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환전(召喚殿) - [4]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연회음식들이 치워진 자리에 다시금 사제들이 나타났다.
“무례를 무릅쓰고 이야기를 청하건대······”
사제들은 멍하니 있는 영웅들에게 무용담을 물었고, 지금 이 시대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느냐 꼬드겼으며, 모처럼 지상에 내려왔는데 원하는 것은 없느냐 물었다.
그리고 합의한 대로 영웅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 한 마디도.
묵묵한 영웅들을 보며 사제들은 당혹스러워 했다.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계속 말을 걸어도 무시당했다. 사제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물론 계속해서 무시해야 하는 영웅들로서도 편하지는 않았다. 물론 롤랑 역시. 입 속의 혀가 고무로 느껴졌다. 조마조마한 가운데 자괴감마저 들었다.
정말 이게 옳은 선택이었나?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 상황을 호전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영웅이 아닌 웬 등신들이 불려왔다는 것을 들켜 우리 처우가 저쪽 마음대로 되어버리는 경우는 피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을 리 없지 않나?’
동영상의 내용이 무엇이었나? 강대한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세계수에 올라 놈들을 물리쳐 달라는 요구였다. 저들은 영웅들을 특정한 목적 하에 불러낸 것이다. 단순 받들어 모실 상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저녁을 먹고 난 뒤 대부분의 사제는 물러났다. 수도사들만 남아 영웅들에게 잘 곳을 안내해주었다.
영웅들에게 주어진 방은 실망스러웠다.
단순히 문명 수준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대우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재입대를 했나?”
대부분의 인원에게는 여럿이서 한 방을 쓰게 했는데, 큼지막한 방에 침대만 여럿 늘어선 꼴이 마치 군대 막사를 연상케 했다.
“영웅이니 뭐니 해도 병사보다 좀 나은 대우 해주면 되겠거니 싶은 모양이지?”
현대 기준으로도 훌륭한 특실이 독방으로 주어진 인원도 소수 존재했다. 메디아 직업 ‘소환 사제’라든가. 칭호가 ‘대제’나 ‘귀족’ 따위로 고귀하다든가.
명성치가 유달리 높았던 롤랑 역시 그런 특혜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롤랑에게는 유달리 넓고 볕 잘 드는 방이 주어졌다.
정작 그 방의 멋진 침대에는 일 분도 누워보지 못했지마는.
카를이 주장했던 것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다들 한 방에 모입시다.”
카를은 ‘대제’ 칭호를 달고 있던 덕분인지 특실 중의 특실을 받은 인원이었다. 고로 저것은 자기 특권을 자발적으로 내던지겠다는 발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칭송은 고사하고 이번에도 반발이 있었다.
“너 게이냐? 왜 기껏 있는 독실 버리고 사내새끼들끼리 다 같이 자겠대?”
제이슨이 따지자 카를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여럿이서 있어야 대처도 다 같이 할 수 있고, 특정 인원에 대한 차별대우를 거절함으로써 단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좆까, 마! 네가 뭔데 아까부터 입 닥치라, 방도 맘대로 쓰지 마라 결정하고 자빠졌어? 병신 새끼가 이 기회에 수령 노릇 해보겠다 이거지?”
“제가 나서는 게 싫으시다면 이번에도 모두의 의견을 들어볼까요?”
“북한에서 다수결의 원칙 배워왔냐? 왜 내 주거권을 투표에 부쳐야 되냐?”
제이슨은 그대로 팔짱 낀 채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설득 될 여지가 없어보였다.
롤랑으로서는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놈이라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에 뭉쳐있기 싫다니?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으나 아무도 각방을 쓰겠다는 제이슨의 뜻을 꺾지 못했다.
결국 제이슨은 무리에서 빠져나갔다.
위층으로 올라가고자 제이슨은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롤랑은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왜 공포영화에서 먼저 죽는 역을 자처하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나?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급작스럽고 비현실적이라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탓인가?’
그리하여 남은 사람들이 한 방에 모이게 되었다.
꽤 큰 방에 모였으나 서른 명 넘는 인원이서 있자니 비좁았다. 수면을 취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두 방으로 나뉘어야 할 터였다.
문득 카를이 한탄했다.
“제이슨이라 했던가요? 혼자 놀고 싶어하는 걸 보아하니 침묵 맹세 따윈 바로 어길 것 같던데 말입니다. 그 양반이 수도사 하나 붙들어다가 자기네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느니 돌려보내달라느니 나불나불 떠들어대지 말아야 할 텐데······.”
그 하소연에 유저 중 누군가가 대답했다.
“우리끼리라도 입단속 잘 해야죠.”
“우리들만 잘한다고 됩니까? 한 사람 실수하면 다 죽는 거예요.”
문득 롤랑이 물었다.
“침묵은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
카를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상황 파악이 될 때까지라니까?”
“그 상황 파악 말이야. 최대한 빨리 해야 할 거 같은데. 방금 우리끼리 어떤 기준으로 특실이 배정되었는지 분석해본 거 기억나지?”
“칭호, 명성, 직업.”
