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거친 포효
““와아아아-!””
[이번 선취 득점은 대단히 큽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히사츠네 선수로서는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반면 이성현 선수는 지켜내기만 해도 이길 수 있죠!]
[조급함은 빈틈을 만드는 원인이 되기 마련이니···. 승기를 잡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환호하는 관중들과 들뜬 얼굴로 외치는 중계진.
그러나 정작 선취 득점을 올린 성현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한발 먼저 유리한 위치에 올라섰음에도 일말의 기쁨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방심하지 않기 위해 애써 즐거움을 감추고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절반만 맞는 소리였다.
담담함을 가장한 이유는 방심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고통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서였으니까.
욱신.
‘너무 무리했네.’
성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선취 득점까지는 분명 기뻐할 일이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폭거였다.
그건 안 그래도 피로에 절어있는 몸이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서 있었다.
만약 그가 지치지 않은 상태였다면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이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으니······.
욱신!
‘오른팔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그나마 호완으로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만약 맨손이었다면 부들거리며 떨리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였으리라.
지금도 죽도를 쥔 손에 힘이 조금이라도 빠진다면 떨림을 숨길 수 없을 정도니.
‘눈치챘으면 골치 아파지는데.’
성현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뒤로 물러선 히사츠네 아츠시를 살폈다.
만약 히사츠네 아츠시가 그의 상태를 알아차렸다면 두 번째 판부터 힘들어질 가능성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히사츠네 아츠시의 표정에서 득의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만이 가득했을 뿐이다.
성현이 보여준 폭거가 히사츠네 아츠시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까닭이다.
‘이성현은 정말··· 괴물인 건가? 지치지도 않는, 피로조차 느끼지 않는 괴물?’
하루에 치른 시합만 벌써 열여섯 번.
심지어 그중 세 번의 시합은 결승전에서 휴식 시간도 없이 치렀으며 지금은 거기에 이은 네 번째 시합마저 진행 중이다.
이 정도면 현역 프로 선수라 해도 옛날옛적에 지쳐서 자세가 흐트러졌을 텐데, 어찌 이토록 멀쩡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히사츠네 아츠시는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건 어디까지나 성현이 지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아직도 힘이 남아있다면 어떨까.
그건 처음 계산이 완전히 틀렸다는 거고, 그가 이길 확률이 아득히 낮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물며 선취점을 빼앗기기까지 했으니···.
“두 판째!”
주심이 두 번째 판의 시작을 알렸음에도 히사츠네 아츠시는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단 한 번, 그저 반격에 나섰을 뿐인데 그걸 박살 내고 점수를 뜯어간 성현의 모습이 화인처럼 머릿속에 남은 탓이다.
물론 그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점수를 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연장전이라도 가려면 1점이라도 내야 했다.
하지만 방금과 똑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젠장···.’
[히사츠네 선수, 신중하게 움직이며 이성현 선수의 빈틈을 찾습니다]
[한 번 찔러봤을 뿐인데 점수까지 내줬으니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이건 이성현 선수로서도 조금이나마 쉴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이 대치하는 가운데.
가벼운 공세만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흘렀다.
그 과정에서 히사츠네 아츠시는 서서히 의아함을 느꼈다.
의문은 간단했다.
‘어째서 끝을 내러 오지 않는 거지?’
참 아이러니하게도 히사츠네 아츠시의 의문은 성현이 너무 대단하기에 생긴 것이었다.
분명 평소의 성현이었다면 거침없이 달려들어서 추가 득점을 올리고 끝냈을 텐데, 지금은 그저 가벼운 공세만을 나누고 있었으니.
언제든 그럴 수 있는 이가 그러지 못한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그럴 만한 이유라면─
‘아뿔싸!’
눈을 크게 뜬 히사츠네 아츠시가 다시금 성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항거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이미지를 최대한 지워내고자 되뇌며 객관적인 시선으로 성현을 살피려 노력했다.
