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회장 - [1] >
롤랑은 거울 앞에 서서 아, 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목 상태는 문제없었지만 복장과 얼굴이 신경 쓰였다. 얼굴에 잡티가 있는데 화장이라도 해서 깔끔하게 만들어야 하나? 하지만 고대 기사가 화장을 한다니 이상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복장. 롤랑이 보기에 지금 자신이 입은 옷은 썩 멋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론과 그가 고용한 의상 전문가는 이것이 연회복으로 정말 잘 어울리노라 주장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롤랑은 알 수 없었다. 현대인으로서든 고대 기사로든 중세적 심미관과는 거리가 있었으므로.
잘 모르겠다고 대강 갈 수도 없었다.
롤랑은 세 시간 뒤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비프로스트의 영주성에서 열리는 연회에. 얼핏 듣기로도 굉장히 큰 연회라 했다.
오스론이 없는 살림에 열던 연회와는 격이 다를 터였다.
이번 연회에는 각국의 귀족과 유력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일 예정이었다. 이번 참석자 목록에는 황제의 칙사니 교황청 특사니 하는 작자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비카파의 초청을 받아 비프로스트에 막 발을 디딘 자들이었다. 그들은 롤랑을 비롯한 영웅들이 비프로스트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문이야 들었어도 그 진위여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롤랑은 그들에게 자신을 새로이 증명해야 했다. 이곳 비프로스트에 온 이후 거대한 늑대 괴물들을 토벌하고, 거인과 결투하여 그 영웅성을 내보여서야 겨우 전설의 기사임을 인정받았지 않나.
그런 인정을 거저 얻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메디아 궁성의 연회는 왕이 직접 의식을 치러 불러낸 영웅들을 축하하는 자리였지. 왕의 신하들로서는 믿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던 그곳에서도 우리를 경원시하는 자들이 있었다. 남 눈치 볼 곳 없는 사람들끼리 모인 연회에서라면, 아예 대놓고 우릴 업신여기거나 사기꾼임을 조롱하려 들지도······.’
그런 굴욕에 맞서 롤랑은 어찌 처신해야 할 것인가? 모욕 받은 기사답게 결투라도 신청해야 하나? 아니면 영웅다운 괴력을 자랑하고 창칼에도 뚫리지 않는 피부의 견고함을 자랑하면 되나? 하지만 그것은 조잡한 차력 같지 않은가······.
이미 연회에서 유저들끼리 어찌 굴 것인지 의논을 거듭한 바였지만, 롤랑은 도저히 안정이 되지 않았다.
제이슨의 경우, 발키리만 소환하면 다 해결되리라고 믿는 눈치였다. 감히 천사가 함께하는 놈들을 어찌 사기꾼 취급하겠느냐고.
물론 그럴 듯한 주장이었으나 그저 천사의 존재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제이슨보다 더 신중한 말을 꺼낼 줄 알았던 모지의 경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모지는 그 의논 자체가 불편한 모양새였다.
이제 모지는 자신을 옛 마법사 마우그리스로 느끼고 행동했다. 지식으로야 자신이 고대 영웅 따위가 아니라 한낱 한국인 게이머였음을 알고 있었지마는.
양 정체성이 충돌할 때마다 모지는 극히 혼란스러워 했다.
당시 의논에서도 그러했다. 모지는 고대 마법사로서 고결하게 발언해야 할지, 아니면 영웅을 가장하는 민간인으로서 사기 치자는 제안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다못해 공황상태에 빠졌다.
‘나는······’
모지는 그 한 마디 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의논 내내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말을 해보라고 감히 강요할 수 없었다. 모지의 눈에서 떨어지던 눈물을 롤랑은 분명히 보았으므로.
그리하여 연회가 코앞에 닥친 지금, 뾰족한 수는 생기지 않았다. 결국 롤랑은 언제나 하던 대로 해야 했다.
영웅답게. 롤랑답게.
그런 연기 또한 하나의 전쟁이었다. 오딘에게 기도할 수도 없는 전쟁 말이다.
롤랑은 머릿속으로 영웅다운 대사를 가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니 문 밖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앤지가 외쳤다.
“기사님, 연회 시간이에요! 나오세요!”
롤랑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붉은 수염이 풍성한 근육질 남자가 보였다. 옛날 한국인이던 시절 길가에서 마주쳤더라면 움츠러들었을 법한 모습.
저 위압감 넘치는 모습이 뭇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기를 롤랑은 간절히 바랐다.
롤랑은 위풍당당하게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간다, 앤지! 다른 이들을 불러라!”
*******
비카파는 화려한 연회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이번 연회는 중요했다. 각국의 세력가들을 다시금 이 도시에 끌어당길 기회.
