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28화 (128/150)

128화: 이제 곧

“뭔가, 아쉽다-”

종이를 들여다보던 백성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들고 있는 종이의 상단에는 2021년 검도 대회 계획표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당장 내일이면 개최되는 춘계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 대회를 포함하여, 2021년에 예정된 검도 대회 일정들이 적힌 명단이었다.

“뭐가?”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백지호가 물었다.

한참 동안 계획표를 들여다보더니, 뜬금없이 저런 소리를 하니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백성호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3학년이라는 게.”

“···형이 3학년인 게 왜 아쉬워.”

“올해가 지나면, 졸업해야 하잖아. 그럼, 내년에는 전국 대회랑, 회장기 전부 다- 못 나갈 테니까. 그게 너무 아쉽네.”

대답을 들은 백지호의 입가에 실소가 걸렸다.

그는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빨리 졸업하고 실업 검도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던 형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졸업하는 게 아쉽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로서는 우스울 수밖에.

‘뭐, 이유야 뻔하지.’

작년 이맘때와 지금 다른 건 딱 하나뿐이니.

그로 인해서 한국 고교 검도계는 물론, 전 세계 검도계가 술렁였던 걸 생각하면 하나라고 해서 무시할 만한 게 아니지만 말이다.

심지어 형인 백성호뿐만 아니라 백지호 자신도 영향을 받아 크게 바뀌지 않았던가.

“이성현은 내년에도 고등학생이니까.”

“······나랑 같은 나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성현.

작년부터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괴물.

백씨 형제는 그들이 마주했던 괴물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는 백성호에게 있어서 난생처음으로 마주한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으며, 완벽한 ‘길’이었다.

그리고 백지호에게는 도전을 각오하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확 유급해버릴까.”

“진심이야?”

“반쯤은.”

“형이 그러면 엄마가 참 좋아하겠다. 그치?”

“······.”

“그리고 아마 유급하면 대회 출전 못 할 걸. 그럼 의미 없는 거 아냐?”

“으음-”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백성호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나저러나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동생의 말마따나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면 유급할 이유 또한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다 돌연 그의 시선이 닿은 건 동생, 백지호의 얼굴이었다.

자신과 꽤 닮은 얼굴.

······내년쯤 되면 ‘백성호’라고 해도 믿지 않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돼.”

“내가 뭘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형이 그 표정일 때는 늘 터무니없는 이야기만 하더라고.”

“-쳇.”

혀를 찬 백성호가 소파에 파묻히듯 등을 기댔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 대신 대회를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결국, 그에게 허용된 시간은 올해뿐인 것이다.

다음 해에는 꼼짝없이 졸업해서 이성현이라는 자극이 존재하지 않는 실업 검도계─혹은 대학 검도계─로 나아가야 할 테고, 이성현이 오기까지 일 년의 시간을 버텨야 하리라.

‘끔찍하네.’

아예 몰랐었다면 모를까.

미래로 곧게 이어진 ‘길’을 눈앞에서 보여주고 빼앗아가다니, 이 얼마나 잔혹한 처사란 말인가.

백성호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올해 대회에, 모든 걸 거는 수밖에.”

“새삼스럽게?”

“시끄러워.”

“매번 전력을 다한 거 아니었어?”

“더, 그보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거지.”

그렇게 백씨 형제가 아옹다옹할 무렵.

똑같은 주제로 대화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용암고의 주장, 김규호와 선봉을 맡기로 한 강찬울이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김규호가 담담하게, 아니 최대한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내가 이성현을 이길 확률은 거의 없어. 십중팔구는 지겠지.”

성현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아득한 격차.

감히 넘어서는 게 불가능한 실력의 차이!

김규호는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것을 인정했다.

사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벌써 몇 번이나 성현에게 도전했고, 그때마다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으니까.

당장 저번 대회에서도 그랬을 뿐만 아니라, 이번 승룡기 검도 대회 때도 대상단세를 익혀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고 말았잖은가.

그런데도 이길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멍청한 행동에 불과하였으니.

