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화 (1/164)

< 집 - [서장] >

나는 광전사다.

물론 게임에서 말이다. 정확히는 RPG 메디아에서.

광견처럼 이성이 날아간 전사, 그것이 내 캐릭터 롤랑의 직업이다.

강력하지만, 썩 좋은 직업은 아니다.

최고 레벨이 15에 불과한 메디아의 주요 컨텐츠는 파티 플레이와 레이드다. 그러나 광전사는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광전사 특유의 트랜스 상태에 빠지면 플레이어의 통제를 반쯤 벗어나버리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파티 플레이에 수차례 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내 친구가 이 게임의 친목 사이트 운영자라는 것.

둘째는 이 게임은 사람이 워낙 적어 웬만하면 일단 파티에 끼우고 본다는 것.

내가 보기에는 후자가 진짜배기 이유인 것 같다. 물론 내 친구는 전자임을 주장하지마는.

예의 친구가 말했다.

[LV.15 대제 카를] : 업데이트 예고 봤지?

물론 봤다. 멀티클래스 가능, 레벨 제한 30으로 확장, 여러 지역 및 몬스터 업데이트, 방대한 신규 시나리오들. 그리고 극한미궁 세계수 개방까지. 이 모든 것이 그저 무료라고 했다.

[LV.15 광란의 롤랑] : 그래서? 좋아 죽겠음?

별 생각 없이 던진 대답이었는데, 잠시 후 당혹스러울 만큼 길쭉한 글이 채팅창에 떠올랐다.

[LV.15 대제 카를] : 좋긴 한데, 대체 무슨 돈으로?

[LV.15 대제 카를] : 다들 이 게임 스팀 세일로 오천 원쯤 내고 샀을 거 아냐. 서버 비용이나 겨우 충당할 그 수입으로 이런 패치를 해준대? 어떻게?

개발사 수입을 왜 유저가 걱정하느냐 물으려다 말았다. 스스로를 메디아 유저 대표쯤으로 여기는 녀석이니까. 자신에게 개발사의 운영 실태와 회사 수익 등을 속속들이 알 권리가 있다 여기고 있을 터였다.

나는 농담처럼 대꾸했다.

[LV.15 광란의 롤랑] : 개발자가 자칭 로키라잖아. 신이라서 돈은 필요 없나보지.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모험을 재개했다. 모험 장소는 무작위로 생성된 인스턴트 던전으로, 음산한 무덤이 테마였다.

습격해오는 망령과 식인귀들을 쓰러뜨리며 공동묘지 깊숙이 돌입, 마침내 보스를 만났다.

한 손에는 피 묻은 망태기, 다른 한 손에는 삽을 쥔 거구의 남자.

[LV.16 미친 묘지기 에치피] : Per Yer's Gr! Yer, Yer, Yer! Yeeeeeeeer!

대사에 떠오른 녀석의 정보를 보고서 나는 신음했다.

맙소사, 레벨 16이라.

강적 중의 강적이다. 격파하려면 수차례 죽어봐야 할지도 모른다.

별 다른 승리에 대한 기대 없이 롤랑을 돌격시켰다.

적 앞에 도달한 순간, 광폭화를 사용했다.

[LV.15 광란의 롤랑] : (기도) 이 전쟁을 오딘께 바치노라!

전용대사와 함께 롤랑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트랜스 상태. 롤랑은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놈의 대가리에 칼날을 내리찍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미쳐버린 롤랑이 날뛰고, 성기사 카를이 뒤에서 축복 주문이며 치유 주문을 걸기에 바쁜 가운데, 현실의 나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묘지기가 묘한 주문을 읊어 무덤에서 식인귀 다섯을 불러냈다. 놈들에게 둘러싸이면 나든 카를이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놈들을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이 상황에 롤랑은 시원스럽게도 내 기대를 배반했다.

[LV.15 광란의 롤랑] : (함성) 발할라를 위하여!

전투함성, 주변에 스턴을 가하는 기술. 그러나 보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후로도 어리석은 짓의 향연이었다. 카를에게 접근한 식인귀들을 처치하라고 서둘러 이동시켰더니 저 멀리 있는 묘지기에게 룬 마법을 사용하지 않나, 움켜쥔 성검은 어디 갔는지 주먹질을 시작하지 않나.

가끔씩 알맞게 사용한 기술은 강력한 피해를 입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이었고 나는 그저 라면을 먹기 바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통제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동뿐, 적 앞에 갖다놓은 광전사가 무얼 할지는 그 광기의 선택에 맡겨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패는 오로지 운과 카를의 실력에 달려있었다.

갑자기 김치가 먹고 싶어 부엌에 다녀왔다.

의자에 다시 앉는 순간, 때마침 묘지기의 모습이 바뀌고 있었다.

