 순간이동까지 가능한 마법사의 존재는 실로 든든한 것이다. 만약의 경우 자신의 부재가 아쉬우리라고 모지는 주장했다.

롤랑이 물었다.

“카를이랑 그네들은 이미 잘 떠났지?”

“그래. 방금 전.”

카를에게 잠시 빌려주었던 성검도 다시 회수한 바였다.

문득 롤랑은 성검을 그냥 카를에게 들려 보낼 것을 그랬나 생각했다. 폐를 끼친 마당에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지금 롤랑이 저지르려는 일은 성검의 신성함에 걸맞지 않았다. 능히 신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이니까.

프레이 신의 후손들이 결혼하려는 데 훼방 놓기.

그런 일을 감히 신이 내려준 성검을 가지고 저질러도 되는 것일까? 가뜩이나 이 성검은 신의 가호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소유주의 손을 거부하고 바닥에 꽂혀버리는 고약한 물건 아닌가.

괜히 성검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잘 휘두르다가 갑자기 칼이 미지의 중력으로 바닥에 꽂혀버릴 수도, 아니면 아예 그 자루를 쥔 롤랑의 목에 꽂혀 신의 징벌을 대신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신에게 반역하려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롤랑은 신의 가호가 절실했다.

롤랑은 바닥에 무릎 꿇었다. 눈 감고는 전쟁신에게 기도했다.

‘위대한 지존자 오딘이여, 이 미천한 종의 비행을 관대하게 넘겨주소서.’

당연히도 응답이 없었기에 롤랑은 불안해졌다.

모두에게는 정말 면목이 없었다. 그런 마당에 신의 분노까지 그들에게 번지지 않기를. 롤랑은 간절히 기도했다.

*******

오스론은 지금 자줏빛 법복이 아닌 하얀 법복을 입었다. 역대 메디아 제사장들이 입어온 전통복.

제단 앞에서 오스론은 기도 올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프레이 신이시여, 우리 혈족의 조상신이시여. 당신의 후손이 신성한 인연을 맺고자 허락을 받으려 하나이다. 당신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오스마 메디아와 혼인하여 앞으로도 이 땅에 고귀한 피를 이어나가가겠나이다. 물론 당신께서 불허하신다면 그러지 아니하겠나이다.”

이후로도 중얼중얼, 기도하는 오스론의 등골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신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한참을 기도했지만 오스론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오스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는 사제들에게 선언했다.

“프레이 신께서는 불허하지 않으셨도다!”

사제들은 의례상 축하의 말을 읊기 시작했다. 그들 앞에서 오스론은 씩 웃어보였다.

어쨌건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허가하지 않았지만 금지하지도 않았으니. 그렇다면 묵인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기야 신께서 일일이 결혼을 승낙해주시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아마 내 조상들도 다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물론 오스와 오스마의 결합도······.’

스스로를 위안하며 오스론은 제실을 나섰다.

회장에는 이미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불만 가득한 얼굴.

궁성의 모두는 오스 왕을 암살한 것이 오스론이라 여기는 눈치였다. 심지어 자기 딸과 결혼하려는 섭정은 국제망신감이라 여기는 모양새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오스론은 속으로 비웃었다.

뒤에서 멋대로들 떠들라지. 어차피 대들지도 못할 것들이.

이 궁성에서 메디아 왕족은 절대자였다. 예로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프레이 신이 뒤에 있거늘 한낱 인간이 어찌 그 권위에 도전할 것인가?

귀족들 앞에서 오스론이 입을 열었다.

“모두 주목. 방금 프레이 신께 기도드렸소. 그리고 프레이 신께서 거부하지 않으신바, 앞서 말한 약혼에 신성한 힘이 깃들었음을 선포하오. 이제 나 오스론 메디아는 오스마 메디아와 약혼하오. 프리그 여신께서 우리의 결합을 축복하실 것이외다!”

그리 말한 순간 귀족들은 생각했다. 기어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바로 축하한다거나 박수치는 것은 꺼려졌다.

그러나 이것을 새로운 섭정에게 잘 보일 기회로 여긴 누군가가 손뼉을 쳤다. 짝짝.

