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39화 (139/213)

 # 139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39화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솔아.”

오솔은 차태민의 소개에 맞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차호진이 보였다. 그가 방금까지 앉아있던 책상에는 서류가 가득했다. 이제는 전 축구 선수라는 호칭보다는 교육자 혹은 사업가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오솔 선수, 어서 와요.”

“오솔이라고 합니다, 감독님.”

“내 알지. 분데스리가는 이놈 때문에 지금도 자주 챙겨보고 있거든.”

차호진의 말에 차태민이 어색하게 웃는다. 아버지의 사랑에 즐거우면서도 그 명성을 잇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한참 후배입니다.”

“맞아요, 아버지. 솔이는 저랑 형, 동생 하는 사이인데 아버지가 그렇게 대하시면 저희가 곤란해요.”

“그래도 오늘 처음 봤는데 그게 쉽게 되나.”

차호진 감독은 계속되는 재촉에도 말을 쉽게 낮추지 못하다가, 밖에서 차가 들어올 때쯤 되어서야 말을 편히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긴 웬일이냐? 오기 전에 말이라도 했으면 내가 괜찮은데서 밥이라도 사줬을 텐데.”

“에이, 아버지. 이제는 저보다 얘가 더 잘 벌어요.”

“아무리 그래도 선배가 돼서 후배에게 얻어먹는 거 아니다. 가만 보자 요즘 제철 음식이 뭐가 있지?”

오솔은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샐 것 같자 급히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독일에 있을 때부터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

“그래? 그래도…….”

“사실 일부러 이곳에 와봤습니다. 축구 교실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궁금했거든요.”

“축구 교실이 궁금해서? 혹시…… 유소년 축구에 관심이 있는 거니?”

오솔이 아카데미에 관심을 보이자 차호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의 일생의 꿈이 독일 못지않은 선진 유소년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은퇴를 하자마자 사비를 털어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축구 교실까지 만든 것 아닌가.

‘맨땅에 헤딩한 지 어언 17년. 이제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지…….’

선수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에서 1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초기에 자리를 잡는 시간을 제외하면 지금이 딱 차호진의 아이들이 자랄 시간인 것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그의 축구 교실을 나와 프로에 입단하는 선수들이 하나둘 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를 놓고 봤을 땐 여전히 미약한 수준에 불과해.’

아무리 차호진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이 넓은 땅과 많은 아이들을 다 감당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겠으나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자금.

즉, 돈이었다.

비록 그가 독일에서 뛰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FIFA로부터 매년 상당한 초상권 수입을 얻어왔으나 시간이 갈수록 수입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작년부터 서울시가 임대료를 큰 폭으로 올리면서 재정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제는 축구 교실을 늘리기는커녕 지금 있는 곳조차 유지하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만약 임대료가 이대로 계속 상승한다면 몇 년 안에 문을 닫을지도 몰라.’

그가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유소년 축구 교실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혼자서는 이 이상 나아가기 힘드니, 함께해줄 동료를 필요로 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뜻에 동조하는 후배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기반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선수들은 각지에 축구 교실을 열어서 축구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가만, 솔이가 이번에 EPL 최고 대우를 받으며 이적했다고 했지?’

오솔의 맨시티행은 워낙에 파격적이어서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었다. 당연히 차호진도 관련 소식을 접했었다.

‘지금부터 이야기를 좀 해놔야겠어. 아직은 은퇴 후 계획이 없겠지만, 미리부터 설득을 해야 돈을 흥청망청 낭비하지 않을 것 아니야.’

차호진 감독이 오솔을 만나려고 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돈이 생겼다고 아무렇게나 쓰거나 잘못된 길을 걷지 않도록 선배로서 길잡이가 되어주려는 것이다.

한편 오솔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편히 대답했다.

“아뇨, 딱히 유소년에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저 나름대로 구상하는 게 있어서 실제로 한번 보려고 했던 거죠.”

“축구 교실을 살펴보면서 유소년 육성에 관심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아, 혹시 풋살 클럽이나 생활 축구 쪽을 생각하고 있는 거니?”

“비슷하긴 한데, 그보다는 조금 더 전문적인 측면이 있죠.”

