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환전(召喚殿) - [1] >
RPG 메디아의 친목 사이트, 메디안은 접속자 수 폭주로 다운된 지 오래였다.
사실 폭주라 해봤자 접속자 백 명을 넘길까 말까 할 것이다. 그런데도 다운된 것은 애초에 비인기 게임이요 그런 게임의 팬 사이트다 보니 서버가 가난한 탓일 뿐.
하지만 불평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사이트 운영자 또한 행복에 겨워하는 중이니까.
오늘은 메디아의 대규모 업데이트 날, 모두가 손꼽아 그리던 그날인 것이다.
사이트 회원이요 메디아 유저인 그들은 지금 채팅방을 열고 업데이트 종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업데이트가 거의 다 끝난 지금, 초읽기에 들어갔다.
6분, 5분 54초, 5분 53초, 5분 50초······.
[운영자카를] : 5분 남았습니다, 여러분!
그 아래로 주르륵 달리는 만세 합창.
5분이 지났을 때 가장 먼저 경사를 알린 것은 현성이었다.
[트롤랑] : 끝! 업뎃 종료!
현성은 얼른 채팅을 치고는 메디아의 업데이트를 다운받았다. 인디게임답게 용량이 작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감격에 겨워 메디아를 실행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웬 영상, 오프닝인가?
영상 속 배경은 신전이다.
신전 한 가운데에서 사제들이 마법의 원을 둘러싸고 있다.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을 보니 의식을 치르는 듯하다. 마법의 원 한 가운데에 쌓여있는 황금은 의식의 제물일까.
시뻘건 법복을 입은, 아마 지위 높을 남자가 입을 연다.
‘영웅들이여.’
채팅창은 이미 난리가 났다. 3D 영상이라니? 로키 진짜 복권 맞았나? 뭔 돈으로? 등등 놀라워하는 반응들.
‘거인의 아들이 풀려났습니다.’
남자의 대사와 함께 영상의 장면이 전환된다.
알록달록한 독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다.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깡마른 손이 뻗어 나와 독사의 목을 움켜쥔다. 어둠 속 누군가는 뱀을 움켜쥔 그대로 손에 힘을 준다.
목이 졸린 뱀은 독액과 내장조각을 내뿜으며 죽어버린다.
죽은 뱀을 쥔 채, 빼빼마른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그 눈에서 시퍼런 불이 피어오른다.
남자는 한동안 뱀을 노려보더니, 이내 축 늘어진 놈의 대가리를 물어뜯는다.
메디안은 모두 이 남자를 알고 있다.
로키.
[운영자카를] : 조물주님!
악명 높은 사기꾼 신은 비틀거리며 동굴을 빠져나간다.
쏟아지는 환한 햇살이 눈부시다. 로키는 눈을 찡그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서서히 손을 치우자 눈에 들어온, 자신을 향해 무릎 꿇고 있는 거대한 늑대와 망자(亡者)들.
로키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향해 웃어준다.
그리고 현성 역시.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런 정신 나간 영상이라니.
무슨 수로 대자본 게임 수준의 영상을 찍어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감탄만 나왔다. 블리자드라도 이 정도로 생생한 영상은 만들어내지 못할 것 같은데.
다시금 남자의 대사.
‘라그나뢰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서 장면이 전환된다.
‘이미르의 자식들이 복수하고자 진군해 오고 있습니······’
남자의 대사가 쿵, 쿵 육중한 발소리에 묻힌다.
그리고 모래폭풍과 같은 흙먼지 속에서 거인들의 군대가 드러난다.
우와, 씹할.
현성은 숨을 삼키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어마어마한 박력이요 현장감까지 대단했다. 거인들의 주름이며 힘줄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그때 모니터 속 거인 군대의 중심에서 시뻘건 무언가가 보였다. 그 역시 거인이라는 것이 이윽고 드러났다.
그 불꽃의 거인에게 화면이 스포트라이트 되었을 때 현성은 그만 감격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CG임이 분명할 텐데도 생생하기 그지없었고, 유치하지도 않았다!
한편 채팅창에서는 통곡과 현실부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맙소사 로키여, 하면서 개발자를 찬양하는 양반이며 인디게임 메디아에 이런 영상이 동원되다니 꿈이 분명한즉 부디 이 꿈이 깨지 않길 바란다는 사람까지.
현성 역시 마찬가지 심정으로 이어진 영상을 감상했다.
이 분 가량 영상이 더 흐른 후, 화면은 다시 예의 신전과 사제들을 비추었다. 처음에 나온 장면을 다시 보여주는 것을 보니 슬슬 영상이 끝날 모양이었다.