“주장 순서를 제외하고 4승을 거둬야 광천고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해.”

김규호가 진다 해서 용암고가 지는 건 아니다.

애초에 단체전은 일곱 번의 경기 중에서 네 번을 먼저 이기는 쪽이 승리를 거머쥐는 방식이니까.

그렇기에 용암고에도 광천고를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고 말이다.

‘내가 지더라도 용암고는 이겨야 해.’

“그래서 네가 중요하다, 찬울아.”

“네, 주장.”

강찬울이 결의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그의 반응에 만족스럽게 웃은 김규호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승룡기 검도 대회 출전 명단을 기반으로 예측한 이번 전국 대회에서 광천고의 출전 순서야.”

선봉 김수민, 2위 김은우, 3위 이서준, 중견 최영준, 5위 손대현, 부장 조윤호, 주장 이성현.

작년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느낌이 물씬 피어나는 명단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정철의 이름이 빠졌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작년 추계 전국 대회의 광천고는 출전 선수 명단만 봐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강팀이었으니까.

빈틈이 없다고 할까.

그나마 약점으로 지적받던 2학년들도 환골탈태라도 한 것처럼 강해져서 돌아왔었으니···.

“잇는 순서가 약간 바뀔 수도 있겠지만, 선봉-중견-주장은 바뀌지 않을 거야. 분명히.”

-‘이성현이 먼저 나설 수도 있는 거 아냐?’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 광천고의 출전 명단은 그런 식으로 구성하는 게 이상적이기는 했다.

성현이 선봉을 잡고 1승을 올려주는 것 말이다.

하지만 김규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이성현이라면, 그리고 광천고 주전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승리를 추구하지 않으리란 것을.

왕좌에 올랐을 때 그리 선언하였으니까.

더불어 추계 전국 대회에서도, 승룡기 검도 대회에서도 그 선언을 증명하였고.

“찬울이 너한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야. 선봉에서 김수민과 싸우든가, 아니면 중견에서 최영준과 붙는 거지.”

“김수민, 최영준···.”

“감독님께서는 네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주신다고 하셨어. 어떻게 할래?”

김규호의 질문에 강찬울은 깊게 고민했다.

선봉과 중견, 어디를 선택해야 하는가.

어느 쪽을 상대하든 쉽지 않을 건 분명했다.

승룡기 검도 대회를 제외하면 아무런 정보도 없는 김수민, 그리고 몇 번 맞붙어서 이기고 지고를 반복했던 최영준.

두 명 모두 부정할 수 없는 강자였으니 말이다.

“저는···.”

긴 고민을 거친 끝에, 강찬울이 자신의 상대로 택한 건─

“선봉으로 나가겠습니다.”

─광천고의 선봉, 김수민이었다.

“선봉으로···?”

“네, 선봉으로.”

김규호는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강찬울이라면 최영준과 시합하는 걸 선택하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국가 교류전 때부터 라이벌 관계가 되었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맞붙어 왔었으니까.

그런 그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강찬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장도 내년에는 졸업이잖아요.”

“그래.”

“그럼 내년에 성현이 상대는 저겠죠?”

“음, 주장 자리를 너한테 줄 생각이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 그래서 김수민을 택한 거구나.”

현재 김수민은 승룡기 검도 대회 때의 활약으로 ‘하위호환 이성현’이라 불리고 있는 상태였다.

상단세라는 보기 드문 겨눔세에 성현과 같은 학교의 검도부 소속이며, 직접 배웠다고 인터뷰까지 했다는 점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물론 진짜에 비교하면 태양과 촛불만큼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여하튼.

수준 차이가 심하기는 해도 성현을 상대하는 연습 상대로 보면, 김수민보다 더 좋은 상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찬울이 선봉을 고른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성현 하위호환’이라 불리는 김수민과 지금부터 붙어보면서, 훗날 진짜 이성현과 맞상대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올해 상반기부터는 제가 주장 순서에서 상대하게 될 테니까 지금부터 대비를 해둬야죠.”

강찬울의 속내를 들은 김규호는 흡족하게 웃었다.

