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가르침 >
“고생? 아냐, 고생은 성현이 네가 했지. 우리가 뭔 고생을···.”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하던 대현이 문득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확히는, 완전히 땀에 절어 널브러져 있는 2학년 트리오와 온전하게 서서 그들을 향해 웃고 있는 성현을 번갈아서.
상반된 모습을 눈에 담은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곧,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꼴만 봐선 우리가 오지게 고생한 거 같긴 해.”
“그건 그렇네.”
윤호가 맞장구쳤고, 영준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확실히 지금 상황만 봐서는 썩 틀린 말도 아닌 까닭이다.
한 번만 대련한 그들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앉아 있는데, 정작 세 번 연속 대련한 성현은 훨씬 멀쩡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새삼 그들에게 성현이 얼마나 괴물인지를 깨닫게 해 줬다.
무려 세 번을 연달아 대련하고, 또 거기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
기량적인 면에서도, 체력적인 면에서도 얼마나 뛰어나야 그게 가능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기에.
“그래서, 네가 봤을 때는 어땠냐?”
윤호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본디 이번 대련의 목적은 그들의 실력을 보고, 장단점을 파악하여, 성현이 그들에게 맞는 조언을 해 주는 것이었다.
이제 비로소 세 사람 모두 대련이 끝났으니, 그에 대해 들을 시간이었다.
“그럼, 우선 대현 형부터 말해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나부터!”
“일단, 대현이 형은 파고들기가 아주 훌륭했습니다. 먼저 뛰어드는 타돌이 주특기 맞으시죠?”
“맞아. 그거 하나는 자신 있거든.”
대현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단체전에서 2위와 3위는 만에 하나 선봉이 패했을 때 최소한 상대와 비김으로써 흐름을 끊는 역할이다.
따라서 2, 3위의 순서는 실력은 부족할지언정, 자기 특기 하나는 명확한 이들이 맡곤 했다.
그리고 대현의 특기는 타돌이었다.
그는 일족일도의 거리에서 상대가 빈틈을 드러내면, 한순간에 그것을 물어뜯기를 즐겼다.
“난 먼저 들어가는 게 좋아서 그건 진짜 죽어라 연습했거든. 잘할 수 있도록.”
대현의 특기가 타돌인 것은 그의 말마따나 성격적인 면도 한몫했다.
언제나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그는 기다렸다가 반격하거나, 혹은 공세부터 시작해 나가기보다, 먼저 뛰어들어 공격을 가하기를 좋아했으니까.
“확실히 타돌은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다만, 상대의 빈틈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진짜 빈틈인지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대련에서 꽤 많이 낚이셨죠?”
“맞아. 일부러 드러낸 줄도 모르고, 빈틈이라고 뛰어 들어갔다가 아주 박살이 났었지.”
성현의 말에 대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장 첫 격돌 때도 그러했으니까.
빈틈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일부러 드러낸 것이어서 큰 낭패를 보지 않았던가.
“빈틈의 사실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눈. 그리고 필요한 건 과감한 몸 받음과 코등이 싸움입니다.”
“몸 받음이랑 코등이 싸움?”
몸 받음과 코등이 싸움이라니.
생각도 못 했던 조언이었다.
그런 대현의 놀람을 눈치챈 듯, 성현은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대현이 형은 타돌이 실패한 이후에 자꾸 몸을 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자세를 추스른 후 타돌을 시도하겠다, 이런 느낌이 확 나요. 안 좋은 버릇입니다.”
“아아-”
“차라리 몸 받음까지 이어 버리세요. 타돌의 기세를 살려서 부딪치는 것으로 상대 몸의 대세를 허물면 기회를 얻기 마련입니다. 코등이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돌에서의 기세를 살려서 몸을 부딪치면, 결국 주도권을 가져가는 건 공격하는 쪽이다.
성현이 말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타돌 후에 주도권은 언제나 형한테 있음을 기억하세요. 설령 그게 막혔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 기세를 살려 상대를 압박해 나가는 것으로 기회를 쟁취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 거 같아.”
“타돌-몸 받음-격자 순서를 연습하면 좋을 듯합니다. 코등이 싸움도 따로 연습하시고요.”
성현이 대현에게 해 준 조언은 최고의 조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결국 실력을 늘리면 모든 게 해결되므로, 실력을 늘려라- 라는 게 최고의 조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현의 조언이 가치가 있는 건, 그게 대현에게는 최선의 조언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의 실력을 증진시킬 방법으로 이것 이상의 것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몸 받음과 코등이 싸움이라···.’
