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겨울방학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부터 겨울방학이다. 그렇다 해서 너무 놀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는 안 하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해야 된다!”
““네-!””
“어휴, 우리 반이 대답은 참 잘해. 아니지. 대답만 참 잘해. 그치?”
한숨 섞인 담임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그리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었지만, 방학을 앞둔 학생들에게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재미없는 농담이든 뭐든 이제 곧 방학이라는 사실만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으니까.
“어차피 방학 기간에 보충 학습이랑 자율 학습 하러 나와야 할 테니 상관없겠다만.”
““우우-!””
“시끄러워, 요 녀석들아! 나도 너희 가르치러 방학 때 출근해야 한다고! 아무튼, 다들 방학 잘 보내고. 건강해라! 이상 종례 끝!”
언제나처럼 종례를 빠르게 끝내 버린 담임 선생님이 반에서 나가고.
하교를 위해 시끌시끌하게 움직이는 학생들 사이에서 태준과 수연이 슬그머니 성현이 앉은 자리로 모여들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집합이었는데, 이래저래 세 사람이 성현을 중심으로 자주 뭉치다 보니 익숙해진 까닭이었다.
“으아-! 드디어 겨울방학이다!”
“표정 봐라. 그렇게 좋냐?”
“당연하지! 내일은 진짜 늘어지게 잘 거야. 나 말릴 생각 하지 마. 알았어?!”
“안 말려-”
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록 태준만큼은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된 그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도 들고─실제로 돌아간 게 맞지만!─, 무엇보다도 수업을 듣느라 쓰던 시간을 이제 온전히 검도에만 쏟아부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검도부를 비롯한 운동부들은 보충 학습이나 자율 학습을 부 활동으로 대신하는 까닭이었다.
‘물론 성적이 안 좋으면 나가야 하지만.’
다행히 과거로 돌아오며 뇌가 젊어진 덕분인지 성현의 현재 교과 성적은 제법 훌륭했다.
평균 90점 내외를 왔다 갔다 하며 중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여담이지만, 태준과 수연도 성현과 거의 비슷한 평균 점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에는 성현과 수연이 서로 다른 대학에 갔던 것이고─당시에는 성현이 공부를 잘 못했으니까─.
“방학 끝나면 2학년이네. 내년에도 같은 반 됐으면 좋겠는데···.”
걱정 어린 수연의 말에 성현은 “걱정하지 마. 2학년에도 같은 반이니까.”라고 턱밑까지 치솟았던 말을 내리눌렀다.
그가 이미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2학년은 물론, 3학년 때까지 같은 반으로 배정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의 이야기.
지금은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는 데다가, 설령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반 배정 결과를 미리 귀띔해 주기 위해 자신이 시간을 되돌아 왔다고 밝히는 것도 퍽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수연의 말에 맞장구쳤을 따름이다.
“그러게. 그랬으면 좋겠다.”
“헤헤, 그치?”
수연이 해맑게 미소지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성현의 머릿속에 ‘전’의 2학년 때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는 수연의 말에 그때 두 사람이 어떻게 지냈는지 떠오른 것이다.
당시 성현과 수연은 그녀가 지금 바라던 대로 고등학생 시절 내내 같은 반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그건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전’의 성현은 자신이 수연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괜히 그녀를 퉁명스럽게 대하고는 했으니까.
두 사람은 매일같이 다퉜고, 그로 인해 사이가 소원해졌었다.
그러다 대학이 갈라지며 멀어지자마자 연락이 뜸해진 후,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이가 된 것이고.
‘다 내 잘못이었지.’
지금 와서 떠올려 봐도 수연이 먼저 화를 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개 성현 자신이 툴툴대다 성을 냈을 뿐.
그걸 삼 년 가까이 참아 줬으니, 졸업 후 그녀의 인내심이 바닥난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전’에 상처 입혔던 만큼 더 잘해 주리라.
성현은 따스한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
뜬금없는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수연은, 곧 손뼉을 짝! 치며 입을 열었다.
“참, 성현아. 그 소식 들었어? 이번에 연승전 방식 대회가 새로 만들어진다고 했잖아. 그거 한일합작으로 개최될 거래!”
“한일합작으로?”
“응응!”
“허어-···.”
성현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애초에 ‘전’에는 개최되지도 않았던 연승전 방식의 대회다.
그런 만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일합작으로 진행된다는 소식은 그마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됐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한일합작이면 일본 고등학생들도 참가하는 건가.’
의외이긴 했지만, 딱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국가 교류전에서 밟아 둔 이가 일본 3대 유망주 중 가토 카츠히토뿐이라는 게 좀 아쉬웠었으니까.
이번에 개최될 연승전 대회를 통해 남은 둘마저 잘 밟아 두면 일본 유망주들도 한층 더 뛰어나져서 돌아올 터.
전국 대회에서 한국 유망주들이 엄청나게 성장한 것을 직접 본 터라, 성현의 기대는 굉장히 컸다.
“연승전 방식이 뭐야?”
옆에서 듣고 있던 태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성현과 친한 그는 기본적인 검도 규칙은 알고 있었지만, 연승전은 난생처음 들어 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연승전이 본래 한국 검도 대회에는 없는 방식이다 보니 모를 만도 했다.
그에게 설명해 준 건 수연이었다.
“원래 검도 단체전은 한 순서에 한 명씩 나와서 경기하잖아. 1대1 방식으로. 선봉에서는 선봉만, 2위는 2위만.”
“그렇지.”
