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회장 - [2] >
순식간에 침묵이 깔리더니 시선이 꽂혔다.
그 모두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롤랑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잘한 것인가?
막 도착한 손님 주제에 주인처럼 지껄이다니. 객관적으로 보면 우스운 일 아닌가.
‘지금쯤 저들은 입 다문 채 속으로 품평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그리 걱정하면서도 발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턱턱 걸어가 비카파 앞에 도달했다.
악수하고자 손을 내밀었다. 비카파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 손을 마주잡았는데, 양 손을 힘차게 흔들면서 롤랑은 불안해졌다.
악수하는데 왜 저런 표정인가? 이쪽이 눈에 띄는 얼간이 짓을 해놓고 친한 척 얽혀온 것이 껄끄러워서?
어쨌건 준비한 대사를 꺼내놓았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이오. 백작.”
롤랑의 인사에 비카파는 역시나 주저하며 대답했다.
“이쪽이야말로. 왕림해주신 데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인에게 인사를 마친 것으로 롤랑의 사교활동은 끝났다. 롤랑은 앤지를 데리고는 멧돼지 구이 앞으로 향했다.
요리사가 그 뒷다리를 잘라주는 가운데 롤랑은 흘긋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안도.
다행히 조롱, 비웃음, 어이없음 따위의 느낌은 아니었다. 다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롤랑과 발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롤랑은 제이슨의 선견지명에 감사했다. 발키리 하나면 다 해결될 것이라더니 과연 그 말이 옳았는지 모른다······.
한편 비카파는 영웅들 위에 떠있는 발키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손님들이 지금 그러는 것처럼.
이미 몇 번 구경해본 바였지만 막상 가까이서 보니 압도될 것만 같다. 새삼 발키리 아래에 있는 영웅들이 이 세상 존재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모르가나는 저들이 아마 진짜배기 고대 영웅이 아닐 것이라 말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카파는 저들이 어려웠다. 진짜건 아니건 저들을 불러내는 데 천상의 신들이 일조했음은 분명했다.
신의 손길이 닿은 존재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비카파는 문득 오스론을 바라보았다.
요새 와서는 저 엉터리 추기경이 신경 쓰이다 못해 꿈에 나올 지경이었다. 오스론이 비프로스트에 막 돌아왔을 때는 웬 사기꾼들을 데려와 수작을 부리려 한다 생각하여 비웃었더니, 이후로는 전설이 쌓여나갔다.
프레이 신의 피가 흐르는 반신의 혈통도 내심 비웃어왔다. 땅덩이도 좁아터진 주제에 근친 교배하면서 우월감 느끼는 잡종들이라고.
그 생각이 틀렸나?
신의 혈통은 역시 특별한 것인가?
그리 불안에만 젖어있을 수는 없었다. 그놈의 오스론이 지금 이 회장에 있었으므로.
“예하께서 저들을 불러내셨다 하셨죠? 대체 어찌 천상에 영웅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겁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오스론은 신나게도 설명했다.
“프레이 신의 피를 잇는 성직자로서 제가 그 분께 요청했지요. 오스마 여왕 폐하를 살려야 한다! 그러니 황금사과를 주시든가 아니면 그것을 얻기 위한 도움을 달라! 프레이 신께서는 후자에 응해주셨습니다······”
비카파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벌꿀술을 홀짝이며 문득 교황 특사를 바라보았다. 발키리가 직접 현장에 나온 마당에 높으신 성직자는 어찌 반응할까?
그러나 교황 특사는 그저 자기 음식이나 먹고 있었다. 교황 특사는 이 발키리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굴기로 한 모양새였다. 이해할 수 없다면 건드리지도 않겠다는 것처럼.
그렇듯 교황 특사는 발키리를 철저하게 외면하려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이 흘긋흘긋 천사를 향했다. 그 우스운 모습을 비카파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결국 오스론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입 다물어버림으로써 회장은 숙연해졌다. 천사가 함께하는 종교적인 분위기. 연회 개최자로서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비카파는 애써 신명 나게 외쳤다.
“천사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비범한 자들이 비프로스트에는 많습니다.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여봐라!”
그 말에 따라 회장 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일단의 무리가 회장에 들어섰다.
거대한 대검으로 무장한 전사들.
일순 습격을 생각한 손님들의 몸이 굳었다. 그러나 입장한 전사들은 손님들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외쳤다.
“부족한 솜씨나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쇼가 진행되었다.
두 전사가 보일 쇼라면 당연히 검술 대결이었다. 도저히 사람이 들지 못할 것 같은 대검을 휘두르는 대결.
양 전사가 그 비현실적인 무기를 맞부딪쳤다.
