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굴 - [1] >
트롤을 쫓아라.
이 상황에는 중의적으로 해석될 지시였다. 애당초 이곳 사람들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지시인지 발키리는 용케도 알아들었다.
발키리가 물었다.
“그러지. 거리가 멀어진 이후로는 내가 알아서 판단해도?”
제이슨이 외쳤다
“돼! 그러니까 빨리 가!”
이내 발키리는 소환주의 뜻에 따랐다.
맹금류의 날개가 양쪽으로 펼쳐졌다. 곧바로 발키리는 나무 위를 스치고 날아 멀어져갔다.
천사의 뒷모습을 모두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이내 아말릭이 물어왔다.
“이제 어째야 합니까?”
이 무리의 지시자는 롤랑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인물이 저 숲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말을 타고 쫓아간들 따라잡을 수 없을 만치 정신 나간 속도로.
이내 대답한 것은 모지였다.
“우리도 쫓아가야지요. 언제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
광전사의 세상이 완전한 진홍빛 일색은 아니었다.
녹음은 검붉었고 땅은 피와 뇌수를 섞은 분홍빛이었다. 다른 사물들 또한 붉은 빛이기는 해도 진홍 그 자체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광전사가 보기에 진정 붉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
거죽 아래 흐르는 더운 피.
그 고귀한 색을 드러내기 위해 광전사는 검붉은 나무들을 지나 달려 나갔다. 드문드문 마주친 적들에게서 예의 붉은 것을 쏟아내게 만들며.
멀리서 보기에 그 질주는 마치 붉은 유령과 같았다. 지나치게 빠른 나머지 흐릿한 형체로만 보여 그 색상밖에 드러나지 않는.
질주하는 와중 위에서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광전사는 그쪽에 험악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거기 무엇이 있는지 보고서는 이내 웃음을 흘렸다.
“자매여!”
숲 위를 날던 발키리도 무뚝뚝하게나마 웃어보였다.
“그래, 형제여. 까마귀가 영웅의 뒤를 따라 싸우고자 하는데 그 영광을 베풀 텐가?”
“물론, 내게도 영광일 것이오!”
그리 외치고는 광전사가 계속 달렸다. 걸리적거리는 나무뿌리를 부수고 가로막는 수풀을 찢어발기며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둘이서 숲을 가로지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절벽이 보였다.
높다란 절벽. 그 끄트머리에 망루 같은 건축물이 돋아나 있었다. 물론 보초까지 세워진 채였다.
그 이외에는 별 다른 방어시설이 없었지만 공략은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저 지형조건 자체가 천해의 요새였으므로.
저 위로 어찌 올라가나? 간단했다. 발키리가 제안했다.
“들어서 올려다줄 수 있다.”
하늘을 날아 절벽 위로 착지하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당연히도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광전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거절했다.
“되었소, 전사에게는 두 다리가 있으니!”
여자에게 들려서 운반되기는 창피한 모양이로군.
그리 짐작했지만 발키리는 굳이 더 제안하지 않았다. 달리 올라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절벽 위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기는 했다. 폐소공포증이 느껴질 만치 좁다란 길이었지마는. 그러나 날아서 운반되다 화살이라도 맞아 떨어지느니 보다는 차라리 제 발로 달려가는 것이 안전할 수도 있다.
과연 광전사는 그 험난한 길을 택했다. 마구 달려 나가며 그 발소리를 숨기지도 않았다.
“오딘을 위하여어!”
곧바로 적들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광전사를 발견한 보초병이 나팔을 불었다. 곧바로 부락 곳곳에서 트롤 전사들이 결집했다.
그리하여 트롤들이 보게 된 적은 겨우 하나였지만 아무도 방심하지 않았다. 접근해오는 적이 지나치게 위험해 보였기에.
광전사는 지나치게 빨랐고,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손에 들린, 용의 뼈로 된 방패는?
그 방패의 주인이었던, 위대한 전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르엘라?”
죽었을까?
당장 실감은 나지 않아도 그 가능성만은 알아두어야 했다. 저 정체 모를 괴물의 강대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트롤 전사들이 경계나팔을 높이 불어 만전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모두 수렵용 무기가 아닌 전쟁용 무기를 들고 나섰다. 거대한 활, 거대한 방패, 장창 따위의.
활을 든 사수들은 고지대에 올라 사격 준비를, 나머지는 유일한 길목에 가 방어진을 형성했다.
좁은 길목에 막 광전사가 발을 디뎠다. 놈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선두에 나선 트롤 전사는 얼어붙었다.
