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방 - [3] >
한참 후에야 카를이 말했다.
“다들 어쩌고 싶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를은 벌컥 성냈다.
“어쩔 거냐고! 저 새끼 말대로 두 명 희생할 거야? 아님 탈출할 거야? 아무나 입 좀 열어봐!”
그리고 잠시 후, 롤랑이 입을 열었다.
“출하.”
“뭐?”
“출하에 한 표. 난 도저히 숨어살 자신 없다.”
카를은 배신이라도 당한 듯 롤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화낼 틈은 없었다. 뒤이어 유저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출하, 희생, 출하, 출하······.
탈주를 주장하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카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뒤이어 그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변하더니 입술이 경련했다. 그리고 경련이 멎어감에 따라 그 낯에 분노를 대신하여 체념이 떠올랐다.
한참 후에야 카를이 말했다.
“그래, 그게 현실적이긴 하지. 자, 그래서······ 모두를 위해 나설 분은 누구?”
또 다시 대답이 없자 카를은 한숨 쉬었다.
“이번에도 투표······ 안 되겠지. 도편추방제도 아니고. 뭐 그렇담 제비뽑기나 하자.”
그리하여 유저들은 별 보안성 없는 제비상자와 그 안에 들어갈 내용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종이를 북북 찢어 제비를 접고 있는 모두의 표정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기력이 없는 탓인지 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첨상자 완성에는 삼십 분이나 걸렸다.
제비 추첨에는 공정성을 위해 제비제작에 참여하지 않은 제이슨을 동원했다.
제이슨은 모두의 분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섞는다.”
제이슨이 추첨상자를 흔들기 시작했다.
롤랑은 상자를 멀거니 보다 문득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심장이 벌렁거리는지 자기 가슴을 움켜쥔 사람도.
롤랑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다만 그 정도는 옆 사람들보다는 좀 덜한 듯했다. 그 덕인지 머릿속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우선은 저 제비의 결과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이 뽑혀나가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는 이기적인 생각.
그러나 이내 그 운 좋은 미래가 썩 희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어차피 두 명 뽑는 것이니 뽑히지 않을 확률이 더욱 커 추첨결과에 별 기대가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제이슨이 상자를 내려놓으며 선언했다.
“그럼 뽑는······”
롤랑이 가로막았다.
“잠깐.”
주변 모두가 자신을 주시하는 가운데 롤랑은 말을 이었다.
“제비는 안 돼.”
“예?”
“출하하는 거잖아. 어느 미친 양돈장에서 출하할 돼지를 무작위로 골라?”
롤랑은 생각했다.
출하, 그렇다. 출하다. 정말 적절한 표현이었다.
유저들은 지금 출하를 해야 한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거래처에 처음으로 출하하는 것이다.
“뭔 소리냐?”
카를의 말에 롤랑이 대답했다.
“첫 출하에 불량돼지를 보내선 안 돼.”
단어선택의 문제인지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즉시 볼멘소리도 나왔으나 롤랑은 계속 말했다.
“오히려 1등급 돼지를 보내야 해. 이후 상품에 대한 기대를 높일 수 있도록. 그러니까 신전에 남겨진 우리 영웅들이 좀 더 대접받을 수 있도록. 그러니 무작위는 안 돼. 뽑혀버린 불운한 누군가가 결국 전장에 내몰렸다 쳐. 가뜩이나 무서운데 억울하기까지 한 마당에 제대로 싸울까?
그런 기대는 말아야지. 둘은 병신처럼 굴 거야. 그러다 죽는다면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라 패잔병의 죽음이 될 거고. 그리고 그 꼴불견이 왕궁에 보고된다면······ 끝장이야. 우리들이 제대로 된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이 까발려질 거고 죄다 끌려 나갈 거야.”
“그래서? 어쩌자고?”