“그 기준에 맞는 인원은 열 명도 안 됐지. 그러니까 우리 대부분은 죄다 잘 싸우는 졸병 취급이란 건데······ 졸병 주제에 징병된 거 맘에 안 든다고 뻗대다간 감방 보내잖아? 중세인 여기서는 처형당할 테고. 그리 되기 전에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든가 교섭을 해야지 않을까?”
“저놈들이 뭘 바라는지 안다고 교섭을 해?”
“그것부터 알아봐야지. 아무튼 침묵시위는 오래 못 가는 거 알잖아.”
“알긴 알지. 근데 그거라도 안 하면 망할까봐 일단 입구멍에다 납땜이라도 시도한 거고.”
“입단속 못할까봐 걱정된다면 소수인원이라도 뽑아서 대화를 시도해 봐야해.”
카를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말했다.
“생각 좀 해보자.”
카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제 어찌 해야 할지 잘 궁리해보라 당부했다. 그러고는 이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정적이 깔린 채 시간이 흘렀다. 몇몇 사람은 오늘 갑작스레 생겨난 마법 능력을 시험해보거나 근육질 몸의 성능을 알아보려는지 팔굽혀펴기의 한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썩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대화조차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우울한 분위기였다.
답답한 시간이 흘러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같이 자기로 했지만 침대가 부족했다. 롤랑은 동료의 도움을 받아 자기 특실에서 침대를 들어다 큰방에 옮기기로 했다.
수도사들의 눈치를 보며 복도를 걷자니 문득 도움을 주기로 한 동료가 물어왔다.
“역시 이거 꿈이겠죠?”
너무나 멍청하면서도 전형적인 질문. 롤랑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꿈이라면 깨어나야 알겠죠 뭐.”
둘은 롤랑의 특실에 들어섰다. 방을 둘러본 동료는 혀를 찼다.
“여기 호텔방이야 뭐야······ 아저씨 롤랑이라고 했죠? 그 광전사죠? 트롤랑.”
롤랑은 쓰게 웃었다.
“예.”
“다른 광전사 한 명은 그냥 막사에 처박혔던데요. 아저씨는 대체 명성 몇인데 이런 방 받았어요?”
“사천 좀 넘을 걸요?”
“우와, 미쳤네. 그게 가능해요?”
“기사도 반복 퀘스트 죽어라 깨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덕분에 지금 장검 숙련 레벨 4예요. 그런데 사실 명성 때문에 특혜 받았는지 확실한 건 아니죠. 그냥 우리끼리 비교분석해봤을 뿐이니까······”
둘이서 막 침대를 들어 올린 그때였다. 때마침 침소를 정돈해주고자 수도사가 들어왔다.
롤랑은 입을 떡하니 벌린 수도사와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어쩌시려는 겁니까?”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묵묵히 침대를 문 밖으로 옮기자니 수도사가 방 한 구석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아, 잘못한 게 있다면 용서를 빌 테니 제발······”
애원하려는 수도사를 무시하고 침대를 옮기는 데 몰두했다. 세 명은 누울 법한 침대였지만 전혀 무겁지 않았다.
심정이야 어쨌건 몸만큼은 편히 큼지막한 침대를 옮겨놓았다.
새삼 게임 캐릭터의 몸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동시에 으스스해졌다.
메디아는 꽤 어려운 게임이었고 롤랑은 자주 죽었다. 비교적 쉬운 스토리 모드를 하다가도 급습을 당하거나 운이 나쁘면 죽었고, 강적을 만나면 두세 번의 죽음 끝에 공략 방법을 깨우쳐야만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최고 레벨 15에 이른 후에는 더욱 많이 죽었다. 최종 컨텐츠, 레이드에 도전하다 보면 수십 번의 죽음 정도는 시행착오로 여기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것이 꿈이나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더욱 어려울 것이요 더욱 쉽게 죽을 것이다.
게임의 모든 강적들은 아무리 어렵다 한들 격파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적들은 격파되어줄 생각이 없을 것이다.
역시 근육질에 마법까지 쓸 수 있는 게임 캐릭터라도 싸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저들은 싸움꾼이 필요해 우리를 여기에 불러냈고······’
우울하게 생각에 잠겨있자니 옆에서 이불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자기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니 롤랑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정말 군대 같군. 이제 이등병이 소등합니다, 하면서 불 끌 차례······ 아니, 모두 방금 징병된 참이니 다 신병인 셈이지. 그렇다면 소등은 조교가 선언하겠네? 닥치고 잠자지 않으면 다 뒈진다는 경고와 함께······’
그리 생각하니 정말 신병훈련소 같았다. 징병된 기분에 젖어 우울해지는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 이계에서의 첫날밤인가요? 으스스하네요.”
‘너 떠들다 조교 들어오면 단체기합이야, 인마.’
그리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롤랑이 물었다.
“왜요?”
“저 새끼들이 우리 자는 틈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요. 불침번 필요하지 않아요?”
“불침번? 없느니보단 낫겠죠. 하지만 시계가 없는데 불침번 교대는 어떻게?”
“주먹구구식으로 해야겠죠 뭐. 공평성은 각자의 양심에 맡기고······.”
모두들 그 의견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대강 잠자리 순서대로, 적당히 한 시간쯤 지났다 싶으면 다음 근무자를 깨우기로 합의한 뒤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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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환전(召喚殿)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