시뻘건 괴물. 피로 물든 그 얼굴은 얼핏 보면 트롤과 같은 듯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명백히 달랐다. 보통 트롤보다 기분 나쁠 만치 주름이 적어 생동감이 없었다.
동족과 흡사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트롤의 생리적 혐오감을 자극했다. 마치 유령과 싸우는 느낌이었다.
‘여신이여.’
트롤 전사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용맹하게 달려 나갔다.
“아르테미, 스!”
트롤은 방패와 창을 들었다. 창이야 그렇다 쳐도 방패를 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수렵에서는 써먹지 못할 전쟁용 무기. 새삼 지금이 작은 전쟁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길목은 좁아 둘이서 나란히 뛸 수 없었다. 트롤 전사는 그저 선봉으로서 혼자, 마치 이 세상에 자신과 저 괴물만 남겨진 기분으로 돌격했다.
서로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트롤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저 괴물의 속도에 경악했다.
역시나 유령인가?
잔뜩 긴장한 채 트롤이 어어 하는 차, 광전사가 이미 다가와 있었다.
트롤은 그저 요사한 칼을 든 괴물의 손이 꿈틀거렸다고만 느꼈다. 그리고 방패를 들어 올린 순간, 그 목은 이미 몸에서 벗어나 가파른 경사를 따라 굴러나갔다.
그 뒤에서 따라오던 전사는 경악하면서도 방패를 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광전사가 이쪽으로 쓰러지던 시체를 걷어찼다. 트롤이 든 방패 위로 그 시체가 엎어졌다.
트롤은 방패 위로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시야마저 가려져버렸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트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시체 너머로 미친 듯이 창을 쑤시고자 했다.
그러나 창을 쑥 뻗은 순간, 그 물미가 잡혀버렸다. 도로 뺏고자 잡아당겨 보았으나 도저히 당겨지지 않았다. 힘의 차이가 역력했다.
트롤은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당겼다. 그리 몸을 움직이느라, 방패에 기대 있던 시체가 미끄러졌다.
가려져 있던, 광전사의 얼굴이 비로소 드러났다.
온통 핏빛인 괴물. 그 시뻘건 눈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트롤은 전사의 마음가짐조차 잊고 그저 공포에 차 비명 질렀다.
“아아, 아아아악!”
그 비명을 그치게 한 것은 다시 솟아난 용기가 아니었다. 광전사가 자기가 든 뼈 방패를 부딪쳐왔다. 둘의 방패가 불꽃을 튀기며 충돌했다.
그 충격을 트롤은 감당할 수 없었다. 이내 방패를 놓쳤다. 드러난 그 목에다 광전사가 칼을 꽂아 넣었고 영원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 시체 또한 경사 때문에 광전사가 있는 방향으로 엎어졌다. 광전사로서는 아까처럼 걷어차려던 순간, 문득 그 눈에 망루 위를 날아다니는 발키리가 보였다.
망루 위에 세 사수가 서있었다. 놈들이 시위를 당긴 차, 그 안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직격당한 놈은 물론 그와 살을 붙이고 있던 두 동료마저 감전되었다.
구워지는 트롤 둘을 보며 광전사는 자매의 도움에 감사했다. 그리고 자매에게 더 용맹한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체를 밟아 지면에 깔아 버렸다. 그 위를 밟고 광전사가 돌격했다.
이번에 보인 트롤은 조금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놈 또한 큰 방패와 창으로 무장했다.
광전사는 자기 뼈 방패를 앞세운 채 돌격했다. 그리고 동료 둘의 죽음에 잔뜩 겁 먹은 트롤과 충돌했다.
나가떨어진 것은 트롤이었다. 충돌의 순간, 트롤이 더 크고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놈의 몸이 일순 붕 뜨고 말았다.
그리 나가떨어진 놈 위에 광전사가 올라탔다. 공포로 일그러진 안면를 짓밟아 부수고 그 목을 잘랐다.
광전사는 다음 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러나 더 이상 길목을 혼자서 막으려 드는 트롤이 없었다. 이제 길목은 텅 비었다. 그렇다면 적은 저 너머에 있으리라.
광전사가 계속 달리던 차, 갑자기 절벽 위에서 물건 세 개가 던져졌다. 항아리 세 개.
길목에 떨어진 항아리는 곧바로 깨져 그 안의 기름을 쏟아냈다.
