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한일합작
4일 차 여고부 개인전 경기는 성황리에 끝났다.
우승을 차지한 건 광천고의 임하윤이었다.
한때 ‘남고부의 백성호, 여고부의 임하윤’이라 일컬어지며 고교 검도계를 이끈 쌍두마차의 명성에 걸맞은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남고부 개인전 결승과 마찬가지로 여고부 개인전 결승 또한 광천고 내전이었다는 것.
그랬다.
수연과 하윤이 회장기 검도 대회에 이어 또 한 번 결승에서 맞부딪쳤던 거다.
결과야 뭐, 앞서 말했듯이 임하윤의 우승.
회장기에 이은 수연의 두 번째 패퇴였다.
몇 달 전에 비교해서 몰라보게 발전한 수연이었지만, 그 긴 동안 하윤이라 해서 놀고만 있던 게 아니다.
비슷한 수준의 천재들에게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성장 폭 또한 동등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일 년이라는 차이까지 있다면 더더욱.
그런데도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는 회장기 이상으로 경기가 치열했던 까닭이었다.
성현이라는 최고의 스승이자 도우미가 있는 수연의 발전 속도는 미세하게나마 하윤 이상이었고, 두 사람의 사이는 착실하게 좁혀지고 있었다.
내년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
여하튼, 그리하여 마침내 추계 전국 대회의 모든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남은 건 5일 차에 예정된 시상식뿐.
사실상 전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관객들 대다수가 돌아가는 건 이즈음이었다.
시상식만 마지막 날 따로 하기도 하고, 또 이미 경기 결과도 전부 나온 터라, 굳이 관객들도 참가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올해만큼은 달랐다.
아침 일찍 사직 체육관을 찾은 학생 선수들이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숫자의 관객들이 시상식을 보러 왔기 때문이다.
비록 경기가 있는 날에 비하면 적었지만, 그래도 놀라운 일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은 이유?
남고부 단체전 우승 광천고 / 준우승 경중고.
여고부 단체전 우승 광천고 / 준우승 서울여고.
남고부 개인전 우승 광천고 이성현 / 준우승 광천고 정철.
여고부 개인전 우승 광천고 임하윤 / 준우승 광천고 강수연.
이 결과를 보고도 어찌 시상식에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체전을 제외하면 전부 광천고의 수상이라니.
이제까지 고교 검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니 진짜 말도 안 되네요.”
“경중고가 패권을 쥐고 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쪽이야 뭐, 남고니까요.”
남고부에서 강한 검도부는 얼마든지 있었다.
여고부에서 강한 검도부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남고부와 여고부 모두 강한 검도부는 광천고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대진운도 기묘했다.
개인전 결승전이 남녀 가릴 것 없이 전부 광천고 내전이라는 건 하늘이 색다른 기록 한번 써보고 싶어서 점지해 준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연히 관객들이 시상식에까지 찾아올 수밖에.
실제로 진행된 시상식은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쭉 진행된 시상식 내내 광천고 남녀 검도부는 계속해서 시상대 위에 서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이 모습에 익숙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회장기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딱 이랬었죠.”
“아뇨. 그때보다 더합니다. 최소한 그때는 남고부 개인전 결승이 내전은 아니었잖습니까.”
“···광천고. 정말 무시무시한 학교네요.”
회장기 검도 대회를 직관했던 이들에게는 이게 두 번째였으니.
더욱 무시무시한 건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광경이 펼쳐질 확률이 높다는 점이었다.
최소한 개인전만큼은 확실했다.
올해 보여 준 역량을 보면 남자든 여자든 개인전 우승을 광천고가 내어 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남은 단체전 또한 광천고가 성공적으로 3학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성공한다면 강력한 우승 후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테고.
‘전국 대회 우승이라.’
정철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전국 대회 단체전 우승 상장과 트로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단체전 우승이라니.
올해 초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결과였다.
당장 춘계 전국 대회 32강에서 패퇴했던 것이 기억에 선명한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빅3라 불리려나?’
대회 시작 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린 정철이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전에 있었던 빅4 대신, 광천고와 경중고, 용암고를 묶어 새롭게 빅3를 구성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에 시기상조라 했던 이들은 지금 뭐라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왕좌’, 추계 전국 대회 우승 트로피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뭘 그렇게 웃고 있어?”
“아, 현성아.”
불쑥 옆에서 나타난 건 현성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묻던 현성은 정철이 든 우승 트로피를 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참 신기하네.”
“뭐가?”
“그게 우리 두 번째 트로피라는 거. 여태까지 하나도 못 얻었었는데, 처음으로 얻은 게 회장기고, 두 번째로 얻은 게 전국 대회잖아.”
확실히 그랬다.
여태까지는 약소부라 불리며 우승 경력 한번 없던 광천고였으니까.
그랬던 광천고가 첫 우승에 고교 검도 3대 대회 중 하나인 회장기 검도 대회를 우승하고, 이제는 다른 3대 대회인 추계 전국 대회까지 정복해 냈다.
마침내 얻은 두 개의 트로피가 모두 어마어마한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동안 많이 참았잖아. 그걸 한꺼번에 몰아서 받는다고 하면 맞지 않아?”
“하긴, 그것도 그렇네.”
현성이 킥킥대며 웃었다.
