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6화 (6/164)

< 위층 복도 - [1] >

불침번 초번을 맡은 카를이 말했다.

“도중에 자다 깰 필요가 없는 만큼 편하니까 되도록 오래 서겠습니다.”

다음 불침번은 카를의 옆자리 롤랑이었다.

카를에게 수고하라고 전한 뒤 롤랑은 자리에 누웠다.

침대는 편안했고 떠드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신병훈련소에서의 첫날 같았다. 내일이 조금도 기대되지 않는 잠자리. 불침번까지 서야한다니 딱 징병된 꼴 아닌가.

이후로도 여기저기서 뒤척이는 소리만 들려올 뿐 코고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대부분 잠들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꽤 시간이 지나서야 카를이 롤랑을 깨우러 왔다.

“교대하자, 현······ 롤랑.”

롤랑은 군말 없이 일어나 문 앞을 지키고 섰다.

조명이 없었으므로 복도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스산한 가운데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 당장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불안했다.

긴장한 와중에 옆에서 말소리가 걸려왔을 때 롤랑은 비명 지를 뻔했다.

“이봐요, 아저씨.”

소스라치게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시커먼 실루엣이 보였다. 뒤늦게 롤랑은 그가 옆방 불침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 음, 예. 왜요?”

“아저씨 트롤랑 맞죠? 저 토렴인데.”

게임에서 자주 만난 유저였다.

“아, 자칭 자객대장이신가. 저 어떻게 알아봤어요?”

“얼굴 보고요.”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혹시 자객이라 밤눈 좋나요?”

“그런가보죠 뭐. 게다가 저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소리도 안 났죠? 어찌 걸어야 하는지 체득되어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아까 단검 소환해서 휘둘러봤는데 뭐시냐, 나이프 파이팅? 아무튼 뭔가 기술이 구사되더라고요. 게임에서 제가 단검 숙련 3렙이라 그런 거 같던데.”

“마법만 가능한 게 아니라 게임 내 기술도 체득된 거 같다 이건가요?”

“예. 안 해봤어요?”

“전 장검 숙련했는데 칼이 없으니······”

“칼쯤이야 소환사한테 소환해 달라 하면 될 텐데? 아무튼 지금 칼도 없고 아무것도 안 보이신다 이거죠?”

“예.”

“위험한데요. 그러면 자객 말고 딴 사람들이 불침번 서는 의미가 없지 않나요? 이대로 습격당하면 다 허우적거리다 죽는 거 아닌가?”

“그럼 좀 밝아질 만한 마법 써볼게요.”

마음속에 룬을 그리고, 허공에 불을 피워냈다. 그러나 금세 꺼졌다. 전문 마법사쯤 되지 않으면 마법으로 조명을 대체할 수는 없을 듯했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자니 시간이 제법 흐른 듯했다.

롤랑이 느끼기에 슬슬 어지럽기도 한 것이 자두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토렴과 인사를 한 후 옆자리 인원을 깨우러 갔다.

“아저씨, 일어나요.”

“아, 왜······”

“불침번 교대해줘야죠.”

바로 일어나지 않기에 흔들어 깨웠다. 잠시 후에야 옆 자리 남자는 휘청거리며 방을 나섰다.

‘어지간히 잠 깨기 싫은가 본데, 이 상황에 숙면한 거야? 이 상황에 긴장도 되지 않나?’

저 작자를 불침번 세워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롤랑은 이내 침대에 누웠다. 예비군도 아니고, 불침번 서다 졸린답시고 도로 잠들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불침번은 두 명이니, 한 명이 문제여도 다른 한 명이 어떻게든 해주리라.

괜찮으리라 믿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

남자는 이 기괴한 상황에 조금도 적응하지 못했다.

오늘 하루, 현실감이 전혀 없는 가운데 그저 넋 나가 있자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밤이니 졸리니까 자려니 불침번 서야한다며 끌려나왔는데 막상 나와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것인지, 뭘 어째야 하는 것인지 당최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저 문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자니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졸아요?”

그 순간만 퍼뜩 깨서는 대답했다.

“아뇨······.”

그러고는 다시 졸았다.

