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폭거
*
“야 이, 씨- 미친! 이걸 진짜 이긴다고?”
“3연승이잖아. 이제 주장만 남았어!”
“또 역전극이야? 이래서 광천고 경기는 무조건 끝까지 봐야 한다니까.”
한국 관객들이 흥분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웅성거렸다.
1승을 거둘 때만 해도 ‘이거 혹시?’하고 생각했던 그들은 어느새 2승을 넘어, 3승을 쌓고 단 한 명만을 남겨둔 상황에 환호했다.
실로 대역전극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심지어 널리고 널린 평범한 고등학교도 아니고, 작년 인터하이를 제패한 일본 최강 에이겐 고교를 상대로 말이다.
그렇게 들썩거리는 건 관객들뿐만이 아니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 이를테면 내일 있을 여고부 경기 출전 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광천고 여자 검도부의 중견, 이하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승할 수 있을까?”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
경기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홀린 하은의 그 말에 당찬 대답이 돌아왔다.
“네! 우승할 거예요!”
그리 대답한 건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경기장에 당당히 선 성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직 결승이 시작되기 전, 성현과 나누었던 톡의 내용이었다.
결승전은 괜찮냐는 물음에 성현이 뭐라 답했던가?
‘이길 수 있다고 했어.’
그렇다면 이길 것이다.
성현은 작년부터 지금까지, 최소한 검도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수연의 신뢰로 가득 찬 얼굴을 본 하은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래. 수연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까 톡하는 거 같았는데 수연이 남친이 그때 이긴다고 했나 보네.”
“으휴, 이래서 커플은···.”
“······!”
이때다 싶어 놀려대는 선배들의 모습에 수연이 달아오른 얼굴을 숨겼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경기장에 선 성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게 더 장난기를 부추긴다는 걸 모르는 모습이었다.
히죽히죽 웃으며 수연에게 달라붙는 여자 검도부 주전들.
그 모습을 하윤이 의미 모를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후우우···.”
성현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시합에 나오기도 전에 지쳐있던 육체가 또 한 번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손이 떨렸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후들거렸다.
관절이 욱신거리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하기야, 방금 치도 마츠시와의 시합으로 이번 경기에만 세 번, 하루 통틀어 열여섯 번의 시합을 진행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무겁고 찝찝하다.’
입고 있는 호구마저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는 상황에 성현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시합 중 어찌나 땀을 흘렸는지 도복이 축축이 젖어 달라붙는 감촉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지쳤기 때문에 느끼는 기분이라는 걸 그는 자각하고 있었다.
만약 몸이 조금만 덜 지쳤더라면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았으리라.
‘그래도 이제 한 명 남았어.’
문제는 그게 히사츠네 아츠시라는 점이었다.
‘야규의 후예’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 3대 유망주.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히라와타 신지, 가토 카츠히토와 함께 일본 최강을 다투는 굴지의 강자.
······정작 일본 최강의 타이틀을 거머쥔 건 다른 선수였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히사츠네 아츠시가 검도종주국 일본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 중의 강자라는 이야기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그 싹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히사츠네 아츠시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지금 한정으로 일본 3대 유망주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이기도 했다.
다혈질에 화가 많은 히라와타 신지나 냉정하면서도 은근히 자존심이 강한 가토 카츠히토보다도 표리부동(表裏不同)하고 음흉한 히사츠네 아츠시 쪽이 상대하기 더 힘겨우니 말이다.
분명 히사츠네 아츠시라면 이쪽이 적잖게 지쳤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고 약점을 후벼파는 식으로 경기 운영을 진행할 터.
그걸 잘 대처할 수 있느냐가 이번 시합을 결정짓는 승패의 갈림길이 되리라···.
[마지막 시합! 이성현 선수와 히사츠네 선수의 시합입니다. 광천고 대 에이겐 고교의 승패는 마침내 주장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불리하던 상황에서 끝끝내 50대 50까지 끌고 온 이성현 선수의 실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제 히사츠네 선수만 이기면 됩니다!]
