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굴 - [2] >
몇몇 트롤 전사는 뭉쳐 벽을 형성하라는 지시에 내심 황당했다. 전쟁 같은 상황이라더니 진짜 전쟁인 줄 아나?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모든 전사들은 그 지시를 내린 보초에게 감사했다.
저 따위 괴물은 난생 처음 보았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괴물.
일순 로키인가 생각했다. 불과 사기의 신. 저 불을 이쪽에서 직접 붙인 것만 아니었더라면 정말 로키가 강림했노라 믿었을 것이다.
한 트롤이 방패들 사이로 흘긋 보이는 괴물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방패에 쥔 손에 힘을 주며 양 옆을 둘러보았다.
굳건하게 옆을 지켜선 형제들이 보였다.
약간이나마 용기가 솟을 듯도 했다. 적이 아무리 끔찍한들, 지금 이 자리에 부족이 함께였고 모두의 방어는 견고했다······.
과연 그 방어선은 객관적으로 뚫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길마저 넘어온 광전사가 잠시 멈춰 설 정도였다.
미친 와중에도 이곳에 뛰어들어봤자 별 재미없으리라는 것쯤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트롤들은 여전히 긴장한 채, 그러나 약간은 안도한 채로 광전사를 바라보았다. 그 몸에 붙은 불이 슬슬 꺼지고 있었다.
그 불이 꺼지면 덜 괴물 같아 보일 것이다. 그리 겉모습이 바뀌면 놈을 상대해야 할 자들로서는 더욱 용기가 날 것······.
멈춰선 그 자리에서 광전사가 도약했다.
트롤들의 장신을 뛰어넘는 높다란 도약이었다. 그 괴물이 자기네 머리 위로 날아온 순간, 트롤들은 그저 멍하게 방패만 들고 있었다.
용케 반응한 몇몇도 그 대응이 더 낫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창이 방패들 사이에 낀지라 창날을 위로 향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내 광전사가 방어선 뒤로 착지했다.
그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광전사는 등을 내보인 트롤에게 돌격했다. 그리고 살육.
비명, 고함. 아비규환의 소요가 일었다.
“아르테미스여!”
누군가가 비명처럼 내지른 외침을 광전사의 포효가 뒤덮었다.
“오딘께서야말로 가장 위대하시다아!”
광전사는 사방팔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당장 눈에 보이는 놈부터 그 옆에 있는 놈까지 마구 난도질했다.
순식간에 다섯이 베였다. 트롤들은 이내 방어선 따윈 내팽개쳤다. 벽을 이룬 방패를 회수하거나 아예 내던지고는 급히 뒤돌아섰다.
그리 적에게 시선을 향한 순간, 미친 듯이 날뛰는 괴물이 보였다. 잠시 주눅 든 사이에 또 한 전사가 베였다.
뒤늦게나마 전의를 추스른 전사 둘이 달려들었다. 반쯤 운명을 내던진 심정으로.
칵, 퉤.
그리고 둘 다 죽었다. 그리 여럿 희생된 마당에야 겨우 모두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꺼번에, 덮쳐!”
괴물을 둘러싼 채로 창을 내찔렀다.
수많은 손을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공격들은 거의 다 막히고 있었다.
광전사는 포위되지 않고자 뒤로 물러나면서도 반격과 방어를 해냈다.
뒷걸음질 치는 와중 덮쳐온 창대를, 창대를 잡은 손목을 베어버렸다. 적이 좀 많이 접근해왔다 치면 아예 목 째로 베어버리기도 했다.
아르테미스의 손길로 짐승이 된 트롤들 또한 가세했다. 큰곰이 달려왔다. 겁에 질린 젊은 트롤을 밀쳐내고는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돌격.
큰곰이 울부짖으며 달려가 앞발을 들어올렸다. 이내 덮치려던 차, 광전사가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리더니 이내 큰곰의 코를 내리찍었다.
큰곰이 잠시 숨을 쉬지 못하는 차 그 목에 룬검의 칼날이 스쳤다.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가운데 여신의 손길이 짐승의 몸에서 거둬졌다.
그리 죽고 또 죽어나갔다.
몇 번의 운 좋은 공격이 명중하기는 했다. 아무리 재주 좋은들 결국 다 막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광전사의 몸에 상처 하나를 낼 때마다 서너 명의 트롤 전사가 희생되고 있었다.
겨우 광전사의 사지에 창날을 찌른들 깊이 박히지도 않았다. 그 피부가 끔찍하게 단단했다. 괴물답게도.
