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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트롤랑-15화 (15/164)

< 큰방 - [2] >

이후로도 이 세상이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왕국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따위 이야기가 흘렀다.

그리고 본론이 나왔다.

“무엇보다 우뚝 솟은 저 세계수에 잠복한 괴물들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롤랑으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뿐이었다.

거인이니 악귀니 환상적 존재에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리고 비현실적 이야기에 동감할 수 없는 법이다.

계속 무표정하게 듣고 있자니 문장관이 마침내 결론을 꺼냈다.

“······그리하여 메디아는 귀 영웅들께 요청합니다. 성전에 임해주십시오! 세계수에 올라 저 증오스러운 괴물들에 맞서 만 백성을 편안케 해주십사, 전하를 대신하여 애원합니다!”

롤랑은 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장황한 연설의 끝은 역시 저것이었다.

국가는 당신이 필요하다!

그러니 싸워라! 싸워서 괴물을 죽여라!

그러다 혹시 운이 나쁘면 영광스러운 죽음을!

예상했던, 그리고 걱정했던 요구였다. 화마저 치밀어 올랐으나 그 감정을 표출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사실 황금을 내고 용병을 사온 과정 어디에 잘못이 있단 말인가. 저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다. 게임 좀 하려다 불려온 처지에 납득할 수는 없을지라도.

롤랑이 말했다.

“물론 우리는 그대들의 요청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소.”

문장관이 밝게 웃었다. 그러나 롤랑은 말을 끝마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확답을 드릴 수 없음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오.”

문장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말씀을?”

“우리는 황제 폐하의 지휘를 따르오. 폐하께서 명하지도 않으셨건만 멋대로 뛰쳐나가 칼을 휘두르는 일은 있을 수 없소. 그런 방종한 짓은 용병이나 하지 않으리까?”

그 폐하는 물론 카를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카를 대제로 알려진 롤랑의 친구.

말해놓고 느끼기로서도 꽤 괜찮은 핑계였다. 군주께서 명하지 않으셨으므로 무작정 협조할 수는 없다, 그럴 듯하면서도 반박하기 어려운 핑계 아닌가.

문장관은 초조한 듯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옆자리 오스론을 바라보았다.

“예하, 카를 대제께서도 부름에 응하셨습니까?”

오스론이 대답했다.

“그렇더군.”

“왜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습니······”

오스론은 문장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귀빈을 앉혀두고 사담이라니 그 웬 무례인가? 이 얘기는 나중에 하세. 아무튼 롤랑 경, 그렇다면 대제께서 언제쯤 대답해주시겠습니까? 한 달 내로 확언을 들을 수 있을지?”

롤랑은 오스론의 신분이 생각보다 높은 것 같아 당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대답했다.

“빠른 시일 내에 방침을 내려주시면 좋겠소마는, 장담할 수야 없겠구려.”

문장관이 외쳤다.

“모쪼록 급히······ 세상을 위한 일입니다!”

“내 어찌 주군의 결정을 강제하리까. 어쩔 수 없소.”

롤랑으로서는 다행히도 문장관은 더 뭐라 말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기 위한 완곡한 거절이 먹힌 것일까?

롤랑은 일단 한숨 돌리고는 접견실을 나와 큰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를을 비롯한 유저들에게 이번 대화 내용을 전했다.

스스로도 잘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카를에게 칭찬까지 받을 수 있었다.

“정말 잘했어. 시간은 끌었네.”

그날 저녁이었다. 유저들과 함께 식사한 뒤 롤랑은 다시금 책에 파묻혔다.

카를 또한 롤랑이 가져다준 책을 읽고 있었다.

다만 카를의 책은 롤랑과 달리 역사서가 아니었다. 카를이 읽는 책은 지리서, 약초서, 야생동물 사냥교본 등이었다. 역사서도 읽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저런 잡서들이 위주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롤랑이 물어보았다.

“왜 이런 걸 읽어?”

카를이 대답했다.

“탈주준비.”

“탈주?”

“그래. 어느 지역에서 어느 야생식물을 먹을 수 있는지, 사냥은 어찌 해야 하고 도축은 어찌해야 하는지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롤랑은 눈을 크게 떴다.

“탈주라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영 현실성 없는 소린데······. 그렇게도 신전에 끌려 나가기 싫어?”