정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광천고 남자 검도부에 들어온 지 삼 년.
그동안 계속해서 무관으로 지냈으니, 그동안 쌓인 스택을 한 번에 터뜨리고 있는 거라면, 이 정도는 얻는 게 맞았으니까.
“둘이 뭘 그리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뒤늦게 온 경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지난 삼 년간 광천고 남자 검도부를 지탱해 왔던 삼 학년 세 사람은 간만에 활짝 웃으며 떠들었다.
전국 대회라는 최고의 학생 선수 대회에서 우승한 이들은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경진이 툭 던진 말에 분위기는 한순간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좀 더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딱 일 년만, 아니 반 년만이라도.”
정철도, 현성도, 그리고 경진도.
세 사람 모두 올해로 졸업이다.
광천고 남자 검도부의 일원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몇 달도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제 이 대회 이후는 대학 입시나 실업팀 고민으로 바쁠 테니 사실상 그들의 고교 검도는 끝을 맞이했다고 봐도 좋았다.
아쉬움을 느끼고, ‘더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삼 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거쳐 겨우 날개를 펼친 상황에서 떠나야 한다니.
자신들이 삼 학년이라는 게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쓰라리고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하나 안심되는 건 있네.”
“어떤 게?”
“우리 떠난 뒤에도 쉽게는 안 무너질 거라는 거.”
“하긴, 영준이랑 대현이, 윤호 얘네 실력 엄청 늘었으니까.”
“무엇보다 성현이도 있고.”
뒤가 든든하다는 건 떠나는 이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설령 자신들이 떠난다 해도 열심히 지켜 온 광천고 남자 검도부가 든든하다는 사실은 삼 학년들에게 안도하는 마음을 느끼게 했다.
만약 아직도 약소부였다면 향후 존망을 걱정하며 졸업했을 테니, 그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현성아, 경진아.”
“응?”
“아, 잠깐만. 나 느낌 왔어. 얘 또 오그라드는 거 말할 각이야.”
현성의 말에 정철이 피식 웃었다.
그 예상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사람이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고마웠다. 너희들 덕에 검도부를 잘 이끌 수 있었어. 약소부라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아 준 덕분이야.”
“으악-! 내 손발-!”
기겁하며 도망치는 현성을 보며 정철과 경진이 낄낄거렸다.
서로를 돌아본 두 사람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후, 현성이 달려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다른 광천고 검도부 부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앞으로의 광천고 검도부를 책임질 이들이.
*
“···어떻게 할까요?”
“으으음-”
한국 검도 협회 이사, 강영기의 물음에 회의실 안에 묵직한 침음이 흘렀다.
쉽사리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몇 달에 걸쳐 강한 의지로 프로젝트를 추진해 온 곽해수 이사마저도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지금 나온 안건이 많은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랬다가 결과가 나쁘기라도 하면···.”
“국가 교류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거야 특별한 경우였고.”
“아, 그래서 거절하자는 겁니까? 저쪽에서 내건 조건이 이렇게 후한데?”
“원래 독이 든 사과는 맛있어 보이는 법이죠.”
“차라리 다음부터는 어떻겠습니까.”
이사들 간의 의견은 쉽게 일치되지 않았다.
받아들이는 것과 거절하는 것.
어느 쪽이든 일장일단이 있었고, 그에 따라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
보통 이럴 때 책임지고 결정을 내렸을 곽해수가 관자놀이를 매만질 뿐, 딱히 아무 말도 안 한 까닭이기도 했고.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목소리까지 높아지던 와중, 닫혀 있던 곽해수의 입이 열렸다.
“다들 이번 추계 전국 대회 결과는 봤는가?”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나누던 대화와는 하등 상관없는.
그러나 그것을 말한 게 협회 이사 중에서도 한 끗발 더 높은 곽해수였기에, 다른 이사들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물론이죠, 곽 이사님.”
“정말 대단한 결과 아닙니까?”
이번 추계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 대회의 결과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낳았다.
광천고라는 절대적인 강함을 가진 고교 최강의 검도부를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빅4로 대변되던 구도까지 깨부쉈으니까.
고교 검도계가 이번 대회를 거치며 재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 그뿐이랴?
쉽게는 볼 수 없는 시상 결과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는 검도라이프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도 큰 화제가 되며 검도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데 일조했다.
평소에는 검도 경기 영상 따위는 찾아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지켜봤을 정도니···.
한국 검도 협회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결과였다는 뜻이다.
광천고로 정복된 시상 결과를 보고 떨떠름했던 이사들조차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 급격하게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가 교류전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라고 믿네.”
한국 유망주 대표팀의 전승은 유명하다.
앞선 전국 대회 전에 한창 온갖 커뮤니티에 소위 말하는 ‘국뽕’ 자료로 퍼 날라졌으니까.
한일전 승리에 국위 선양까지 담긴 자료로 인해 한국 검도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런데 지금 뭘 망설이는가? 우리가 전혀 밀리는 게 없지 않나!”
곽해수 이사가 씩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지금 당장 일본에 받아들이겠다고 전하게. 이번 대회, 한일합작으로 추진해 보자고.”
본래 한국 고등학교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을 연승전 방식의 대회에, 일본 고등학교까지 참전하는 순간이었다.
겨울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