옆방을 지키고 선 불침번은 이후로 조느냐 물어보지 않았다. 일단 대답도 돌아왔거니와, 설마 첫날밤부터 긴장감을 잃고 나태해질 리 없다 여겼으므로.

그러나 남자는 긴장하지 않았다 못해 심적으로 붕 뜬 채였다.

오늘 하루, 주변 상황에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이 현실이리라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상황에 동화될 수 없었다. 몰입하기 힘든 SF 영화를 보는 느낌이 이럴까.

시간이 조금 흐르고, 어두운 복도에 한층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그림자는 빠르게 다가오더니 문 앞을 지키고 선 두 명을 발견했다. 그림자는 제 손에 들린 노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느 쪽을 먼저?’

잘 보니 한 놈은 졸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야 졸지 않고 있는 놈부터 처리해야지. 그림자는 그렇게 했다.

다른 한 놈에게 몸 숙이고 가까이 접근해 노끈을 그 목에다 걸었다.

졸린 목 사이로 엑, 하는 소리가 빠져나왔다.

노끈에 힘을 주었다. 목표는 그르륵, 소리를 내더니 축 늘어졌다.

그림자는 지금 자신이 죽인 청년이 수백 년 전 수많은 신화적 괴물과 시련을 이겨낸 바, 그 업적에 감명 받은 신들의 부름을 받아 승천한 이래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강대한 거인들을 베어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림자는 그저 놈을 쉽게 죽였다는 사실에만 만족했다.

그때 그 옆에서 졸고 있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안 졸아요.”

그림자는 일순 흠칫했지만 이내 비웃어 넘기고는 놈에게도 같은 운명을 안겨주었다. 놈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가버렸다.

‘병신 새끼.’

그렇게 대오공국의 시조 알프레드 왕이 죽었다.

이윽고 그림자의 동료들이 들어왔다. 그들 손에 들린 칼과 도끼에는 이미 피가 묻어있었다.

그림자가 손짓했다.

“들어가자.”

방이 두 개니 두 무리로 나뉘어 들어갔다. 몇 명은 문을 가로막고, 나머지는 잠들어있는 자들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역사상 최고였던 전사들의 피와 뇌수가 베개를 적셨다.

일곱 베개가 붉게 물들었다. 불과 십 초 만에.

******

발자국 소리와 동시에 잠들어있던 몇 명이 퍼뜩 깼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옆방에서 뭔 소리 나지 않았어요?”

롤랑도 퍼뜩 일어나 주변을 살핀 다음 소름이 끼쳤다.

주변에 누군지 모를 실루엣이 여럿 보였다. 그들 손에 들린 흉기들 또한.

그 흉기가 자신을 향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롤랑은 반사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곧이어 그 빈자리가 도끼날에 움푹 파였다.

롤랑은 벌떡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고함질렀다.

“다 일어나!”

그 외침에 반응하여 흉기들 또한 움직였다.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두들 침대에서 벗어났다.

“뭐······”

눈은 어둠에 익었으나 적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뭘 어찌 해야?

“빛나라!”

막막하던 순간, 누군가의 침대에서 시퍼런 구슬이 떠올라 주변을 밝혔다.

메디아에서 동굴 탐사 따위에 쓰이는 조명 주문. 시기적절하게 마법을 쓴 것은 모지라는 이름의 마법사 유저였다.

기민하다고 감탄할 틈은 없었다.

불빛을 통해 괴한들의 형체가 드러났다. 경무장한 거한들. 험상궂은 얼굴, 그 위에 지저분하게 자라난 수염과 머리칼이 피에 젖어있었다. 분명 위험한 작자들이요 이미 여기서 잔뜩 저질렀으리라.

“아, 으, 마술쟁이? 씹할 뭐야, 좆같네.”

괴한 중 하나가 중얼거리더니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그 순간, 쇠뇌를 든 괴한이 발광 구슬에 둘러싸인 모지를 겨누었다.

팅 하는 소리.

다음 순간, 모지의 가슴에 화살이 꽂혀있었다.

모지는 끅, 하면서 꽂힌 화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입에서 피를 흘리고는 이내 축 늘어졌다.

순식간에 또 사람이 죽었다. 모두들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 하루 영웅들 중에서 대장 역을 자처하던 카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아, 아, 악······.”