“뽑는 게 아니라 자원해야 해. 잘할 자신 있는 사람이. 만약 잘할 수 있단 보장이 없더라도 최소한 할 마음은 있는 사람이 나서야해.”
카를이 조심스레 롤랑을 바라보더니 눈을 지긋 감았다.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 챈 듯했다.
그 예상대로 롤랑이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나부터 자원······ 음, 그래. 나 자원할게.”
카를이 한숨 쉬며 말했다.
“그래, 최소한 전쟁영화에 나오는 겁먹은 신병처럼 굴 걱정은 없겠네. 광전사고······ 너니까. 자, 모두 박수.”
짝짝짝. 손뼉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의 중심에서 롤랑은 우울하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나댄 결과 자기희생하게 생겼다.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달리 뭘 어쩌면 좋단 말인가? 고생은 하게 될지언정 합리적인 선택을 했노라고 롤랑은 생각했다.
신전에서 이 식충이들에게 끼니마다 흰 빵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영웅이기 때문이다. 썩 맛있는 빵은 아니지만 그것이라도 계속 먹으려면 유저들은 계속 영웅이어야 한다.
그러니 영웅적인 모습을 내보여야 한다. 그러나 저번 습격에서 입증됐다시피 실제상황에서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기에 유저들의 정신은 너무나도 범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광전사가 나서야 한다.
비루한 정신 대신 야수성이 몸을 날뛰게 해야 한다.
“그럼 다음 자원자, 있나?”
카를이 물었으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제비를 뽑자고 말하지 않은 채 모두들 잠자코 기다렸다.
약 이십 분 지나 한 명이 떨리는 팔을 들어올렸다.
“저······”
“예?”
“저요.”
그리고 또 다시 손뼉소리가 방을 울렸다.
******
또 다른 자원자의 이름은 모지였다.
게임 직업은 마법사였지만 몸은 근육질이었다. 메디아 캐릭터들 모두가 그렇듯이.
그러나 그 건장한 몸과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사람 같았다. 말이 지나치게 빨랐고 어눌했으며 자신감도 없었다.
롤랑으로서는 이 사람을 데려가도 괜찮을까 싶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전투가 벌어질 때 제정신을 붙잡고 있을지 의문이었으니까.
그러나 모지는 자기가 방해는 되지 않으리라 주장했다.
“전 지원 마법삽니다. 가속 주문 있으니 버프만으로도 일인분 할 수 있어요. 악마 소환도 할 수 있고······ 본체가 이 모양인 상황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분신 주문도 익혔으니 이론상으로는 제몫 충분히 해요.”
애당초 파티 플레이를 상정하고 육성해낸 지원 특화 캐릭터라는 것이었다. 최종 컨텐츠가 레이드라지만 기본적으로 싱글 게임인 메디아에는 극히 드문 캐릭터였다.
나중에 알게 된즉 모지는 레이드에도 언제나 참여하던 유저였다.
그 설명을 듣고서야 롤랑도 기억해냈다. 저 남자가 게임에서는 어땠는지.
‘본래 캐릭터는 성기사였는데 힐 특화도 아니고 해서 레이드에 별 도움이 안 된다며 캐릭터 삭제해버리고 새로 키웠지 아마.’
그 정도 열성이면 꽤 기억에 남을 만한데, 어째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떠올랐다. 언뜻 생각해 보니 모지는 채팅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게임에서조차 사교성 없는 양반이라니? 꽤나 울적한 학창시절을 보냈으리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후방지원 특화인즉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알겠지만, 역시 동료로서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양반은 아니다.
‘출전에는 세 명 필요하다고 했던가? 나머지 한 명은 좀 싹싹한 놈이었으면······.’
롤랑은 그리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이슨은 주변을 쓱 훑고는 말했다.
“그럼 두 명 정해진 거지?”
롤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요. 나랑 저 분.”
“음······ 괜찮네. 잘해보자.”
불쑥 손을 내밀기에 무심코 잡았다. 마주잡은 손이 흔들릴 때에야 롤랑은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댁도 출전해요?”
