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40화
“그래서 감독 자리에는 누가 좋겠습니까?”
만수르는 관리사에게 발을 맡기며 나른하게 물었다. 맨체스터 시티 인수 건으로 바빠서 제대로 쉴 시간이 없었더니 눕는 순간 눈이 감겼다.
“현재 쉬고 있는 감독들 그리고 최근까지 팀을 맡았던 감독들 위주로 명단을 짜 봤습니다. 일단은 당장 일자리가 없고, 데려오기 쉬운 감독들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피로가 상당한 탓에 일일이 대답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으로 재촉을 대신했다. 눈치 빠른 비서가 재빨리 보고를 이었다.
“먼저 파리스 생제르맹의 감독이었던 기 라콤과 묀헨글라트바흐의 전 감독 유프 하인케스, 얼마 전에 바이에른 뮌헨에서 잘린 펠릭스 마가트 감독 등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최근까지 성적이 어떤가요?”
만수르의 물음에 비서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계약하기 쉬운 감독이라는 건 당장 일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찾는 이들도 별로 없다는 걸 뜻했다. 즉, 지난 시즌, 명백히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며 경질된 감독들인 것이다.
“흐음. 내가 전에 말했던 맨시티의 성장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말은, 당장의 성과에 집중할 게 아니라 밑바닥부터 체질을 바꾸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설명했던 감독들로 그런 변화가 가능하겠습니까?”
만수르 당장의 성과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어떤 조직이든 마찬가지였지만,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특히나 맨체스터 시티처럼 역사가 오래된 곳일수록 변화는 더 힘겨웠다.
‘돈과 시간은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야. 진짜는 사람이다.’
그가 원하는 감독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실력, 장기적인 안목까지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거기에 독특한 축구 철학을 지닌 명장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계약이 남아있는 명장들을 억지로 끌어올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감독들을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최고의 대우를 해줄 생각인데, 최소한 실력은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곤조곤한 만수르의 질책에 비서가 머리를 조아렸다. 왕족으로 자란 탓에 항상 언행에 기품이 흐르는 만수르. 그러나 말이 곱다고 해서 편히 들을 수는 없었다. 말이 부드럽다고 해서 그의 행동까지 무른 건 아니었다.
“다음부턴 이런 자들은 소개도 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른 후보도 있다고 했죠? 계속해 보세요.”
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경질되었으면서 실력과 명성을 갖춘 감독으로는 레알 마드리드의 파비오 카펠로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스벤 에릭손이 있습니다. 또 입지가 흔들리는 감독으로는 첼시의 주제 무리뉴도 있죠.”
“무리뉴는 제외합시다. 팀을 빠르게 구성하려면 바로 데려올 수 있는 감독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에릭손이 가장 좋습니다. 최근에 잉글랜드 협회에서 국가대표 감독 자리에 카펠로를 앉히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에릭손이라…….”
스벤 에릭손을 입에 담은 만수르의 얼굴에는 불만이 섞여 있었다.
에릭손은 지금까지 보여준 성적만 놓고 본다면 실력은 있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저번에 위장 취재에 걸려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축구보다는 돈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렇기에 영입하기는 더 쉬울 것이다. 하나 이미 제 일을 내팽개쳤던 전적이 있던 사람이라 전적으로 믿고 맡기기에는 다소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그때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후보가 한 명 더 있긴 합니다. 그저 그런 뜨내기가 아니라 실력도 있고, 열정과 비전도 있는 감독이죠. 조건만 본다면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죠?”
“그…… 감독으로서 선수 영입에 전권을 갖길 원하고 있습니다.”
“전권이라, 어느 정도를 원한다는 말입니까?”
“말 그대로 전권입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처럼 감독에게 거의 모든 권한이 집중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흠. 실력만 있다면 아무 문제없죠. 알렉스 퍼거슨처럼만 해준다면 계약을 몇 번이고 갱신할 테니까요. 그것보다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굽니까?”
“그 사람은…….”
마지막 후보의 이름을 확인한 만수르는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 * *
파주 NFC에서 한창 훈련 중인 국가대표팀 선수들. 그중 두 사람이 마주 서서 공을 주고받고 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오솔과 우주원이었다.
“야, 솔아. 너희 팀 감독, 정해졌다고 하더라.”
“응, 에이전트한테 들었어.”
“나는 몰랐는데 꽤 대단한 사람이더라? 감독이 된 지 3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까지 올라갔었다며?”