당장 깊게 생각에 잠긴 대현의 얼굴만 봐도 그건 분명하게 드러났다.
몇십 년간 후학들을 가르쳐 온 경험과 쌓아 올린 수양은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 법이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난 어땠어?”
“윤호 형은 공세에서 굉장히 탁월한 모습을 보여 주시더군요.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한 공세였습니다. 순간적인 대처도 나쁘지 않았고요.”
“으음-”
‘그런 거치고는 완전 개발렸다만.’
윤호는 목 끝까지 치솟아 올랐던 말을 억지로 되삼켰다.
자랑인 공세가 성현을 상대로 전혀 통하지 않은 데다가, 오히려 역으로 균형을 잃고 휘둘렸던 그에게는 저것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세가 훌륭했다면, 그것을 완파해 버린 성현의 공세는 뭐라 평가해야 한단 말인가?
“다만 공세 이후의 공격에서는 자꾸 망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좋은 기회일까에 대해 의심하시는 모습이셨는데, 고치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현은 사계(四戒)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계란, 검도의 승부에서 패배의 원인이 되는 ‘흔들리는 마음’을 뜻한다.
검도인들은 보통 이를 네 가지로 나누어 경계했는데, ‘경(驚)’, ‘구(懼)’, ‘의(疑)’, ‘혹(惑)’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따로 ‘경공의혹(驚恐疑惑)’이라고도 하지만, 그건 제쳐 두고.
윤호가 문제가 되는 건 이중 ‘의’와 ‘혹’이었다.
의(疑)는 의심이다.
상대의 동작에 의심을 느끼고, 마음이 흐트러진 끝에,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려 자멸하는 것을 뜻했다.
혹(惑)은 헤맴이다.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를 뜻했다.
“공세 이후에 의심하고 헤매니 의와 혹이라 할 만합니다. 이것을 고치지 못한다면 설령 공세에서 승기를 취한다 해도 기세를 살리지 못해 쉽사리 패배하고 맙니다.”
“음- 그럼 공세 이후에 좀 더 자신감 있게 치고 나가라는 이야기야?”
“맞습니다. 공세에서 이득을 봤으면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주도권을 쥔 채 상대를 압박하시면 됩니다. 칼끝에서 이기면, 결국 이기는 건 윤호 형이 될 테니까요.”
과연 타당한 말이었기에, 윤호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윤호에 관한 이야기를 끝낸 성현이 마지막으로 남은 영준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는 유일하게 성현과 두 번 대련해 본 이.
그래서인지 영준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보다 더 확실하게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영준이 형은 전체적인 기량이 다 뛰어나요.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기본기도 충실하고, 공세도 잘 풀고, 작은 머리치기 같은 특기도 있으니···.”
영준에 대한 성현의 평가는 매우 후했다.
실제로 영준의 실력은 꽤 뛰어났으니까.
괜히 정철이 졸업한 후에 그 자리를 이어받아 광천고의 에이스로 활약한 게 아니라는 듯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형의 문제는 윤호 형처럼 사계에 있어요.”
“사계?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다고?”
“네. 정확히는, ‘경(驚)’과 ‘구(懼)’죠.”
경(驚)은 놀람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마음이 흐려져,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해 몸이 굳어지는 상태를 뜻했다.
구(懼)는 두려움이다.
상대에 대한 공포로 인해 기세에서 밀려 본인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했다.
간단히 말해서.
영준은 예기치 못한 반격에 취약하고, 성현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이미 한 번 성현과 대련을 해 본 영준이다.
그는 그 당시 압도적이라는 말조차 부족할 만큼 처참히 패배했었다.
그때의 경험이 그의 발을 옭아맸으리라.
하지만 그거야 성현 개인에 대한 문제라고 넘어간다 쳐도, 전자의 경우는 현재 영준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그리던 그림과 어긋나는 순간, 그는 움직임이 확 둔해지고는 했으니.
“대충 이 정도입니다. 한다고 했는데,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아냐, 걱정하지 마! 엄~청 도움이 됐으니까.”
대현의 말은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진심이었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더불어,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는 건 확실히 큰 도움이니까.
무엇이 문제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훈련하면 될지도 알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됐어.’
마지막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부탁한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영양가 있는 결과가 나와서 놀라울 정도였다.