“어, 사실 사제들한테 출전하겠다고 맨 먼저 자원했지. 이제 나도 너희랑 같지?”
“예, 뭐······”
제이슨은 씩 웃었다. 자신감, 혹은 우월감이 넘치는 미소였다.
롤랑은 저 미소를 불안하게 해석했다.
‘어쩐지 과하게 적극적이더라니. 그날 습격에도 활약했던 만큼 자신감이 붙었나?’
롤랑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 활약했다는 것은 유혈사태 끝에 사람을 죽였다는 뜻 아닌가.
광전사인 롤랑과 달리 제이슨은 맨 정신으로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본격적으로 전장에 뛰어들고 싶어 한다니. PTSD니 뭐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종인 것일까.
어쩐지 섬뜩했다. 그 감성이 일반인과는 너무 다르지 않나.
‘아니, 소환물이 대신 싸워줬으니 별 감흥이 없었을 수도······.’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건 전력으로는 나무랄 데 없을 인선이니까.
잠시 후 카를을 비롯한 몇몇이 셋에게 다가왔다.
제이슨은 카를을 비웃듯 쳐다보았다. 카를이 물었다.
“댁도 출전한다고?”
“어. 떫나?”
카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먼저 악수를 청하며 칭찬의 말을 건넸다.
“큰 결정 하셨네. 나서줘서 고마워요.”
이번에는 제이슨도 빈정거리지 않고 씩 웃었다.
“아무튼 결정된 거지? 나 이제 사제들한테 보고하러 간다?”
“그래주세요.”
제이슨이 의기양양하게 방을 나서자 카를은 문을 닫고는 아예 잠가 버렸다. 그리고 롤랑을 돌아보며 우울하게 웃었다.
“뭐 나서준다니 고맙긴 한데······ 저 새끼 기분 너무 좋아보였지? 역시나 이걸 이고깽 즐길 기회로 여기는 모양인데?”
주변의 몇몇이 조심스레 따라 웃었다. 롤랑은 쓰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화해 분위기 연출해놓고선······ 어지간히도 싫은가.’
그날 저녁, 롤랑이 독방에 처박혀 책을 읽고 있자니 사제들이 들어왔다. 그러고는 롤랑을 향해 넙죽 절했다.
“명예로운 기사께 지극한 감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나열되는 온갖 형용사가 범벅된 어구들.
한참 후에야 본론이 나왔다.
“······가능한 모든 것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당장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롤랑은 조금 생각한 다음 말했다.
“교사.”
******
요청에 따라 롤랑을 위한 교사가 배정되었다.
군략, 예법, 지리와 역사 등 변경백에게 필요한 소양들을 가르쳐줄 교사. 마침 와있던 문장관이 그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그것들을 배워야 할 핑계로는 현대의 지식들을 축적하고 싶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문장관은 그 핑계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정말이지 고결한 향상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맨날 시합용 창만 부러뜨릴 줄 아는 우리 기사들도 좀 본받았으면 좋을 텐데요!”
그리하여 오전 일과는 문장관의 교습으로 고정되었다.
이 고명한 학생을 상대로 문장관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변변한 교재 없이 나불나불, 그것도 죄다 생소한 내용이었으므로.
그래도 롤랑은 어떻게든 머리에 채워 넣고자 애썼다.
‘제대로 된 전문가도 아닌, 문장관도 아는 지식들을 전직 변경백씩이나 되어 몰랐다가는······.’
수업 중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질문하기도 어려웠다. 무지에 가까운 지식공백을 함부로 드러냈다가는 수상해보일 테니까.
어쨌건 책만 읽느니보다는 낫다는 데 위안을 삼고서 수업에 열중했다.
점심도 교사인 문장관과 함께 먹었다. 그러고는 지겹게도 또 다시 지식 축적에 힘썼다.
< 큰방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