그 옆에 있던 귀족은 무심결에, 다른 귀족은 덩달아 손뼉을 치면서 모두들 박수치기 시작했다.

오스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박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공주를 데려오라.”

그리고 궁녀들에게 둘러싸인 오스마 공주가 입장했다.

그 표정이 어두우리라 걱정했기에 오스론은 미리 공주의 얼굴에 면사를 씌워 가려두었다.

그래서 오직 옆모습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오스마 공주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선조 메데이아처럼. 지금 곱게 단장한 그 모습을 본 자들이라면 어째서 프레이 신이 인간 여성에게 반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검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오스마 공주가 다가왔다.

면사에 가려진 공주의 표정은 명백했다. 싫음, 절망, 울먹거림. 오스론도 그 감정을 예상했지만 공주가 이 자리에서 거부를 적극 표시하리라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스론은 수도원에서 저 아이를 기르며 예절과 복종을 가르쳐왔다.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라난 아이. 체신머리 없게도 모두의 앞에서 울며불며 제 아비를 망신시킬 리 없었다.

과연 오스론의 앞에서 오스마는 그 자리에 잠자코 서있을 뿐이었다.

공주 앞에 오스론이 무릎 꿇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스마 공주, 이 반지를 주어 약혼을 증거 하리다.”

그러면서 오스론은 약혼반지가 든 함을 내밀었다. 그러나 오스마는 여전히 잠자코 서있을 뿐이라 오스론은 작게 재촉했다.

“어서. 이 아비를 망신 줄 셈은 아니잖으냐, 어린 오스마?”

오스마는 그 손을 덜덜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 팔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회장의 대문이 열렸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대문 사이에서 롤랑이 외쳤다.

“무릇 결혼에는 이의를 제기할 기회가 있는 법인데, 어째서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가! 더 이상 줄 때까지 기다릴 수 없게 되었으니 나 신성한 전통에 의거하여 불만을 제기하러 왔노라!”

“불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롤랑은 포효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의 기사이자 오딘의 대전사, 나 롤랑은 메디아 후작으로서 궁전행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오스마가 황급히 롤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면사에 가려진 그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드러난 입 꼬리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환희.

공주가 더욱 기쁘도록 롤랑이 외쳤다.

“신성한 행사에 불만이 제기되었으니 이 의식은 무효다!”

오스론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롤랑 경, 이러지 않으시기로 했잖습니까?”

“내 언제?”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뭔가 말을 걸려는 오스론을 무시하고 롤랑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오스론이 들고 있던 함을 뺏어들고는 밟아 그 안의 내용물을 드러나게 했다.

약혼반지. 롤랑은 그것마저 짓밟으려 했고 오스론이 제지했다.

“그만! 다 프레이 신의 인정 하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감히! 감히 그걸 훼방 놓으려 합니까!”

“물론 프레이 신의 의사를 내 어찌 막겠나? 그러나 나 역시 신의 권위로 이 일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 외치더니 롤랑은 성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칼날을 아래로 하고는, 내리꽂았다. 바닥에 너브러진 반지를 향해서.

반지를 부수려는 줄 알고 오스론은 비명 질렀다.

“안 돼!”

그러나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지만 금속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과연 반지는 잘리지 않았다. 칼날은 반지 사이로 들어가 바닥에 꽂혀있었다. 그리 커다란 반지가 아닌데 어떻게?

잘 보니 반지는 늘어난 채였다. 칼날 끄트머리나마 감쌀 수 있을 만한 넓이로. 그것이 성검의 열 때문이라는 것을 오스론은 알아보았다. 금반지였으니 열에 약할 터였다.

반지를 꿴 칼을 가리키며 롤랑이 외쳤다.

“이 칼은 성검이며, 오딘께서 내려주신 칼이다! 신의 가호 없이는 이 칼을 뽑아들지 못한다! 원하거든 뽑아보라, 오스론! 정녕 프레이 신께서 함께하신다면 그대는 이 칼을 뽑아 반지를 회수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면 신께서는 그대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 제실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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