갈색 기름이 길목의 경사를 타고 흘러내렸다. 기름이 양이 꽤 되었다. 금세 광전사의 눈앞까지 기름이 번졌다.
기름과 좁은 길목.
바보라도 놈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과연 광전사가 멈춘 사이에 트롤들이 횃불을 던졌다.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 거대한 불길이 길목을 가로막았다.
광전사는 일순 멈칫했다.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은 로키를, 수르트를 연상시켰다.
불꽃의 화신들. 결국 광전사는 불의 거인에게 뱃속이 불타 죽었더랬다.
그러나 지금 느낀 공포의 파편이 되려 광전사를 격앙시켰다.
일순이나마 내보인 부끄러운 모습에 광전사는 수치와 분노를 담아 고함질렀다.
“죄송합니다, 오딘이여!”
그 포효에 밀려 불길이 일순 뒤로 밀려난 것 같았다. 광전사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광전사를 삼킨 불길이 거세게 춤을 추었다.
피와 기름이 그 몸에 덕지덕지 묻은 와중이었다. 광전사가 불길 속을 달려감에 따라 불꽃이 온몸에 달라붙었다.
시뻘건 불을 휘감고서 광전사는 달렸다.
온몸의 갑주와 그 안의 거죽이 타들어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써서는 안 되었다. 오딘의 대전사라면 기필코 그래야 했다.
이내 불길을 넘어 광전사가 골목 너머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적들을 보았다.
거대한 뿔사슴이, 큰곰들이 대열을 이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방패에 방패를 겹친 방패벽이 있었다.
물론 방패 방진은 인간도 써먹는 전술이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방패벽은 가히 포탄도 막아내지 않을까 싶은 구성이었다.
트롤들은 거인의 말예가 아니고서야 들 수 없을 육중한 방패를 들어 벽을 형성했다. 그 빼곡한 방패 사이사이로 길쭉한 창이 빠져나와 있었다.
놈들이 이룬 진형 너머로는 도주 중인 트롤들이 보였다. 작은 트롤, 늙은 트롤 따위가 지금 나타난 유령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광전사는 눈 주변이 불타올랐다.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
내면의 오딘께서 명령하셨다. 쫓아라, 그리고 죽여라!
그것이 환청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은 채 광전사가 달려 나갔다.
“오딘이여!”
*******
여자는 먼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혼자서 트롤 부락에 돌격한 빨간 괴물. 얼핏 봐서는 무장한 사람 같아도 하는 짓을 봐서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 인간과 흡사한 또 다른 괴물일 터였다.
세계수 칠십이 층까지 다다른 정예 모험가로서 여자는 그리 판단했다.
그리고 지금 저 상황이 여태껏 애타게 기다려온 기회라고도.
여자는 불길에 휩싸인 길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들어갈 수 있을까? 저 부락 안으로?’
여자는 사흘 넘게 절벽 위로 올라갈 상황을 기다려왔다.
저 절벽 위, 트롤 부락이 있었다. 그동안은 접근할 수 없었던 그곳에 여자가 노리고 있는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난쟁이의 보물.
세계수에 언제나 소문만은 파다하던 물건들. 그러나 완전한 헛소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난쟁이의 공예품 여럿이 세계수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어느 지도를 입수한 바, 여자는 지금 트롤들이 차지한 층이 본래는 난쟁이들의 영역이었으리라 확신했다.
그 지도에 표시된 동굴이 저곳에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유일한 동료를 돌아보았다.
대머리 남자.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남자는 헤프게 웃으며 물어왔다.
“가? 지나? 가?”
여자가 대답했다.
“지금 가냐고? 아니.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곧······ 기다려. 그리고 준비해. 알겠지, 분다? 준비해. 달려갈 준비 말이야.”
여자는 계속해서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붉다 못해 이제 아예 불타오르는 괴물이 트롤들에게 달려들었다. 여자는 그 괴물의 승전을 기원했다.
그리 상황을 주시하다가 문득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맹금류를 보았다.
‘하피? 아니면 독수리 괴물?’
얼핏 보면 발키리를 연상시켰지만 그 생각은 애써 버렸다. 이 와중에 죽음의 천사를 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더 이상의 불길한 징조는 필요없었다.
가뜩이나 지금 여자가 노리는 것, 난쟁이의 보물부터가 죽음의 징조 그 자체였으니까.
전설에 따르면 난쟁이의 보물에 얽힌 자는 모조리 파멸한다고 한다. 거인, 용, 심지어 영웅까지도.
마녀 겸 모험가는 그 예외이기를. 여자는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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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