“그래. 이 세상을 위해 싸워? 미쳤나? 북괴가 밀려와서 싸우라 해도 탈영하고 싶어 미칠 거다. 흙수저 물고 태어나 군대에서 이 년이나 간부들 종살이한 것도 모자라 이제 목숨까지 바쳐야 하나 싶을 거라고. 그런데 생판 딴 세계에서 뭔지 모를 이유로 싸우라고? 절대 못 그러지.”

롤랑도 그 말에 공감했다. 그렇다고 저 친구가 세워둔 계획에 동참할 수는 없었지마는.

롤랑이 말했다.

“그래도 탈주는 말이 안 돼. 온갖 생존주의 다큐멘터리를 탐독해도 뒷산에서 헉헉거릴 텐데? 중세 잡서 몇 권 읽은들 야생에서의 생활이 가능할 리가 없어.”

카를은 코웃음 쳤다.

“그건 봐야 아는 거지. 아무튼 저들 뜻대로 따라줄 수는 없다. 우린 노예가 아니야.”

더 이상의 말씨름은 평행선일 듯했다. 결국 롤랑은 자기 책에 관심을 돌렸다.

그 낡아빠진 책들을 한참 읽다가 머리가 피곤해질 즈음 자리에서 일어나 방망이를 들었다. 그리고 적당한 상대를 데려다 대련을 했다.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저들은 몸이 지치면 책을 읽고, 머리가 지치면 전투훈련을 하며 일과를 보냈다.

훈련을 막 끝낸 지금 롤랑은 몸이 피곤했다. 그리하여 책을 탐독하고 있자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제이슨이 들어와 말했다.

“얘기 좀 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웬 유저가 고함쳤다.

“뭘, 이 새끼야?”

제이슨이 말했다.

“두목 지휘를 따라야하니 당장 출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며? 그 맘 바꾸게 설득해보라고 사제 새끼들이 나한테 부탁하던데.”

“사제들 지시로 자원입대 권유하러 왔다고? 뭐 이런 첩자 새끼가······”

금세 방 안에 욕설이 가득 찼다. 새끼, 새끼, 새끼.

제이슨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한숨 쉬었다.

“난 뭐 좋아서 온 줄 아냐? 어쩔 수 없으니까 온 거지. 아무튼 내 의견부터 미리 전한다. 모두 여기 처박혀 있을 순 없어. 몇 명은 싸우러 나가야 해.”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카를 또한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뭔 미친 소리?”

제이슨이 설명했다.

“우릴 소환하라고 금고를 털어준 왕은, 한시라도 빨리 제 궁정에 영웅들이 출두하길 원해. 될지 안 될지도 모를 의식에 황금을 쏟다니 미련한 짓이라고 궁정귀족들이 뒷담하고 있거든. 왕 스스로도 헛돈 쓴 거 아닐까 고민하고 있다 하고······, 하루빨리 유명하신 영웅 한둘이 나타나서 당신 헛돈 쓴 거 아니라고 보증해줬으면 싶어 좆나 초조해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놈의 지휘권 타령으로 시간을 끌면 왕은 초조함에 맛이 가서 신전을 뒤엎으려 들걸? 그리 되면 다 끝장이고.”

“네가 왕이세요? 임금님 심정을 어찌 그리 잘 아셔요?”

누군가의 말에 제이슨은 실소하며 대답했다.

“조사관으로 파견 온 왕실 관리가 그랬다던데? 왕이 지금도 반쯤 미쳐있는데 이대로 갔다간 정말 꼭지가 돌아버릴 거라고. 덕분에 사제들도 좆나 졸았어. 자기들 소환의식이 실패한 걸 들킬까봐······”

“소환의식의 실패?”

“너희가 지어낸 설정도 까먹었냐? 기억이 혼란스럽니 어쩌느니 흔해빠진 개소리 늘어놓은 거 있잖아. 그 원인을 자기네 의식에 문제가 있었던 걸로 결론내리던데······ 왕실 관리한테 그걸 설명하지는 않았대. 그저 시간을 좀 더 달라고만 애걸했다지. 그러니까 자기네 잘못을 들키기 전에 어떻게든 우리를 출하시키려 들걸. 그리고 가축들이 출하를 거부한다면 뭔가 수를 쓰겠지? 그 전에 움직여야 해. 농부가 채찍을 쥐기 전에 가축은 제 발로 걸어 나가야 하는 거야.”

랑슬로가 으르렁거렸다.

“출하된 가축은 죽잖아, 새꺄.”