그게 2003-04 시즌에 있었던 일이니, 벌써 3년 전 일이었다.
“이름이 뭐라더라? 프랑스 사람이라고 했는데.”
“디디에 데샹. 선수 시절에는 더 대단했던 사람이지.”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그랬다. 이번에 맨체스터 시티를 새롭게 맡게 될 감독은 지난 시즌 세리에 B로 떨어졌던 유벤투스를 다시 승격시킨 디디에 데샹이었다.
데샹은 선수 시절, 90년대 프랑스 국가대표의 허리라인을 책임졌던 이로 주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는데,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나 브라질의 히바우두 같은 플레이 메이커를 철저하게 막아내면서 프랑스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스타플레이어로서 선수 생활을 마친 데샹은 은퇴한 직후, 서른세 살의 나이에 바로 AS 모나코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약 3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거두게 된다. 참고로 이때 우승팀은 주제 무리뉴의 FC 포르투였다.
당시 사람들은 마흔 살의 젊은 감독, 주제 무리뉴의 성공 스토리에 집중했으나, 사실 준우승을 이룬 디디에 데샹이 무리뉴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더 어렸다.
실제로 감독 경력이 7년 차에 접어든 지금도 데샹은 아직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였다.
‘그래도 실력만은 확실하겠지. 나중에는 프랑스 국가대표 감독으로 우승까지 경험한 사람이니까.’
오솔은 2018년 월드컵까지 이어진 생각의 꼬리는 이내 손윤민에게 뻗어갔다. 후반전 추가시간에 50m를 단 5초 만에 주파한 손윤민. 그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손정운 감독이 있었다.
“유스팀에 소개만 해준다면 다른 지원은 바라지도 않겠네. 잘 좀 부탁하네.”
손정운 감독은 오솔에게 빚을 지는 걸 미안했는지 다리만 놓아주면 나머지는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다. 염치를 아는 분이었다.
그에 오솔은 전에 약속했던 대로 집을 빌려주고, 추가적으로 유스팀 훈련비까지만 감당해주기로 했다. 식비와 기타 생활비만 해결한다면 충분히 축구를 할 수 있게 말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선진 축구를 경험하는 게 중요해. 특히 저 나이 대에는 그 차이가 결코 적지 않을 거야.’
오솔은 이것을 하나의 투자로 이해했다. 장래에 대표팀에서 함께 발을 맞출 선수를 지원하는 일이자, 1억 유로(약 1천 3백억 원)의 몸값을 자랑하게 될 선수에게 작은 빚을 지게 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아들의 미래를 위해 독일까지 따라간다니, 정말 대단한 부성애야. 후후. 나도 나중에 대한이나 주희의 꿈을 위해 그렇게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히 아이들의 꿈을 응원해줄 여건이 되었다. 회귀해서 하나 뿌듯한 게 있다면 이처럼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게 한참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우주원이 데샹의 이력을 확인하고 감탄사를 토해냈다.
“이야! 너 맨시티에 가서는 허리 좀 펴고 살겠다. 함부르크에서는 뛰는 거 볼 때마다 답답했는데, 이제야 제대로 된 감독을 만났네.”
“그게 보였어?”
“누군들 모르겠냐. 나는 솔직히 네가 그 와중에 꾸역꾸역 골을 넣는 걸 보고 감탄했다.”
“네 말대로 돌 감독님은 좀 답답한 면이 있었지. 지나치게 안정지향적인 분이셨어.”
“그런데 어떻게 하냐. 여기 와서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데.”
우주원은 턱짓으로 벤치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전술판을 보며 고심하는 베어벡 감독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오솔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핌 베어벡 감독의 전술은 아드보가트 감독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이나 놓는 수비적인 형태의 4-3-3이 바로 그것이었다.
4-3-3은 좌우 윙어들을 활용한 측면 돌파와 크로스가 주된 공격 루트인 만큼 오솔의 제공권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으나, 아쉽게도 중앙에 침투하는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했다.
실제 훈련을 해본 결과 중앙에 공격수가 너무 없었다. 많아봐야 오솔과 반대편 윙어, 중앙 미드필더까지 셋이 전부였다.
심한 경우에는 적진 깊숙한 곳에 오솔 혼자 덩그러니 놓인 경우도 있었다.
‘또 고립되는 걸까?’