“연승전은 선봉이 이기면 2위 경기에도 그대로 나가는 거야. 거기서도 이기면 3위 경기도 나가고. 지거나 비길 때까지 계속해.”
“오- 그거 재밌겠는데?”
한 사람이 상대팀 전원을 쓰러뜨릴 수도 있는 방식, 그게 바로 연승전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상대팀을 모두 쓰러뜨릴 만큼 강하고, 또 경기를 연달아 치르는 게 가능할 정도로 체력도 있어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만히 듣던 성현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근데 왜 갑자기 한일합작을 하는 거지?”
“일본에서 요청했다고 하더라.”
“일본에서?”
“응응! 기사에 그렇게 써 있었어!”
일본 측의 요청이라니.
더더욱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 없어졌다.
정말 간단히 생각하면 지난 굴욕에 대한 설욕이겠지만, 국가 교류전에서도 대차게 패배했는데 어떻게?
‘뭐, 어차피 내년에 있을 대회니까. 당장은 생각할 필요 없으려나.’
대회 개최 예정일은 내년 2월.
춘계 전국 대회가 시작되기 전의 봄방학으로 되어 있다.
아직 두 달이 넘는 시간이 남은 셈이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봐도 괜찮으리라.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도 했고.
“우리 입부 체험이 일주일 남았나?”
바로 입부 체험이라는 일이.
겨울방학을 틈타, 광천고 검도부는 내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할 중학교 3학년들을 대상으로 한 입부 체험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보통 이런 건 신입생이 들어오고 난 후 신규 부원을 확충할 때 진행하곤 했지만, 특별히 그걸 좀 일찍 당기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유인즉,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광천고에 올까 말까 고민하는 중학생 유망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피의 수혈이 시급한 지금, 광천고 검도부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이쪽을 선택할 경우 좋은 점이 뭔지를 알리고자 내린 결단이었다.
‘쓸만한 애들 좀 건질 수 있으려나?’
아직 신청을 받고 있는 중이라 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이 왔으면 좋겠다고 성현은 생각했다.
그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래에 꽤 유명한 선수가 된다는 뜻이고, 그 말인즉 즉시 전력감이라는 의미였으니.
정철을 비롯한 3학년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미리 대비해 놨음에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응, 일주일. 근데 나 왠지 좀 떨려.”
“응? 왜?”
“나중에 후배가 될지도 모르는 애들이 온다니까···. 두근거리는 기분이야.”
“중학교 때도 후배는 있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고등학생 때랑 중학생 때랑은 느낌이 다르잖아-”
“그런가?”
인생의 단맛 쓴맛 가릴 것 없이 다 봤던 칠십 대 노인으로서는 뭐가 다른지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성현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가방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
“입부 체험이라 해 봐야 별거 없을 거야. 기껏해야 같이 훈련 좀 하다가 끝나겠지.”
기본적인 훈련에 더해서, 대련 정도.
아마 입부 체험에서 할 건 그게 전부이리라.
운동부니 뭐가 더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마.”
“응응! 알았어!”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수연을 보며 성현이 피식 웃었다.
그가 알기로 수연은 2학년 중순부터 사실상 하윤에게 주장 순서와 직위를 넘겨받으며 광천고 여자 검도부를 이끌었다.
지금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당시 그녀가 이끈 광천고 여자 검도부는 매년 좋은 성적을 거두며 순항했다.
리더십은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뭐, 괜찮겠지.’
*
일주일 후.
광천고등학교.
“···솔직히 말해도 돼?”
“···말해봐.”
“나 지금 좀 많이 떨려.”
“그래? 우연이네. 나도 그래.”
은우와 서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주위에 온통 고등학생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중학교 3학년인데도 말이다.
본래 학생 때에는 한 살 차이도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아예 중학교와 고등학교라는 차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내년이면 그들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될 테지만, 최소한 지금은 중학생에 불과했으니까.
그나마 겨울방학 중인지라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한 쭈그리가 되어 있었으리라.
“정말 이쪽 맞아?”
“아까 알려 주신 선생님이 이쪽이라 했잖아. 다시 물어볼 거 아니면 잠자코 따라와.”
“으─”
“다른 데 다닐 때는 맨날 무브무브 거리더니.”
“거기랑 여기가 같냐···.”
아직 중학생인 은우와 서준이 고등학생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광천고 검도부에서 진행한 입부 체험.
거기에 신청서를 낸 까닭이다.
지난 추계 전국 대회를 통해 광천고에 입학할 마음을 굳힌 두 사람이 굳이 입부 체험을 신청한 이유는 미리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내년에 갑자기 입부하는 것보다 지금부터 미리 안면을 터 놓는 게 적응하기 더 쉬울 테니.
두 사람에게는 다행히도 검도부가 쓰는 도장을 찾는 건 퍽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운동장 옆쪽에 지어진 새 건물 앞에 누가 봐도 검도부가 있음을 알려 주듯, 대문짝만하게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던 덕분이다.
아무래도 입부 체험 할 이들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표시해 둔 것처럼 보였다.
“···쟤도 입부 체험 하러 온 걸까?”
“아마 그렇겠지.”
앞쪽에 걸어가고 있는 소녀를 발견한 은우의 물음에 서준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쓸데없는 것에 한눈파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러는 사이, 도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소녀- 서봄은 그 안으로 사라졌고, 곧 정신을 차린 서준과 은우도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혹시라도 늦기라도 했다간, 첫인상부터 조질 수도 있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입부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