“젠······ 장······.”
형제들이 하염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트롤들은 거리를 좁히고자 계속 전진했다. 창을 앞에 겨눈 채로.
그저 어쩔 수 없이 나아가며 트롤들은 저 괴물을 보았다. 모두를 조롱하듯 뒷걸음질 치고 있는 광전사.
그 몸에서 불은 거의 다 꺼진 채였다. 그러나 그 화상은 그다지 치명적인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온통 그을렸을 뿐.
불꽃도 해치지 못한 피부라니. 트롤들은 이를 악물었다. 괴물 새끼. 초자연적인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한시라도 빨리 저 괴물을 해치워야 했다.
이내 트롤들이 달려들었다. 모두들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
형제의 시체를 쌓으며 트롤들은 전진했다.
괴물의 상처 하나에 전사의 목숨 여럿. 이 망할 교환 비율은 쉬이 개선되지 않았다. 한 위대한 전사가 괴물의 어깨에 창을 꽂아 넣는 데 성공해서야 겨우 조금 나아졌다.
그 업적을 이룬 동시에 위대한 전사는 죽고 말았지만. 이후로는 괴물에게 상처 하나 낼 때마다 전사 두셋이 죽었다.
어쨌건 그 터무니없는 희생에 말미암아 괴물도 상처입고 있었다. 하나하나라면 미세할 상처라도 계속 축적되었다.
광전사의 사지 곳곳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특히 창날이 깊숙이 박힌 어깨는 그 근육이 다친 탓에 그 광포한 의지를 충분히 구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나웠고 트롤 몇 죽이기에는 충분한 몸이었다.
“아, 와라! 와! 더 빨리! 싫으면 내 쪽에서!”
광전사가 순식간에 덮쳐와 룬검을 찔러왔다. 그리 또 한 트롤의 심장을 꺼뜨리고는 덮쳐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쓰러지는 형제의 시체를 밟고 그 뒤의 트롤이 전진했다. 형제들의 피로 물든 발.
트롤은 떨리는 눈으로 물러나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 몸의 불은 이미 꺼졌지만 그 눈은 여전히 불타는 듯 붉었다. 투지가 넘치다 못해 아까보다도 살의가 솟는 것처럼.
‘상처 입은 괴물.’
그 사실이 안도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자칫하면 더 많이 죽으리라. 그래서 전사들은 긴장한 와중에도 착실하게 대응했다.
피해를 줄이고자 방패를 앞세웠다. 방패 뒤에서 창을 찌르고 또 찔렀다.
한 트롤이 광전사의 다리를 노리고 창을 쭉 뻗었다. 광전사는 그 창대를 짓밟더니 역으로 칼을 휘둘러왔다.
“꺼져!”
그 결과 전사 하나가 또 죽었지만 나머지 전사들도 놀고 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창들이 허공을 갈랐다.
숨넘어가는 소리.
또 한 명이 희생되었다. 용맹하게 달려들었던 젊은 트롤이 그 배를 찔려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러나 나머지가 소소한 복수를 해냈다. 마침내 노리던 광전사의 다리를 찌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미 찔리고 또 찔린 다리였다. 그리하여 벗겨진 피부에 가해진 일격이었다.
이것은 꽤나 치명적이었다. 광전사로서는 우월한 속도에 의지하여 다수의 맹공을 감당하던 와중이었기에 더욱.
상처 입은 광전사가 노성을 내질렀다.
“좆같은 것드을!”
분노에 차 더욱 거세게 반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두 명을 더 오딘의 곁으로 보내버렸다.
그 와중 상처 하나를 더 입었지만 광전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기도드려 치유를 바랄 뿐.
오딘의 손길이 곧바로 자신의 대전사를 쓰다듬었다. 결코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그 상처가 아물어갔다.
이제 절망을 느끼면서도 트롤들은 계속해서 공격했다. 창을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괴물을 절벽 가장자리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
이 순간. 트롤 전사들은 더욱 긴장했다.
궁지에 몰린 상처 입은 괴물. 어찌 나올 것인가?
저 괴물이 마치 날개호랑이처럼 도약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본 뒤였다. 그리하여 후열의 전사들은 창을 빽빽이 치켜든 마당이었다.
혹시 몰라 활잡이들도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저 괴물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다든가, 혹은 아까 망루를 습격했던 맹금류 괴물이 보일 경우 쏴 맞추고자.
어쨌건 준비만은 만전이었다.
전사들이 또 다시 한 발짝 내딛었다. 그에 맞서 광전사는 한 발짝 물러나야 했다.