사실 베어벡 감독도 많이 곤란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해외파 선수들의 부상이 겹치면서 베스트 11을 가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쉬운 것은 박해진이나 안태환, 이은령 등 중앙에서 감각적인 패스를 뿌려줄 선수가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중앙에서 공격을 풀어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렇다고 내가 내려가자니 윙어들의 득점력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월드컵 때보다 더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솔은 애써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가 감독도 아니고 전술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지. 토너먼트에서는 누가 뭐래도 수비를 단단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래도 약팀 상대로 써먹을 수 있게 4-4-2도 연습하고 있잖아.”
투톱일 때 호흡을 맞추는 공격수는 이국동 혹은 조형진이었는데, 지금까지는 조형진 쪽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국동이 프리미어리그 적응에 실패하면서 폼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다.
우주원은 이국동이 있는 쪽을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솔직히 계속 4-4-2로 나갔으면 좋겠어. 상대가 유럽이나 남미의 강팀도 아니고 아시아 팀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수비적으로 나가야 하나 싶거든.”
오솔도 우주원의 말에 동의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팀이다. 일본이나 우즈베키스탄, 이란 같은 팀들을 제외하면 딱히 무서운 상대도 없었다.
앞서 말한 팀들도 실력이 비등비등하거나 우리나라가 미세하게 앞섰고 얼마든지 공격적으로 나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됐어. 감독의 성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쨌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오솔은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러나 그게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건 아시안컵 조별 리그 두 경기 만에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2 : 1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전 쾌조의 승리! 오솔의 멈출 수 없는 득점 본능!]
[대한민국 3 : 2 바레인]
[두 경기 연속 득점으로 바레인전 3대 2 승리를 견인한 오솔! 이것이 무회전 프리킥이다.]
오솔은 앞선 두 경기에서 총 세 골을 넣었다. 결과만 본다면 오솔의 하드 캐리로 손쉬운 승리를 따냈다고 생각하기 쉬웠으나, 실제 경기 내용은 전혀 달랐다.
첫 경기에서는 수비적인 4-3-3을 운용하느라 정말 지독하리만치 기회가 안 찾아왔었고, 바레인과의 경기에서는 공격적인 4-4-2 운영으로 나섰다가 2골이나 실점하고 말았다. 만약 오솔의 원맨쇼가 아니었다면 바레인전도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두 경기에서 오솔의 기록은 유효슈팅 수가 곧 득점수일 정도로 순도 높은 공격력을 보였으나 그럼에도 고작 세 골밖에 못 넣을 정도로 찬스가 적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오솔은 전방에 홀로 서 있어야 했고, 연계를 위해 측면이나 중원으로 이동했다간 중앙에서 골을 넣어줄 선수가 없어서 매번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야 했다.
수비를 선택하면 공격이 무너지고, 공격을 선택하면 수비가 먼저 무너지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선수들의 안이한 태도야.’
오솔은 한쪽에 퍼질러 앉아있는 선배들을 쏘아봤다.
해외파가 대거 빠지면서 현재 선수단 구성은 k리그에서 떠오르는 신진 선수들과 일부 고참 선수들로 이루어진 상태였다.
문제는 이 일부 고참 선수들에게 있었다. 오솔이 형편없는 경기력에서 불구하고 꾸역꾸역 이겨놨더니, 이놈들이 미쳤는지 2경기가 끝난 다음날 숙소를 무단이탈해 술집에 갔다 온 것이다.
‘내가 많이 해봐서 아는데 저건 백퍼 밤새도록 논 거야.’
이런 쪽으로는 오솔이 전문가였다. 아니, 굳이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붉게 충혈된 눈과 알코올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입을 보면 이들이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팀의 분위기와 기강을 잡아야 할 선수들이 먼저 나태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젊은 선수들이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젠장! 이번 대회에서는 무조건 우승해야 하는데.’
아시안컵은 국내에서야 병역 혜택이 없어서 중요성이 낮아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시아에서 월드컵 다음으로 큰 축구 대회였다. 그래선지 들어오는 경험치가 제법 쏠쏠했다. 우승까지 이룬다면 최소한 2~3 레벨은 오를 것 같았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해.’
이렇게 동남아 관광이라도 온 듯한 분위기로는 가망이 없었다. 이것보다는 차라리 살얼음판을 걷는 듯 치열한 분위기가 더 나을 것이다.
‘오랜만에 사고 한번 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