그러자 성현에게 씌워져 있던 어떤 환상이 걷혔고, 비로소 진정한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연이은 시합으로 피로에 찌들어 있는, 지쳐버린 성현의 모습이!
‘속았다!’
번뜩이는 깨달음 뒤에 온 건 탄식이었다.
성현이 첫 득점에서의 위력적인 일격으로 움츠러들게 만든 뒤, 시간을 벌며 몸을 추슬렀단 사실을 알아차린 까닭이다.
절호의 기회를 날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일 분이나 되는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이었단 말인가.
지치지 않는, 피로를 느끼지 않는 괴물?
현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시합을 하는 한 체력은 계속해서 소모될 테고, 열여섯 번의 시합을 치른 성현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이리라.
‘아니, 아직 늦지 않았다.’
히사츠네 아츠시의 눈이 뱀처럼 빛났다.
‘체력을 회복했다면 분명 끝을 내러 왔을 거야.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반격에 나서면 돼!’
“히야아앗-!”
이전까지의 대치가 거짓인 것처럼 거침없이 치고 나아가는 히사츠네 아츠시.
사납게 달려드는 그를 본 성현은 자신의 속임수가 기어코 들통나고 말았음을 알아차렸다.
하기야, 오래 가기는 힘든 수긴 했다.
어디까지나 상대의 착각을 이용해서 시간을 벌었던 것이었으니.
되려 1분이나 끌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터.
타악! 탁! 타악!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히사츠네 선수!]
[이성현 선수 많이 지친 모양입니다.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히사츠네 아츠시의 공세는 난폭하고 거셌을 뿐만 아니라 특이하기까지 했다.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좌우로 흘려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야규신음류를 검도에 녹여냈기 때문인지, 좌우로 휘청거리듯 다가오며 죽도를 연달아 내질러온 것이다.
일반적인 검도와는 무척 다른 방식의 격자였고, 많은 이가 이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히사츠네 아츠시에게 꺾이곤 했었다.
성현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히야아아아앗─!”
탁! 타악! 탁! 타탁!
내지르고 내지르고, 또 내지른다.
계속해서 몰아치는 히사츠네 아츠시의 표정에서는 확신마저 느껴졌다.
성현은 지쳤고,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확신!
그가 내는 기술이 점차 과감해지고 있음에도 성현이 제대로 반격다운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물러서고 있다는 게 바로 그 확신을 뒷받침하는 근거였다.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어!’
환희에 찬 히사츠네 아츠시와는 달리, 성현은 그저 담담했다.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표정으로 그저 간결하게 격자들을 막아낼 따름.
그러다 문득, 그는 생각했다.
‘어쩐지 그때가 떠오르는걸.’
과거로 돌아왔던 첫날.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 하윤과 대련했던 그때가 뇌리에 스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육체는 그의 생각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남아있던 건 오직 높이 쌓아 올린 기술과 수십 년을 기반으로 한 경험들뿐.
‘하지만 다른 점도 있지.’
성현의 눈이 새카맣게 타올랐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은 분명했다.
지금은 지난 일 년의 시간으로 젊고 건강해진 육체에 대한 적응이 이미 완벽히 끝난 상태라는 것.
모든 걸 퍼 올린 끝에 메말라 갈라진 늙은 육신과는 달리, 죄다 끌어다 써도 안에 젊음이라는 활력이 남아있는 이 육체에 말이다!
그 작은 차이가 만들어낸 변화는 어마어마했다.
타악, 탁!
빗겨내고, 막고, 흘리고, 쳐내고, 꺾고, 뒤튼다.
아무리 강렬한 격자라도, 아무리 흉포한 일격이라도 닿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성현의 감각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보고, 듣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머릿속에 떠올랐고,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가 무엇을 할지와 그에 대한 대처가 자연스레 환상처럼 눈앞으로 그려졌다.
지금 성현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그에게만 보이는 그 그림을 현실에 옮기는 것.