두 거대한 칼에서 발휘되는 검술은 썩 세련되지 않았다. 심지어 실전검법에 어울리지 않는 동작까지 선보여가며 둘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검법에 조예가 있는 귀족들조차 둘의 대결을 비웃지 못했다.
두 전사는 비프로스트에 남은 자들 중에서 손꼽히는 전사였다. 괴물과의 싸움을 거듭하여 신들의 총애를 받아 비범해진 자들. 그들의 신체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었고 두 초인의 대결은 군대의 접전을 방불케 했다.
무지막지한 불꽃과 굉음을 동반한 대결은 약 오 분 지나 끝났다.
두 전사가 잠시 멈춰서더니,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저 노려볼 뿐이니 지루할 만했지만 모두가 숨죽이고 그 대치를 지켜보았다. 그들이 행동을 개시하면 무언가 큰 사태가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 되면 누군가가 죽을 것이요, 당장 죽기에 저들은 너무나도 비범한 자들이었다.
마침내 한 전사가 무릎을 굽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웬 귀족이 신음을 삼킨 순간 비카파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짝짝 박수를 치며 선언했다.
“그만! 둘 다 너무 흥에 겨워 주체를 못하는군! 이쯤이면 충분하네!”
그 순간 한 전사는 뛰쳐나가려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더니,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뜨고는 멈춰섰다. 그러고는 상대에게 다가가 양 팔을 벌렸다.
그리 두 전사가 서로를 포옹한 순간 구경꾼들은 찬사의 함성을 내질렀다. 전사들이 포옹을 그만둔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함성도 잦아들었을 즈음, 비카파가 보검을 쥐고서 두 전사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명령했다.
“훌륭하게 싸운 두 전사는 무릎 꿇으시오.”
그 말에 따라 두 전사는 비카파 앞에 무릎 꿇었다. 그 어깨에 비카파는 보검을 가져가며 읊조렸다.
“나 비프로스트의 군주 비카파가 그대들을 기사에 봉한다. 그 새로운 신분이 유효함은 이 자리의 귀빈들이 증명해줄 것이다······”
그리고 간단한 기사 서임식을 치렀다. 비카파로서는 얼마 전에 관문 밖에서 롤랑이 했던 짓이 꽤 감명 깊게 남았고, 직접 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세계수의 창 궁니르에 걸고.”
“그렇다면 그 궁니르가 그 권위를 보증하노니, 그대들은 이제 기사다.”
그리고 구경꾼 사이에서 박수함성이 시작되었다.
비카파는 웃었다. 의도한 대로 분위기를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비프로스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신들의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훌륭하게 선보였다.
비카파는 새로이 기사가 된 두 전사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사실 두 전사가 벌인 것이 생사를 건 결투는 아니었다. 두 전사는 미리 어떻게 찌르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의논하고 연습하여 짜고 쳤다. 심지어 둘의 대치 상황에 비카파가 나서서 대결을 중단시키는 것도 미리 정해둔 결말이었다.
그처럼 계획대로 흘러가노라 좋아하던 와중이었다. 그 때문에 비카파는 다음 순간 벌어진 돌발상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넋이 나가 구경하던 귀족이 중얼거렸다.
“두 전사들이 정말 대단하군. 놀랍소. 가히 불세출의 영웅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과찬이십니다······ 진정한 영웅들에 비하면 저희 따위야······”
두 전사는 겸손하게도 그리 말을 받았는데, 웬 남자가 끼어들어 물었다.
“진정한 영웅들에 비하면? 그렇담 저 롤랑 경은 그대들보다도 더욱 대단하단 뜻인가?”
“물론······”
“얼마나 차이 나는지 보여줄 수 있나?”
그리 말한 순간 모두의 시선이 롤랑에게 향했다.
롤랑도 그들의 시선을 눈치 채고는 입을 열었다.
“보여주긴 뭘 보여줘. 내가 노예 검투사로 보이나? 아니면 저들이?”
남자는 움찔했지만 그래도 제 할 말을 했다.
“아니······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오. 하지만 기사가 솜씨를 보여 연회의 흥을 돋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잖은가?”
“그렇긴 하지. 그래서? 어쩌길 바라나?”
“뭐 방법이야 많지 않겠나······ 대결이든 뭐든 누가 더 대단한지 보여줄 수단이야 널렸잖소?”
그 말에 롤랑은 두 전사를 흘긋 보았다. 둘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 속에 숨은 난처함을 롤랑은 읽어낼 수 있었다.
하기야 지금 롤랑뿐만 아니라 저들도 당혹스러울 터였다. 갑자기 산만한 악룡을 죽이는 광전사와 대결하라니. 실제 피 흘릴 일은 없노라 생각하고 나온 자리에서 웬 봉변이란 말인가.