아쉬움을 느끼며 영상에 집중했다.
남자가 외친다.
‘당신의 후손들에게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옛날, 신명을 받들어 싸우던 영웅들이여. 미래에 발을 디디소서. 당신들이 죽이고 죽은 대지에 돌아오소서. 그리고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거인과 괴물들이 들끓는 저 세계수에······.’
신전 창문을 통해 거대한 나무의 실루엣이 번쩍인다.
화면이 다시 사제들과 그 중심의 마법의 원, 그리고 원 안에 쌓인 황금을 조명한다.
원이 빛나더니 허공에서 거대한 손이 나타난다. 손은 마법의 원 위에 쌓여있던 황금을 쓸어 담듯 움켜쥔다. 그 손에 솟은 핏대가 금 부스러기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이내 손이 흰빛으로 점멸한다. 손과 그 안의 황금 무더기는 점차 사라져간다.
손과 황금이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영상이 끝난다.
[운영자카를] : 확장팩 시대배경이 본편보다 한참 후인 모양이군요. 미래니 후손이니 하는 걸 보니.
[모야메떼] : 게임 본편 시대가 고대였으니까 그보다 미래라면 중세?
모니터에 스태프롤이 떠올랐다. 영상제작 로키, 프로듀스 로키, 음향담당 로키, 로키, 로키, 로키······.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이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게임 시작화면에 이르렀다.
미래의 부름에 응하겠습니까? 네/아니오
경고 : 고통스러운 시련이 부여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현성은 즉시 ‘네’ 하고 클릭했다.
그 순간, 화면이 희게 점멸했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 가득 어지럽게 배열된 룬 문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룬 문자들은 눈 따가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망막이 괴롭게 자극받았으나 현성은 눈 감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강제적으로 더욱 크게 눈을 떠 빛을 더욱 깊숙이 받아들여야 했다.
무력하게 빛을 받아들이길 한참, 마침내 현기증이 덮쳐왔다. 그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의식마저 저 너머로 가라앉았다.
******
“의식이 성공했습니다!”
******
난데없는 환호소리.
이어서 들려오는 욕설과 고함.
현성은 귀 울리는 소음에 못 이겨 눈을 떴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장면에 흠칫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게 뭐야?'
일순 환영을 보나 싶었다. 주변 배경과 등장인물의 꼬락서니를 보라.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다.
주변은 고대에나 세웠을 법한 신전이요, 벌거벗은 채 멍하니 서있는 이들은 모두 황인이 아니다. 금발, 적발을 휘날리는 서양인들만이 엉거주춤하게 서있다.
이 모든 풍경에서 현성은 짙은 비현실감을 느꼈다.
“씹할 지금 장난하냐고!”
저 말도 한국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소환은 뭐고 발할라는 또 뭐야 씹할! 이거 몰래카메라야 뭐야? 나 민간인이고 촬영 동의한 적 없거든? 개수작 작작 안 하냐 쌍것들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은 웬 금발 남자였다. 다른 벌거숭이들은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일부는 눈을 뜨지도 못하는 가운데 그 홀로 광분하고 있었다.
현성 또한 대부분의 벌거숭이들처럼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사람들을 훑어본 끝에 여기 모인 벌거숭이들 가운데서 공통점을 찾아냈다.
모두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단한 근육질이라는 것.
전부 운동선수인가 싶어 현성은 저절로 위축되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 자기 빈약한 몸을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제 몸이 빈약하지 않았다.
언덕 같은 흉근과 빨래판 같은 복근이라니. 헬스장에도 발 디딘 적 없는 몸인데.
현성이 기겁하는 차 문 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법복을 입은 자들. 이곳 신전과 연관 지어 생각하자면 사제들이 아닐까.
금발 벌거숭이는 계속해서 고함질렀다.
“씹할 옷은 또 왜 벗겨놨어! 당장 내 옷 안 가져와!”
그 남자에게 사제들이 급히 달려왔다. 그 앞에 당도하고는 공손히 말을 걸어왔다.
“진정하십시오, 영웅이시여. 의복은 물론 준비되어 있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사······”
사제들은 어느 꾸러미에서 웬 곱게 접힌 가운을 꺼내 건네주었다. 금발 남자는 그 옷을 받아들고 펴보더니 이내 버럭 소리질렀다.
“이거 내 옷 아니잖아!”
사제들은 당황하여 뭐라뭐라 사과하느라 여념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금발 남자는 이내 지쳤는지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 소환전(召喚殿)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