그러니 한낱 연회라 생각하지 말고 잘해야 했다. 이번 연회의 성패로 도시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었다. 그것은 곧 영주인 비카파의 운명이기도 했다.
비카파는 이곳의 군주 노릇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군주 노릇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이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마저 거금이요, 도시에 찾아드는 손님들이라곤 죄 엄청난 세력가들이라 그 높으신 분들을 대접해야 할 때마다 전전긍긍하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손해를 벌충하고도 남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수입이었다.
비프로스트의 군주 노릇은 충분히 돈이 되었다.
조세로 벌어들이는 것만 해도 엄청나지만 수입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카파는 은행가로서 비프로스트에 금융사업을 확실하게 벌여놓았다.
우선 조합을 세워 세계수에서 나오는 물자들의 경매를 전담하게 했는데, 그 수수료는 물론 비카파의 것이었다.
생활비가 곤란한 기사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얻는 이자수익도, 고향에 남아있을 재산을 대신 정리해주는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며 얻는 이익도 훌륭했다. 소금 전매로 얻는 이익은 아예 황홀할 지경이었다.
고질적인 재정부족은 오히려 수입의 풍족함을 대변했다. 비카파는 조세수입의 일부만을 행정예산으로 삼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재정을 부족한 수준으로나마 어찌어찌 충당할 수 있었으므로.
이곳의 영주 노릇을 앞으로 이십 년만 더 할 수 있으면 비카파는 자신이 미드가르드 최고의 부자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러니 비프로스트에 전사들을 공급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맨 먼저 들어온 손님은 성직자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비프로스트 주교는 얼른 다가가 반겼다.
“예하!”
자주빛 법의를 입은 교황 특사였다. 저 남자와의 교섭이 잘 풀리기만 하면 교황의 이름으로 다시금 각국에 원정대 파병을 촉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카파도 교황 특사에게 다가가 왕림해주신 데 감격을 표했다.
이후로도 손님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중요한 인물이었으므로 비카파는 싫은 내색 없이 모두에게 화사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 와중에 비프로스트의 귀빈들도 등장했다.
아이스피시 공작이 나타난 순간 비카파는 바로 달려 나가 양 팔로 그를 껴안았다.
“아, 나의 동맹자여! 왕림해주셔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비록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다지만 여전히 이 남자는 지고의 권력자였다. 지금은 실의에 빠졌지만 어찌 마음을 돌려놓으면 본국에서 병력을 충원해줄 수도······.
그런 기대와 달리 아이스피시는 힘없게도 대답했다.
“동맹은 파기요.”
“예?”
“미안하지만 나는 더 이상 롤랑 경에게 적의를 품고 있지 않소. 오히려 빚을 졌으면 모를까. 게다가 당신에게 지원해줄 일만 병력도 이제는 없으니······ 용서하시오.”
“그거야 물론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괜찮습니다. 그런 옛일에는 개의치 마시고, 이번 연회로 속이 좀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아이스피시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대오공국의 공작답지 않은 힘없는 몸동작.
그 처량한 표정을 보며 비카파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망쳐먹는 아이스피시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기세마저 상실했구나 하고.
‘연회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기만 해봐라, 머저리 새끼······.’
다행히 다음 손님은 그처럼 축 늘어져있지 않았다.
보어조아와 그 휘하 염동력자들은 휘황한 비단을 뽐내며 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자기네가 주빈이기라도 한 듯한 옷차림이요 등장 시기였는데, 저것은 비카파가 의도한 바였다.
모험의 성과로 황금을 얻은 자들이 저기 있었다. 충분히 과시가 될 터였다.
과연 보어조아는 비카파가 기대한 대로 행동해주었다.
“못 보던 와중에 신수가 아주 훤해졌습니다그려?”
웬 귀족의 인사치레에 보어조아는 그저 빈말이려니 여기지 않고 열정적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신수가 훤할 만한 성과를 얻었으니까 말입니다! 제가 얻은 황금이 얼만지 압니까? 일부 예금한 것만으로 이자가 얼마나 붙는지······”
“신수 훤해진 게 그 사과 덕분은 아니고?”
“사과?”
“황금사과 말이외다. 소문으로는 장군께서 그걸 차지하셨다던데······ 혹시 그걸 이미 드셔서 회춘하신 게 아닌가 하고.”
“아니요! 아니올시다! 벌써 먹었을 리가!”
그리 답하면서 껄껄 웃는 보어조아를 비카파는 유심히 살폈다.
과연 저놈이 난전 중에 황금사과를 차지했을까? 이번 연회에서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있기를 바랐다.