“거야 모르지. 관상용으로 고이 모셔질 수도······ 뭐 도축될 수도 있고.”

마지막 말은 놀리기라도 하는 투였다. 곧바로 발끈한 사람이 나왔다.

“도축? 지금 싸움 걸러 왔냐?”

“왜? 그럼 출하되면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랴? 그따위로 회유라도 하면 간첩 새끼로 몰아갈 게 분명한데 누구 좋으라고 듣기 좋은 소리 하냐? 난 최악의 사태를 막자고 온 거야. 다 뒈지는 상황! 그 사태 막으려면 몇 명은 어찌 되든 이 신전에서 팔려나가야 하고!”

제이슨이 버럭 소리 지르는 동시에 몇 명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싸움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중재에 나선 것은 카를이었다.

“잠깐, 다들 진정하고. 제이슨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 중 몇 명은 신전에서 바라는 대로 출두해야 한다는 겁니까? 따라나섰다가 전쟁터에 끌려갈지 괴물과 싸워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몇 명이라도 가지 않으면 큰일 난다?”

제이슨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

“따라 나가서 뭐 하게 될지 알아봐줄 수 없어요? 댁 위층에 있었으니까 사제들이랑 친하잖아요.”

“나도 알아보려 했어. 아무것도 못 들어서 그냥 온 거고.”

“아, 좀. 추궁이라도 해서 뭐라도 좀 알아봐요. 나가서 뭘 하게 될지나 알아야 결정을 하지.”

제이슨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기대는 하지 마라. 그리고 전쟁터에 끌려 나가게 되리라 말하든 용사로서 공주의 남편이 되리라 말하든······ 몇 명은 반드시 뽑혀 나가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고. 안 그럼 다 뒈지니까.”

그리 말한 뒤 제이슨은 방을 나섰다.

이십 분 가량 방 안에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이내 돌아온 제이슨의 표정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제이슨이 말했다.

“원하는 대로 물어보고 왔다. 나쁜 소식과 좆나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

카를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아무거나.”

“그럼 나쁜 소식부터. 궁정에선 우리 중 몇 명을 원정에 끼워 넣고 싶어 한다대. 대규모 원정이 있을 건데 거기 참전시키려는 모양이라나.”

“종군하라고요?”

“그렇게는 말 안 했지만, 뭐 비슷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한군두.

실은 그보다 더 끔찍할지 모른다. 이번에 입대했다가는 실전을 뛰어야 할 테니까. 끝내 죽을 수도 있으니까.

플레이어 캐릭터답게 활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따윈 아무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날의 습격을 기억했다.

제이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좆나 나쁜 소식은······. 왕실 관리가 말하길 이번 원정은 아주, 아주 영광스러운 성전이 될 거라 했다는 거야.”

그 말의 의미를 굳이 해석해줄 필요는 없었다. 모두들 잘 알아들었으므로.

따라나설 그 원정은 아주, 아주 위험하리라는 것을.

“많이 따라나설 필요는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딱 세 명 데려가고 싶다니까. 셋이 신성한 숫자라나 뭐라나.”

제이슨이 말했으나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카를이 물었다.

“얼마 뒤에 또 데려가려 하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몰라, 마! 아무튼 당장에는 두 명 뽑아 놔라. 출전할 놈 말이야.”

왜 세 명이 아니라 두 명을 뽑으라 하는 것인지는 당장 신경 쓰지 못했다. 카를이 소리쳤다.

“잠깐, 아직 따른다고 말 안 했는데?”

“거부할 거야, 그럼? 일 터지게 내버려두자고?”

“차라리 단체로 탈주하는 게 낫지, 다른 세계까지 와서 군복무라니 말이 되나?”

“탈주? 그게 더 말 같잖지! 어디에 숨어살게? 잘 숨은들 하루 한 끼나 제대로 챙겨먹겠고?”

한동안 둘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제이슨이었다.

“아무튼 난 전했다. 내일까지 출하될 새끼 두 마리 뽑아놔.”

그리 내뱉더니 제이슨은 팔짱을 꼈다. 마치 자기는 이 상황에 무관하다는 태도로.

카를은 씹어 내뱉듯 중얼거렸다.

“넌 대체 뭐하는 새낀데 말을 해도 그 따위로······”

그러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방의 유저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음을 발견했다.

저 세상 무너진 것 같은 얼굴들이라니.

< 큰방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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