[맞습니다! 이제 우승까지는 단 한 걸음! 한 걸음만 남았어요!]
“인사!”
주심의 구령에 맞춰 허리를 숙이면서, 성현은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이쪽을 낱낱이 파악하려는 눈빛.
‘전’에도 히사츠네 아츠시와 시합을 할 때면 늘 느꼈던 그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 알고 싶은 거겠지.’
그 말인즉, 성현이 지쳤는지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세 번의 경기를 진행하는 동안 겉으로는 한 번도 지쳤음을 티 내지 않은 덕이었다.
하지만 아마 오래지 않아 눈치채겠지만, 최소한 잠깐은 ‘멀쩡할지도 모른다.’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작은 착각으로 어떤 결과를 이뤄낼지는 전적으로 성현의 손에 달렸고.
“-시작!”
“······.”
“······.”
주심의 구령이 울려 퍼지고.
차분하게 대치하는 성현과 히사츠네 아츠시.
두 사람 모두 중단세를 취하고 있긴 했지만, 어딘가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중단세의 정석과도 같은 성현과는 달리, 히사츠네 아츠시의 중단세는 어딘가 낭창낭창하게 휘어질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곧게 선 것과 휘어진 것을 같이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는 히사츠네 아츠시의 검도가 갖는 특징으로 인해 생긴 차이였다.
본래 일본 고무술인 야규신음류(柳生新陰流)를 배웠던 히사츠네 아츠시는 자신의 검도에 그때의 가르침을 반영시켰던 거다.
그로써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검도를 확립할 수 있었고, 바로 그게 같은 중단세임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느껴지게 만든 것이었다.
[천천히 대치하고 있는 두 선수. 과연 어느 쪽이 먼저 움직일지···.]
[아마 히사츠네 선수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릴 겁니다. 움직여야 하는 건 이성현 선수가 되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송학림 해설님?]
[이성현 선수는 이미 세 번의 경기를 치렀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지금 꽤 많이 지쳐있을 거란 뜻이죠. 히사츠네 선수는 그걸 노리고 있을 거고요.]
[아하! 그럼 히사츠네 선수는 연장전까지 길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겠군요?]
[그렇습니다.]
중계진의 말대로, 히사츠네 아츠시는 연장전까지 가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금 무턱대고 치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여차하면 승부를 길게 가져감으로써 상대를 벼랑 끝까지 몰아넣을 생각이었다는 이야기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는데, 그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상대─ 이성현이 두려웠으니까.
‘저건 괴물이야.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괴물.’
눈이 있다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성현은 앞서 히사츠네 아츠시조차 이길 수 있다 자신할 수 없는 강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꺾고 여기까지 올라왔으니까.
16연승이라는 정신 나간 기록은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
그런 그를 상대로 ‘나라면 이길 수 있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질 만큼 히사츠네 아츠시의 성격은 무르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성현을 자신의 위에 있는 존재로 생각했다.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적이라고.
하지만 그게 그가 승리를 포기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백이면 백 내가 질 거다.’
“하아아-”
‘······지금 같은 기회가 아니라면, 말이지.’
히사츠네 아츠시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숱한 강자들을 꺾은 끝에 이룩한 16연승.
그 압도적인 기록에 주눅 들지 않는다면, 그 뒤에 숨겨진 지독한 피로를 볼 수 있다.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마찬가지!
철인이 아니라면 지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승리를 거머쥘 기회는 거기에 있다고, 히사츠네 아츠시는 생각했다.
‘문제는 얼마나 지쳤냐는 건데.’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건드려봐야 했다.
풀을 때려서 뱀이 나올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툭, 툭-
[가볍게 두드려 보는 히사츠네 선수]
[조심스러운 움직임입니다. 이성현 선수의 저력을 경계하고 있는 듯하네요.]
성현의 죽도를 두드리는 히사츠네 아츠시.
자신만의 독특한 리듬으로 찔러 보면서 그는 뱀처럼 성현을 살폈다.