오솔은 조심스럽게 황태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3부 리그 선수들의 처우와 환경, 꿈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자 차호진 감독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차태민은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3부 리그 선수들을 위한 아카데미 건립이라니, 이건 도저히 막 스무 살에 접어든 아이가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스무 살 때 뭘 했더라?’

그때 한창 대학에 다니며 앞날에 대해 고민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팀에 가야 할지 찾아보고 2년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 멤버로 뽑히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던 시기.

그 시간을 결코 허투루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솔직히 남을 위해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니, 만약 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거창한 계획은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난놈은 난놈이구나.’

차태민이 감탄하는 사이 차호진이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음…… 3부 리그라. 그것도 중요한 문제지. 재능이 있으나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를 발굴한다니, 정말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시간이 있을까? 너도 알다시피 3부 리그도 엄연히 정해진 일정에 따라 경기가 진행되는 리그야. 그 말은 곧 시즌이 끝나는 겨울을 제외하면 딱히 선수들을 모집할 시간이 없다는 얘기지.”

그 부분은 오솔도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었다. 그가 구단주가 된다면 모를까 단순히 아카데미만 운영한다면 시즌이 지속되는 8달 정도는 아카데미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선수들만 문제인 건 아니야. 그 기간 동안 스태프와 직원들은 어찌할 셈이야? 선수가 없다고 그들을 자를 수도 없잖아?”

차호진 감독은 오솔이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부드럽게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뭐, 이걸 해결하는 건 간단한 일이야. 시즌 중에는 다른 일을 하면 되는 거지. 이를테면 유소년 축구 교실 같은…… 그러다가 비시즌 기간이 오면 이벤트 형식으로 3부 리그 선수들을 대상으로 캠프를 운용하는 거야.”

차호진 감독은 오솔이 어느 정도 넘어갔다고 생각했는지 본격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유소년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역시 재미야, 재미. 아무래도 아이들이 대상이니까 축구를 하는 게 즐거워야 해. 흥미를 느껴야 더 열심히 몰입하고 자연히 실력이 상승하게 되지. 혹여 프로의 꿈을 접는다고 하더라도, 그때 정말 재밌게 축구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게 해줘야 해. 말하자면 추억을 선물하는 거지.”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노크를 생략할 정도로 차호진 감독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정도로 급한 용무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저 사람은?’

오솔은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들어온 남자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었는데, 얼굴이 새카맣게 탄 것이 바깥일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성큼성큼 들어와 비어있는 자리를 냅다 차지하며 말했다.

“선배님 제가 매번 말하지 않았습니까, 유소년 축구는 기본기를 익히는 게 제일 목적이라고. ‘즐기는 축구’는 성적이나 승패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지, 그저 웃으면서 훈련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진짜로 원하는 건 즐거운 추억이 아니라 프로 레벨에 올라가는 것이고, 그러려면 조금은 혹독하더라도 기본기를 숙달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돌려 오솔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솔은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다. 말투 못지않게 손도 거칠었다.

“불쑥 들어와서 미안합니다. 밖에서 기다리는데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서 이렇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래, 손님이 있는데 무례하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래서 지금 사과하잖아요.”

“이 자식이…… 이거 미안하네. 이 녀석이 좀 직선적인 성격이라 그러니 이해하게.”

남자가 불퉁하게 대답하자 차호진이 한 번 더 사과했다.

오솔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혹시 성함이…….”

“이런,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손정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선배님.”

오솔은 대답을 하면서 힐끗 방 밖을 내다봤다. 과연 장난기 어린 표정의 중학생 꼬마가 축구공을 안고 서 있었다.

‘저 아이는…… 손윤민!’

오솔이 전생에 떠난-사실은 쫓겨난-대한민국 대표팀의 차세대 에이스가 바로 저 꼬마, 손윤민이었다.

오솔은 뜻밖의 만남에 흥미를 느꼈다.

‘저 녀석이 함부르크에 입단한 게 언제였지?’

손윤민이 처음으로 함부르크에 간 건 2008년 7월 29일로, 이때 그는 축구협회의 해외 유학 프로젝트에 뽑혀서 독일 땅을 밟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년 후의 일이었다.

‘도와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딱히 미담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 자랄 테니 문제가 될 것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나 손윤민의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가 조금만 더 일찍 유학을 떠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한 마음이 있었다.