롤랑도 그들의 심중을 눈치 챘지만 그 눈치를 보아서는 안 되었다. 괜히 배려해주다가는 불리하여 한 발 빼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막 기사가 되어 감격했을 저들을 굴욕스럽게 꺾는 것은? 구경꾼들이야 신나겠지만 롤랑이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롤랑은 짧게 고민했고, 짧게 말했다.
“그 칼, 들어보시게.”
두 전사는 머뭇거리지 않고자 노력하며 애써 대검을 들어올렸다.
롤랑이 이어서 지시했다.
“자세 잡아.”
두 전사는 그 지시에도 따랐다. 조금 뜸 들이더니, 둘은 금방이라도 대검을 휘두를 듯 칼을 어깨 위로 올렸다.
롤랑은 마지막으로 지시했다.
“쳐봐.”
이번에야말로 두 전사는 머뭇거렸다. 예상한 반응.
롤랑은 벌컥 포효했다.
“어서!”
롤랑의 전투함성은 상대를 얼어붙게 만든다. 그러나 두 전사는 나름대로 비범했고 그 포효가 몸을 파고든 순간, 둘은 훌륭한 전사답게 반응했다.
두 전사가 반사적으로 칼을 내질렀다. 그 거대한 칼이 덮쳐오는 지금 롤랑은 맨몸이었다.
“어, 어?”
벌써부터 몇 명이 비명 지르는 가운데 롤랑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하여 덮쳐오던 한 칼을 붙잡고, 다른 한 칼은 어깨로 받아내었다. 마치 판금 견갑을 입고 있는 듯이 굴었지만 지금 그 어깨를 덮은 것은 그저 가죽옷이었다.
이내 그 가죽옷은 힘없이 찢어지고 살갗에 칼날이 파고들었다. 불꽃과 충돌음.
그 순간 몇몇이 눈을 가렸지만, 눈 뜬 순간 보인 롤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한 대검은 손에 붙잡혔고, 다른 한 칼은 어깨에 고정되어 더 내려오지 못했다.
자기네 행동이면서도 두 전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자기네가 벌인 공격에도, 거기 당한 롤랑의 반응에도.
롤랑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두 전사가 당황하는 가운데 롤랑이 손을 놓아 붙잡고 있던 대검을 놓아주었다. 그와 함께 먼지를 털 듯 어깨를 들썩여 그 위에 얹혀있던 대검도 밀어냈다.
대검이 사라지고 드러난 그 피부는 뭉개져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그런 무게의 일격에 멀쩡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 이상의 손상은 입지 않았다. 뼈가 부러진 기색도 아니었고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불꽃마저 튀긴 충돌이 고작 그 정도 결과를 가져왔음에 롤랑은 기꺼이 찬사를 표했다.
“전쟁신께서 손수 가호해주신 살가죽인데 어찌 손상을 입혔군. 참으로 훌륭해. 그리 정진하면 그대들도 언젠가 세계수의 끝에 다다를 수 있겠지.”
두 전사는 황급히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웬 남자가 말했다.
“사기 아닌가?”
그 타당한 지적에 롤랑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제이슨의 허리에 있던 칼을 뽑아들더니 그 지적한 자의 손에 들려주었을 뿐.
그리고 롤랑이 말했다.
“직접 해보시오. 찌르든, 베든 솜씨를 보여 봐. 내 평가해줄 테니.”
베거나 찌르라고? 바로 실행에 옮길 만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남자는 주저했다.
그러나 이내 구경꾼들의 눈길이 남자에게 쏟아졌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는, 겁쟁이처럼 보이기는 싫었는지 결국 실행에 옮겼다.
눈 감고 휘두른 그 칼은 제대로 롤랑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충돌 소리가 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
롤랑은 찢어진 옷을 찡그리며 바라보더니 흘긋 상의를 들춰 올렸다. 그리고 드러난 살갗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평가해주기 전에 묻겠는데, 뭔가 하기는 했나?”
롤랑이 물었고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롤랑은 멀거니 있는 남자의 손을 멋대로 잡았다. 그 손바닥을 바라보더니 이내 품평했다.
“사실 뭐, 동작만은 나쁘지 않았소. 보니까 굳은살도 박혀있는데 제법 열심히 수련한 모양새로군. 하지만 부족해. 결투에서 솜씨를 보여 사람 한두 명 죽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진짜 괴물을 상대로는 그러지 못해. 하지만 약한 괴물이라면······ 이겨낼 수도 있겠지. 그런 전투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진짜 괴물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겠고.”
롤랑은 남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 굳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계수에 오른다면 말이오.”
< 연회장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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