그렇게 하면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테니.
‘──!’
아무도 깨닫지 못했으나, 성현만큼은 알았다.
일찍이 검도계를 전율케 한 ‘불패(不敗)’가 과거로 돌아와 더욱 높은 경지로 올라섰음을.
[엄청난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성현 선수! 무너지지 않고 버텨냅니다! 정말 놀라운 방어입니다!]
[으음, 이건- 허어어어···.]
‘왜? 어떻게? 대체- 무슨 수로?’
성현을 상대하는 히사츠네 아츠시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분명 행동 하나하나에서 지쳐있다는 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방어를 뚫어내고 격자를 성공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지른 격자만 수십 번.
생각과는 달리 그는 승기를 거머쥐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의 기세에 밀려 주춤거릴 뿐.
분명 상대는 숨을 헐떡일 정도로 피로에 찌들어 있는 상태일진데.
왜 무너지지 않는가?
어째서 뚫어낼 수 없는가?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이제, 히사츠네 아츠시의 눈에 성현은 불가해(不可解)의 존재처럼 보였다.
상식을 벗어난 무언가로.
‘더, 더 격렬하게 몰아쳐야 해. 더 과감하게! 공격에 모든 걸 걸고!’
하지만 히사츠네 아츠시는 몰랐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고, 꺾일 듯 꺾이지 않아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어 스스로 자멸케 하는 것이야말로 ‘불패’의 진면목임을.
그처럼 자신의 공격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는 순간─ 역으로 반격에 당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늙었을 때는 그 반격조차 힘겨워서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겨우 일 분 남짓한 휴식으로도, 지친 육신 깊숙한 곳에서 일말의 활기가 피어났으니까.
이것이 젊은 육신이 가진 특권이리라.
기회를 노리는 괴물이 호면 속에서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히야아앗-!”
‘지금!’
히사츠네 아츠시가 재차 기부림을 토해내며 달려들었고, 그걸 보는 성현의 눈이 빛났다.
지금의 격자가 명백히 반격을 고려하지 않는, 의욕만이 앞선 격자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기다렸던 순간!
후욱-!
“-앗?!”
성현은 벌려 걷기로 훅 치고 들어갔다.
옆으로 돌아들 듯 들어가는 건 히사츠네 아츠시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록 야규신음류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녹여낸 히사츠네 아츠시만은 못할지언정, 성현의 벌려 걷기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오죽했으면 저 임하윤조차 한순간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을까!
성현이 반격할 거라 예상도 못 했던 히사츠네 아츠시에게는 그게 마치 등 뒤에서 꽂히는 비수처럼 느껴졌으리라.
[이성현 선수의 반격! 이게 먹히면 이대로 경기는 끝나게 됩니다!]
“하아아앗-!”
남은 건 쐐기를 박는 것뿐.
성현은 몸을 휘돌리며 죽도를 내질렀다.
지친 와중에 내지른 격자이기에 번개처럼 빠르지도, 묵직한 위력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리하느라 자세를 무너진 히사츠네 아츠시를 끝장내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리고 그 말인즉.
“백색, 허리! 시합 끝!”
[득점-! 이성현 선수가 먼저 2득점을 성공시키면서 승리! 이로써 광천고가 한일합작 승룡기 검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정말, 정말 대단합니다, 이성현 선수! 네 명을 연달아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결국 4연승을 이뤄냅니다! 대회 전체로는 17연승이군요!]
[뛰쳐나오는 광천고 선수들! 하하! 정말 기뻐 보이네요!]
성현이 끝끝내 히사츠네 아츠시를 꺾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주심의 선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지막까지 존심을 지키던 성현은 거친 포효와 함께 오른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자신의 승리를 모두에게 알리듯이.
한일합작 승룡기 검도 대회.
한국과 일본, 검도에서 세계 최강의 칭호를 두고 다투는 두 국가가 힘을 합쳐 개최한 대회에서, 한국 대표 광천고가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우승 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