어떤 대처를 하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본디 공세에 맞서기 위한 공세라 해도, 공세에는 그를 행하는 이의 생각과 뜻이 담기기 마련.
그 안에 담긴 피로를 느낄 수만 있다면─
타악-!
─히사츠네 아츠시의 상념을 끊어내듯, 경쾌한 죽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을 건드리는 것에 분노하기라도 하듯, 성현이 그의 죽도를 거세게 두들겨 밀어낸 것이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반응.
이에 히사츠네 아츠시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성현이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성현 선수가 먼저 다가섭니다!]
죽도의 끝만 닿는 거리에서, 죽도의 중혁끼리 교차하는 거리까지.
과감하기까지 한 성현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히사츠네 아츠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였다.
‘지쳤던 게 아니었나? 그렇다 하기에는 너무 과감해! 아니, 오히려 그걸 노린 걸지도 몰라. 물러서야 하나? 나도 치고 들어가?’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성현이 흐릿하게 웃었다.
히사츠네 아츠시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고 갈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에도 그랬으니까.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생각이 많은 것.
그것이야말로 히사츠네 아츠시가 일본 3대 유망주, 나아가서는 일본 3대 강자로밖에 남을 수 없던 이유였다.
때로는 자신의 본능에 맡기거나, 혹은 과감하게 나아갈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는 너무나도 많은 걸 생각하고 판단하려 했다.
누군가는 그게 신중함이라 할지 모르나, 신중함도 과하면 때로는 독이 되는 법이다.
‘일단은, 물러선다!’
‘물러서겠지. 판단이 안 서니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히사츠네 아츠시를, 성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쫓았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추격이었다.
물러서는 한 걸음과 내딛는 한 걸음.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뻔한 노릇!
“-큿!”
더는 물러서서는 안 된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히사츠네 아츠시의 눈이 영활한 빛을 띠고 빛났다.
굳건하게 땅을 디디고, 언제라도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휘어지듯 들어갈 수 있게 무게 중심을 반쯤 띄워놓는다.
야규신음류의 특징은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고 흘려내며 측면을 노리는 것!
히사츠네 아츠시의 검도 또한 그러했으니.
“하아아앗-!”
[이성현 선수가 공격에 나섭니다!]
[단호한 기세로 치고 들어가는 이성현 선수!]
그런 히사츠네 아츠시에게 성현은 단호한 공세로 답했다.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내지르는 기부림.
바닥에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들어 올렸던 죽도가 세차게 휘둘러졌다.
히사츠네 아츠시는 언제나 그랬듯이 상대를 축으로 삼아 왼쪽으로 휘돌았다.
일반적인 벌려 걷기와는 다르다.
그보다는 좀 더 둥근, 선형으로 이어지는 몸놀림이었고, 그건 다시 말해 성현의 허리에 반격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기부림을 내지르며, 성현의 오른 허리를 노리고 죽도를 내지른 것이다.
“히야아앗-!”
······그것이 성현이 바랐던 것이라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서.
오싹-!
히사츠네 아츠시가 섬뜩함을 느낀 건 죽도를 반쯤 내질렀을 때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본능이 경종을 울렸기에.
찰나의 순간, 눈을 올린 그가 본 건 자신을 삭막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빈틈을 찔렸다는 당황도, 득점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보고 있다’라는 행위뿐.
그러나 그렇기에 성현의 시선은 히사츠네 아츠시에게 끔찍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시선이 그에게 나직이 속삭였기 때문이다.
‘너─ 걸렸구나’라고.
후우웅-
아래로 내리그어질 것 같던 성현의 죽도가 직각에 가깝게 꺾이며 휘둘러졌다.
휘두른 죽도의 궤적을 이렇듯 급격하게 바꾸는 건 어마어마한 손목의 힘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는 해냈다.
지독한 단련을 바탕으로 한 폭거로써.
타아악!
울려 퍼지는 타격음.
이윽고, 주심이 깃발을 들어 올렸다.
“······백색, 허리!”
[이성현 선수의 선취점입니다!]
성현의 득점을 알리는 깃발을.
거친 포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