가뜩이나 거구였던 그 몸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르며 얼굴에서 털이, 입에서 뾰족한 송곳니가 자라났다. 늑대인간 변신이로군.

그리하여 전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야수가 된 놈의 공격은 더욱 강력해졌고 롤랑의 HP는 계속해서 너덜거렸다.

카를은 모든 여력을 롤랑의 치유에 전념해야 했으며, 나는 면을 다 먹은 바람에 국물을 들이켜야 했다.

일순 묘지기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LV.16 미친 묘지기 에치피] : Grrrrrrrrrr-!

그 어깨가 수축되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땅을 박찰 듯했다.

특수 기술의 전조, 분명 다음에 치명적인 일격이 가해질 터였다.

제대로 된 탱커라면 이때 방어 기술을 쓸 것이다. 하지만 탱커도, 제대로 된 캐릭터도 아닌 롤랑은 성검을 휘두르느라 정신없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날아온 놈의 강맹한 일격에 모든 HP가 사라졌다.

즉사였다.

이제 캐릭터 이동을 위한 마우스 클릭도 그만둬도 되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LV.15 대제 카를] : (기도) 발두르여!

시체가 빛에 휘감기더니, 이내 롤랑은 약간의 HP와 함께 일어섰다. 부활 주문. 일부 신의 성직자만이 하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이다.

카를은 서둘러 롤랑의 HP를 복구했고 싸움은 재개되었다.

마침내 라면이 빈 용기만 남았을 때, 모험은 끝났다.

[LV.16 미친 묘지기 에치피] : 추, 워.

그 거구가 고꾸라지고 대량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이미 최고 레벨이요 경험치 바도 꽉 찬 상태라 쓸모없었지마는.

카를이 시체에 다가가 전리품을 확인했다.

아이템 정보가 떠오르는 동시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황금사과(EPIC)

신성한 과일. 갈아먹든 익혀먹든 당신의 취향이겠지만, 되도록 날로 먹으라.

그래야 이둔의 손길을 더욱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니.

사용 시 모든 질병, 저주 해제

‘신성’+1

이 게임에 지긋지긋할 만치 오래 달라붙어 있던 나조차 처음 보는 귀물이었다.

친목 사이트에서 그 존재를 확인한 적이 있기는 했다. 이 아이템을 얻었다는 글이 올라온 순간, 사이트 내 모든 게시판이 난리가 났더랬지.

그럴 만도 하다. 영구적으로 능력치를 올려주는 아이템이라니. 특정 아이템 획득을 위한 소위 ‘노가다’를 리니지의 전유물쯤으로 취급하던 메디아 유저들이 이 과일 하나를 먹고자 밤을 지새우게 만든 물건인 것이다.

롤랑 역시 신성이 오르면 강해질 것이다. 특정 적들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는 것은 물론, 성검을 통한 공격 역시 강화되리라.

입으로 씹할, 씹할 거리자니 채팅창에 문장이 떠올랐다.

[LV.15 대제 카를] : 주사위 굴린다!

눈알만 굴리는 차, 카를이 전리품 획득 주사위를 굴렸다.

[SYSTEM] : '황금사과(EPIC)' 백면 주사위 굴림 : 카를(dice.8)

백면 주사위 눈이 겨우 8이라?

채팅창은 고요했지만 나는 화면 너머에서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로써 나는 9 이상의 주사위만 나오면 저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저 보물이 내 것이 될 확률은 92%에 달하는 것이다.

[LV.15 대제 카를] : 주사위 빨리 굴려주지 않을래?

채팅치고 심히 문어적인 저 말에서 나는 초조함을 읽었다. 하기야 녀석도 이 아이템을 얻고자 노가다를 뛴 치들 중 하나였던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SYSTEM] : 황금사과(EPIC) 롤랑 획득 포기

[SYSTEM] : 황금사과(EPIC) 카를 획득(dice.8)

녀석은 내게 왜 획득을 포기했느냐 물었고 나는 라면이나 먹은 놈이 따로 더 처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답했다.

아마 농담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지만, 어쨌건 녀석은 키읔을 잔뜩 치고, 고맙다 연신 말한 다음 스크린 샷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또 다시 채팅창에 키읔을 도배하고는 사이트에 이 경사를 알리겠노라며 접속을 종료했다.

나 역시 흐뭇하게 게임을 껐다.

앞으로 일주일 뒤, 업데이트가 이루어질 것이다. 최초 대규모 확장팩이라 불러야 할 업데이트가. 그리 되면 잠시 떠나갔던 유저들도 다시 돌아오리라. 정말이지 다들 괜찮은 치들이었다. 광전사인 나와도 싫은 내색 없이 파티를 맺어줄 정도니.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리운 치들과 재회하기 위해서라도.

< 집 - [서장]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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