미래를 착실하게 대비하고 있는 모습이 퍽 기꺼웠던 까닭이다.

‘차기 주장이라면 이래야지.’

일반부원이라면 당장 내가 만날 상대를 이길 생각만 해도 된다.

하지만 주장은 더 많은 걸 봐야 했다.

자신의 시합만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검도부’의 시합을 준비해야 하므로.

김규호는 강찬울이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용암고의 주전 자리를 물려받을 준비가.

“좋아, 선봉. 내가 감독님께···. 아니다. 이번에는 찬울이 너도 같이 가자.”

“네, 주장!”

김규호의 제안에 강찬울은 기쁜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전 명단을 짜는 건 대저 주장과 감독의 일.

그곳에 함께 가자는 건, 차기 주장으로 해야 할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뜻이기에.

“지금 바로 갈까?”

“네, 주장!”

*

“제대로 해보자고-”

“광천고를 꺾으려면 춘계 전국 대회가 기회야!”

“빅4의 저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

“훈련, 또 훈련이다. 자, 가자!”

경중고의 백씨 형제.

용암고의 김규호 · 강찬울.

그리고 다른 고등학교의 학생 선수들까지.

춘계 전국 대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들의 의욕은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건 오직 하나였다.

광천고가 차지한 왕좌.

‘전국 대회의 깃발’.

많고 많은 고등학교 중에서 단 하나의 고등학교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그것.

최강으로만 보였던 광천고가 3학년이 떠나고 약해진 지금이야말로 그 찬란히 빛나는 왕좌를 빼앗을 절호의 기회였으니···.

······물론, 광천고 주전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놀면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이성현 하위호환’이라는 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수민,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으려는 영준, 대현, 윤호, 그리고 슬슬 광천고 검도부에 정을 붙이고 있는 서준과 은우.

그들 모두 더 강해지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다.

승룡기 검도 대회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직 피땀 어린 노력만이 답이 될 수 있기에.

“······다들 열심히 하시니까 보기 좋네요.”

“흐어, 흐억, 헉! 허억!”

“나, 나 죽어- 으어-”

“······.”

“야, 야. 정신 차려. 은우야.”

“서, 서준아.”

성현은 빙긋 웃으며 주전들을 바라보았다.

승룡기 검도 대회로 인해 축적된 피로가 풀린 이후, 그들은 엄청나게 하드한 트레이닝을 며칠째 이어가는 중이었다.

합숙 훈련에서 수민이 성현에게 집중적으로 받았던 훈련을 모두가 함께 받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도 한 번 해보니까 좀 버틸 만하네.”

그래서인지 모두가 반쯤 뻗어 널브러져 있는 와중에도 수민은 좀 더 멀쩡해 보였다.

일단 자기 발로 서 있기는 했으니.

“수민이 너는 바로 한 번 더.”

“······엇?”

예상치 못한 말에 수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성현은 더 말하지도 않고, 그저 빙긋 웃는 얼굴로 그에게 담담히 손짓할 따름이었다.

무어라 말하려던 수민은 곧 고개를 푹 숙이고 성현을 향해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며 대현이 낄낄대며 웃었다.

“역시 입은 만악의 근원이네. 안 그래, 윤호야.”

“참, 다음은 수민이 다음은 다시 형들인데. 누구부터 하실래요?”

“성현아! 대현이 자기도 한 번 더 하고 싶단다!”

“이 자식이···!”

반쯤 드러누워 있던 윤호가 재빨리 거리를 벌리며 대현을 팔아넘겼다.

굉장히 빠른 손절이었다.

“네, 윤호 형. 그럼 수민이 다음은 대현이 형 순서로 가는 걸로.”

“으아아-!”

“고생해라. 난 좀 더 쉴 테니까.”

“두고 보자!”

성현은 아옹다옹하는 대현과 윤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자신들의 차례가 오면 힘든 걸 참고 일어날 걸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성현은 장담할 수 있었다.

춘계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는 건, 결국 광천고가 되리라고.

다시 한번,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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