그 어깨에 도끼가 박혔다. 도끼날 사이로 피가 거품처럼 부글부글 새어나왔다.

괴한은 도끼를 그대로 쑤셔 박아 심장까지 닿게 하려는 듯 힘을 주었다. 카를은 그에 맞서 괴한의 팔을 움켜쥐고 버텼다. 그러나 그것은 반격이 아닌 단순 발버둥에 불과했다.

도끼에 힘주던 괴한이 외쳤다.

“이 새끼 힘 더럽게 세! 누가 좀 도와!”

게임으로 치면 카를이 맨몸인들 누구에게 밀릴 리 없었다. 비록 치유에 주력한다지만 그 역시 홀로 괴물들을 죽이고 다닌 영웅 중의 영웅이었으므로.

하지만 당장 그 괴력으로 괴한을 제압하고, 도끼를 빼낸 뒤 치유 주문으로 상처를 다스린 다음 침착하게 반격에 나서는 일 따위 일어날 수 없었다. 그는 이하종이었으니까. 평화로운 한국의 대학생. 양 주먹 움켜쥔 맞짱보다 격렬한 싸움 따윈 겪어본 적 없는.

“꽉 잡고 있어······”

도와서 카를을 죽이려는 듯 또 다른 괴한이 둘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조오오옹이이이이!”

롤랑은 스스로도 뭔 소리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지가 멧돼진 줄 아······”

그것을 가로막으려던 괴한 하나를 롤랑은 몸으로 들이받았다. 괴한은 저 멀리 나가떨어졌고 롤랑은 그대로 돌진해 카를과 실랑이 중인 괴한을 쳐 날렸다. 벽까지 날아가 충돌한 괴한은 땅을 구르더니 이내 입에서 피를 토하며 경련했다.

카를 앞을 가로막고 선 롤랑은 온몸이 굳은 채 이를 악물었다. 떨리는 그 눈에 카를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거품이 보였다.

머릿속에 생각난 무언가를 롤랑은 마구 외쳤다.

“치유 써! 치유!”

그러나 카를은 신음 하며 울먹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카를보다 낫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대응도 반항에 그쳤다. 반격이 아닌, 그저 최후를 늦추기 위한 반항. 롤랑은 공포에 질려 생각했다.

대체 저 괴한들은 뭔가? 왜 우리를 죽이려고?

뭘 어째야 하지?

싸워야······.

어떻게?

토렴이 전투 기술은 이미 체득된 것 같다느니 어쩌느니 했지만, 롤랑으로서는 기술인지 뭔지를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무기도 없었다.

괴한들은 희생양이 오래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 새끼도 몸 쓸데없이 좋은데?”

쇠몽둥이를 든 괴한 둘이 롤랑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괴한의 손에 들린 쇠뇌도 롤랑을 향했다.

어느 쪽이 먼저든 결과는 똑같으리라. 알 수 있었다.

무서워 미칠 것 같다. 정말, 정말 미칠 것 같다····.

‘미쳐?’

미친다는 것에서 어느 단어가 연상되었다. 롤랑은 문득 광전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광전사? 광폭화?

광폭화는 어떻게 하더라?

뭔가 기도문을 읊어야 했던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읊어보려 애썼다.

“이, 이 전쟁을······ 바친······”

기도를 더 연결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하얬다.

“이 병신 뭐라는 거야?”

앞에 다가온 괴한이 쇠몽둥이를 들어올렸다. 막 휘두르려던 차, 다른 괴한이 그 괴한을 뒤로 밀치며 경고했다.

“물러나, 병신아! 저 새끼가 쇠뇌 쏘려고 하잖아!”

그 말에 쇠몽둥이 든 괴한은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롤랑은 계속 우물거렸다.

“전쟁을······ 오딘을? 바친······”

팅 하고 줄 튕기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롤랑의 왼팔에 화살이 꽂혔다. 불이 붙은 듯, 타오르는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 온몸이 달아오르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롤랑이 외쳤다.

“이 전쟁을 오딘께 바친다!”

그리고 온 세상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눈이 절로 감겼다.

******

< 위층 복도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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