‘저놈이 갖고 있단 걸 알아내기만 하면, 모르가나에게 부탁해서 훔쳐올 수도······’
보어조아는 이후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황금을 얻은 계기가 된 트롤과의 전투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살아생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럴 수가 없죠! 거대한 짐승에 올라탄 트롤들이 돌격해오는 가운데 거인 궁수들이 포탄 같은 화살을 퍼붓고······ 마지막으로는 바위산에서 거대하고 시커먼 악룡이 모습을 드러내 그 모두를 불태워버리는데, 그 경천동지 하는 장면을 여러분은 감히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산과 같은 덩치였습니다! 그 불길은 가히 세계를 불사를 만했고요······”
“용이 실제로 있습디까?”
“그걸 말이라고! 이 도시에 있으면 보기 싫어도 보는 게 그놈의 용입디다! 세계수를 오르다보면 불 뿜는 거북과도 같은 용도 보이고, 도마뱀 같은 용들도 많고요. 예전에는 웬 흑룡이 날아와서 도시 밖 난민들을 불태운 적도 있는데······”
“난민을? 몇 명이나 죽었소?”
그 질문에 보어조아는 주저 없이 부풀려서 대답했다.
“만 명쯤 타죽었다던가?”
질문하던 귀족은 아연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용이 그토록 강하오?”
“거대하고, 날아다니고, 그 비늘은 튼튼해 화살도 튕겨내는데 어찌 대적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난민들뿐 아니라 도시가 깡그리 불탔어도 이상할 게 없었겠군. 그 위기는 어찌 극복했답디까? 그리고 그 산보다 컸다는 악룡은 또 어찌 막아냈고?”
“영웅들이! 롤랑 경이 처치했지요! 영웅들이 흑룡을 물리치는 건 제가 어찌 보지 못했는데 롤랑 경이 악룡을 죽인 건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놈이 최후의 발버둥으로 자신이 올라타 있던 산을 통째로 불태우는데 바위산이 아예 녹아내려 용암이 흐르더군요. 용암이 뭔지 압니까? 바위가 녹으면 빨간 물이 되는데요. 그것도 전 난생 처음 보았습니다······”
허구적이어도 너무나 허구적인 이야기. 모여든 일부 귀족들은 그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하나 고민했다.
순수하게 믿는 척하기에는 이쪽이 멍청해 보일까봐 자존심이 걸렸다.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하기에는 비프로스트의 모두가 그 일을 사실로 인정하는데, 그들 모두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터였다.
그 와중에도 젊은이들은 만용이 넘쳤다. 분명 자신을 냉철하고 이성적이라 여기고 있을 터인 판사 청년이 물었다.
“그런 일이 실제 벌어졌음을 어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놈의 영웅들이 발할라 구경이라도 해본 작자들임은 또 어찌 증명할 수 있고요?”
“그들의 위업이, 그 성과가 증명하지!”
“글쎄요, 위업이고 뭐고 신학 대학 졸업하신 사제들께서는 고대 영웅을 종살이 시키는 건 결코 불가능하다 주장하시던데. 그 주장에 걸맞은 근거도 제시하셨고······.”
거의 조롱하는 투였다. 무시당했다고 느낀 보어조아는 벌컥 성내려 했다.
그 대화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증언은 할 수 있겠지. 그 세계가 불타는 듯하던 현장에 나 또한 있었으니 기꺼이 보증하겠네. 그는 진짜 롤랑 경이야.”
판사는 증언과 증명이 같으냐 따지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화에 끼어든 자가 다름 아닌 아이스피시 공작이었기에. 감히 대오공국의 대군주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입 다문 판사의 편을 들어주는 이도 있었다.
교황 특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건 불가능하지요, 공작님. 수백 년 전 영웅들이 이 땅에 부활하다니? 군종사제들이 뭐라 말해주지 않던가요?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그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 드리자면 한 시간은 족히 설할 수 있는데······”
그 와중에 문장관이 소리 높여 선언했다.
“메디아 공작, 오스론 추기경께서 입장하십니다! 그와 함께 메디아 후작 롤랑 경과······”
롤랑이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돌려 회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자, 과연 어떤 인물이 뻔뻔스럽게도 고대 영웅이랍시고 나타날 것인가?
그러나 가장 먼저 나타난 자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사였다.
별로 높지도 않은 천장에서 맹금류가 편히 날아다니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발키리는 그 거대한 날개를 나풀거리며 자연스럽게 건물 안에서 날아왔다.
그녀의 룬 창은 스테인글라스에 투사된 무지갯빛 햇살을 반사해 이 세상 것이 아닌 빛을 발산했다.
그 빛 아래에서 남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선 알아볼 수 있는 얼굴, 오스론 추기경. 그리고 그 옆에서 걸어오는 영웅들.
붉은 수염의 남자, 마치 토르의 현신이 아닐까 싶은 그 기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롤랑이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기사이자 전쟁신의 대전사. 한때 내가 다스렸던 도시에 당도한 객들을 뵙소.”
< 연회장 -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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