‘어차피 대표팀에서 자리 잡는 건 박해진 선배가 은퇴한 다음이겠지만…….’

오솔은 문득 박해진이 빠졌던 2014년 월드컵이 떠올랐다.

‘그때 별 것도 아닌 놈에게 밀려서 두 경기밖에 못 나갔었지.’

당시 오솔은 압도적인 실력에도 불구하고 성지훈과의 주전 경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그의 성격이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감독이었던 홍명문의 후배 사랑이 ‘의리의리’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나마 호흡이 맞았던 게 저 녀석이었지.’

손윤민은 타고난 재능에 탄탄한 기본기까지 뒷받침해주는 아주 좋은 선수였다. 이런 표현은 좀 진부하지만 차세대 한국 축구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다.

‘좋아. 일단 말이라도 한번 꺼내보자.’

오솔은 조금 멀리까지 내다보기로 했다.

* * *

“윤민아, 이리 와봐라.”

아버지의 손짓에 손윤민이 쪼르르 달려온다. 녀석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귀여웠는지 차호진 감독이 지갑을 꺼냈다.

손정운 감독은 아들이 용돈을 받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윤민아, 어떠냐. 독일에 가고 싶으냐?”

“네, 가고 싶어요.”

“지금 가면 고교 입학이 1년 늦춰질 수도 있어.”

“그래도…… 포기하기 싫어요.”

“그래, 알았다.”

손정운 감독은 오솔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부르크와 연결을 해준다고 했지. 유스팀에 추천해 주겠다고…….’

오솔은 그가 전까지 기거했던 집을 내주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계약이 남았으니 부담 없이 쓰라는 말과 함께. 게다가 유소년 훈련비용도 도와주기로 했다.

‘겨우 공 몇 번 주고받은 것만으로 이 녀석의 실력을 어떻게 안다고, 1년이나 도와준다는 거지?’

물론 오솔은 손윤민의 장점을 차분히 설명했다. 능숙한 양발 사용과 볼터치나 드리블 같은 기본기의 탄탄함 등이 그것이었다.

오솔은 아들의 장점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짚어냈다. 손윤민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코치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 정도로 정확하게 말이다.

“참 대단한 녀석이야. 그렇지 않나?”

차호진의 말이었다. 손정운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흐뭇하게 웃다가 갑자기 눈썹을 좁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봤을 때 그가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후배의 습관을 알고 있던 차호진이 급히 물었다.

“왜 그러나?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요. 갑자기 너무 아쉬워서 그럽니다.”

“아쉽다고? 뭐가?”

“오솔 말입니다. 선배님도 오솔이 축구를 고등학교에 진학해서야 시작했다는 이야기 아시죠?”

“그랬지.”

“그럼 올해로 5년 차라는 소린데, 기본기를 익히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음. 확실히 신체 능력이나 축구 지능에 비해 드리블 같은 건 조금 부족하지.”

“후우. 오솔은 겨우 고교 3년 훈련한 것으로 정상급 실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재능이죠. 젠장,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공을 갖고 전진하는 능력만 갖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유소년 축구를 늘려야 하는 거야. 많이 발전한 것 같아도 아직 60, 70년대처럼 기회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거든.”

차 감독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오솔을 보면 볼수록 그의 젊은 시절을 빼다 박았다. 그도 어릴 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분데스리가에 가서 기본기를 다시 익혔다.

나이를 먹고 기본기를 다시 익힌다는 게 얼마나 고생스러운 것인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모를 것이다.

그렇게 두 축구인이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다. 오솔은 집에 돌아와 상태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오솔(Lv 61. 오른발잡이, 왼발 숙련도 55%)

-잔여 포인트 : 6

“좋았어. 챔스 득점왕에 뽑힌 덕분에 레벨이 하나 더 올랐구나. 그럼, 슬슬 드리블을 올려볼까?”

-드리블 72…… 78!

“흐흐흐. 이번 기회에 아시아 팀들을 상대로 드리블 연습 좀 해야겠네.”

오솔은 아시안컵 우승으로 얻을 경험치를 생각하며 어깨춤을 췄다. 선배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기본기를 올릴 만반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