지금 괴물과 트롤들 간의 거리는 창의 길이보다 살짝 긴 정도였다. 창날이 닿을락말락한 거리.
그 거리에서도 저 정신 나갈 만치 빠른 괴물은 불쑥 덮쳐왔다가 불쑥 물러나곤 했다.
이번에도 덮쳐올까?
과연 그랬다. 광전사는 더 이상의 수세를 견디지 못했다.
이내 저 수많은 창날을 그저 몸으로 받아내겠다는 듯 뛰쳐나갔다.
“오딘이여어!”
방패를 앞세우고 돌격. 트롤들은 곧바로 창을 뻗어 대응했다.
그러나 역시 괴물은 빌어먹게 빨랐고 힘마저 강했다. 충돌의 순간, 트롤들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괴물을 밀쳐내고자 내뻗은 창은 방패에 부딪쳐 부러져나갔다. 때문에 괴물의 돌격을 곧바로는 저지하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광전사는 저항에 마주하면서도 계속해서 전진했다. 칼과 방패 모두를 휘둘러 방해해오는 창의 숲을 부숴나갔다.
그러나 당장 방어하지 못하는 다리 사이를 트롤들의 창이 노렸다.
치명적인 하단공격. 이 난잡한 와중에도 광전사는 그 대부분을 흘리거나 도중에 짓밟아 막아냈다.
그러나 몇몇 창은 끝내 그 발목을 찔렀다.
그 모든 방해를 뚫고 광전사는 끝내 지척까지 다가왔다.
또 다시 그 룬검이 빛났고 트롤의 목이 날았다. 그와 동시에 트롤들이 수많은 창들을 뻗었다.
그 공격 또한 대부분 막혔다. 광전사는 방패로 급소를 방어한 채, 또 다시 칼로 궤적을 그렸다.
그 한 번의 동작만으로 창대 셋이 잘려나간 차였다.
전사들의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깔렸다. 삐죽삐죽한 나뭇가지가 솟아난 짐승의 그림자.
거대한 뿔사슴이 전사들의 위를 넘어 도약했다.
뿔사슴은 저 측면에 착지하더니, 이내 광전사를 향해 돌진했다.
광전사가 급히 칼을 뻗어 사슴의 머리를 노렸다.
반격 자체는 성공했다. 광전사의 칼날은 사슴의 뿔에 걸리지 않고 그 머리를 찔렀다.
그러나 그 칼날이 두개골을 넘어 뇌를 건드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그 반격은 사슴을 죽였지만, 그 돌진마저 막아내지는 못했다.
사슴의 뿔에 받혀 광전사가 나가떨어졌다.
그 몸이 하늘을 날았다. 절벽 너머로.
절벽은 떨어지면 당연히 곤죽이 될 높이였다. 그제야 트롤들은 희열에 차 그 가장자리에 다가갔다.
죽었나?
아니었다. 광전사는 지면에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떨어지던 와중 낚아챘는지 그 몸을 안고서 발키리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어쩐지 지금까지 안 보이더라니.
트롤들은 찢어져라 지시했다.
“쏴, 쏴!”
다행히도 사수들이 활을 팽팽하게 당긴 채였다. 트롤들의 거대한 장궁에서 발사된 기다란 화살들이 하늘을 날았다.
발키리의 비행은 능숙했고 대단히 빨랐다. 덕분에 대부분의 화살을 피해냈으나 트롤 중에서도 일등사수가 있었다.
발키리가 나무 위를 날던 차, 끝내 한 발의 화살이 그 등에 박혀버렸다.
“억······.”
피를 토하며 발키리가 추락했다. 그에 닿은 나무에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트롤들은 그 낙하지점을 답답하게 바라보았다. 추락한 두 괴물이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죽었나, 살았나.
아마도 살았을 것이다. 괴물이니까.
트롤들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잔뜩 죽은 마당이지만, 저 괴물은 반드시 끝장을 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곳에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다.
이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듯 누군가가 고함질렀다.
“쫓, 아!”
일체의 대꾸도 없이 모두가 그 말을 따랐다. 트롤 전사들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트롤들은 좁다란 길목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절벽을 내려갔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두 괴물의 낙하지점을 향했다.
이내 목표점에 다다른 순간에야 전사들은 질주를 멈췄다. 급히 주변을 살폈다.
잘못된 위치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분명했는데, 주변에 흥건한 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전사들은 절망했다.
“없어.”
떨어진 괴물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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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