어지간한 이들보다도 더 전문적으로 평가하고 문제점을 지적해 줬으니···.
“그런 의미에서 대련 한 번 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대현이 말했다.
그가 굳이 성현과 대련을 하려는 이유는, 힘든 대신 얻는 게 너무 컸던 까닭이다.
분명 성현과의 대련은 일반적인 대련은 물론, 실제 경기보다도 더 지치지만, 실력이 늘어나는 느낌은 확실했기에.
“좋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나도 부탁해.”
“쯧. 늦었네. 그럼 그다음은 나로.”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윤호와 영준이 아니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그들 또한 대련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두 사람 모두 열정으로 불타는 눈빛이었다.
몸이 힘든 것 따위는 무시한 채,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기를 택한 것이다.
“으음- 그럼 성현이한테 너무 부담되지 않을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난 한 번 더 예약!”
언제 걱정했냐는 듯 표정을 바꾸며 말하는 대현.
뻔뻔한 얼굴의 그를 보며 킥킥대던 성현은, 문득 시야 한구석에 있는 이들을 눈치챘다.
어쩐지 이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는 소년들.
바로 1학년 남자 검도부 부원들이었다.
“······.”
“······.”
‘아아-’
왜 1학년생들이 저렇듯 그를 훔쳐보는지는 성현조차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건 선망의 시선이었다.
아마 당당하게 주전들과 어울려 훈련하는 성현이 부러웠으리라.
1학년이면서 다른 주전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오른 이는 성현이 유일했으니.
‘그냥 끼어들기에는 친분이 부족할 시기긴 하지.’
1학년들이 입학하고, 부 활동을 시작한 지 겨우 두어 달이 지났을 뿐이다.
이제 막 동기들과 친해질 시기였고, 끽해 봤자 주전 아닌 선배들과 마음이 맞아 형, 동생 하며 지내기 시작하고 있을 터.
그렇기에 저쪽도 부러운 눈으로 보고만 있을 뿐,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대련은 한 번씩만 할게요.”
“응? 아, 힘들어서?”
“아뇨, 그런 것보다는-”
성현이 슬쩍 1학년생들에게 눈짓했다.
2학년 트리오도 그쪽을 보았고, 금방 그들도 왜 저들이 모여 있는지 깨달았다.
그들도 1학년일 때 저랬던 적이 있었으니까.
깨달은 표정이 된 그들에게 성현이 덧붙였다.
“3학년 선배님들 졸업한 후를 생각해야죠.”
현재 주전에 있는 3학년은 선봉 정철과 5위 현성, 부장 경진까지 총 세 명.
그들은 올해 말부터 대학 준비를 해야 할 테니, 사실상 주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건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따라서 미리미리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 줄 1학년들을 키워 놓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2학년 트리오도 그것을 이해했다.
“하긴, 형들도 곧 졸업이시니까.”
“추계 대회가 사실상 마지막일 거 같지?”
“올해 추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내년 춘계에서도 우승하려면, 미리 주전감을 찾아 놔야죠.”
성현이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놀라웠다.
추계 대회 우승에 춘계 대회 연패라니.
이제까지 32강에서도 수없이 탈락했던 광천고가?
하지만 2학년 트리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도, ‘어쩌면···.’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기 때문이다.
‘추계 대회는 정철 형에 나, 성현이까지 3승. 딱 1승만 더 챙길 수 있으면 필승조 완성이야.’
‘우리만 잘하면 우승도 가능해.’
‘아직 몇 달 남았으니, 그동안 죽을힘을 다해 훈련해서 실력을 늘린다면···.’
슬쩍 시선을 맞춘 2학년 트리오들은, 마치 맞춘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는 말이네.”
“올해만이 아니라 내년도 봐야지.”
“그럼, 쟤네들도 함께?”
“오케이.”
만족스러운 결과에 성현이 빙긋 웃었다.
올해에 대비해 2학년 트리오를 바짝 키우고, 거기에 내년을 내다보고 1학년들까지 키운다면.
훗날 경중고에 버금가는 ‘강호’ 광천고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이곳에는, 다름 아닌 그가 있으니까.
‘못 할 것도 없지.’
*
[안녕하세요, 이성현 선수.
전에 만나 뵀던 천수아입니다.
이렇게 문자를 드리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제공해 드리기로 약속했던 호구의 준비가 끝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