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화 : 좋구나 >
“······.”
이성현은 가라앉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화책이 덩그러니 펼쳐져 있는 책상, 전원이 꺼진 상태의 컴퓨터, 벽에 붙어 있는 옷걸이와 거기에 걸린 잘 다려진 교복.
그리고,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죽도 한 자루까지.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으려니 낯설면서도 그립다는, 굉장히 모순적인 감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방은 거의 육십 년 전쯤, 그러니까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 지냈던 곳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이 모든 것들을 그립게 만들면서도, 속절없이 흐른 세월은 그것을 낯설게 느끼도록 했다는 뜻이다.
‘이건, 꿈···인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추측이었다.
일흔 살 넘은 노인이 고등학교 때 쓰던 방의 풍경을 보고 생각할 만한 건 그게 전부였으니까.
꿈이 아니고서야 이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단순히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성이 넘친다는 점이었다.
보고, 듣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현실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으니.
‘꿈이 아니라면······.’
“······.”
허공을 헤매던 성현의 시선이 모니터의 검은 화면에 닿았다.
정확히는,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가 기억하던 칠십 대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고등학생답게 앳된 얼굴의 소년이 그를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흘러간 세월의 여파로 하얗게 셌던 머리카락도, 고된 훈련으로 쩍쩍 갈라져 패였던 주름살들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그의 얼굴이었다.
이미 흘러간 과거에 있었던, 고등학생 시절 그의 얼굴 말이다.
‘······과거로, 돌아왔다?’
문득 성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이곳에서 깨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도장에 좌선하고 있던 그에게 들려온 목소리.
그 목소리는 말했더랬다.
-“정말 더 빨리 깨달았다면 달랐을까?”
-“좋아. 어디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한 번 확인해보자.”
“······.”
뒤늦게 생각해보면 그건 아무도 없던 도장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때 성현은 그런 건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레 그 목소리의 질문에 대답했고, 그에 의문 같은 건 가지지 않았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 나눴던 대화가 원인이 되어 지금과 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라면?
‘정말로 과거로 돌아왔다고?’
성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설프게 굳은살이 배겨있는 손바닥이 보였다.
이건 절대로 몇십 년 동안 쉬지 않고 단련한 검도인의 손이 아니었다.
칠십 먹은 노인의 손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것은 그가 여태까지 쌓아 올린 모든 노력이 ‘없었던’ 것이 되어버렸다는 의미였다.
꽈악-
그러나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꽉 움켜쥔 주먹에 켜켜이 쌓인 단련의 흔적은 없을지언정, 그를 대신하여 칠십 대 노인은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젊음의 활력이 가득 차 있다.
성현이 다시는 느껴볼 수 없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생생함이 그 안에 넘실거렸다.
어디 그뿐이랴?
움직일 때마다 삐걱대던 관절들은 용수철처럼 탄력적이고, 나이가 들며 늘어졌던 근육들은 길게 잡아당긴 고무줄보다도 더 팽팽하다.
찬물만 마셔도 시리던 치아조차 하얗고 튼튼하게 변한 상태.
“하···!”
그 모든 변화를 똑똑히 느낀 성현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번졌다.
지금까지 그가 쌓았던 모든 노력을 잃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랴.
육십 년 동안 들인 노력보다 훨씬 값진 젊음을 되찾았는데!
게다가.
‘일흔 넘어까지 검도를 했던 경험이 그대로 살아있지 않은가!’
“좋구나, 아주 좋아.”
성현은 저도 모르게 껄껄 웃었다.
젊어진 육체에 육십 년간 쌓은 경험.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완벽한 조건이 아닌가?
더불어 그를 과거로 보낸 존재가 바라는 것도 그것이었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물론, 설령 누군가 말렸다 한들 그는 듣지 않았으리라.
검도의 매력에 빠져 인생을 바친 남자에게 그건 무리한 요구였으니까.
‘그럼 이제-’
-코톡!
이어지던 성현의 생각을 끊은 건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이었다.
그것을 손에 쥔 성현이 신기한 눈으로 살폈다.
무려 육십 년 전에 썼던 기종의 스마트폰을 다시 만난 거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가 칠십 대 노인이던 시절에는 고대 유물 정도로 취급받던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사용 방법을 까먹고 헤매던 그였지만, 곧 지문 인식을 통해 잠금을 풀고 코코아톡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메시지는 길지 않았다.
[수연 : 오늘 학교 안 와?]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던 성현은, 이내 스마트폰 위쪽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10분.
지각이었다.
*
“매점 가서 빵 조질 사람?”
“오늘 점심 뭐냐.”
“몰라, 확인 안 했어.”
와글와글 떠들며 몰려나가는 학생들.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알리듯 하나같이 환한 얼굴들 사이로, 지친 표정의 성현이 겨우 자신의 교실에 들어섰다.
코코아톡을 본 직후,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한 그였지만, 정작 학교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원래라면 십 분이면 올 길을 이리도 오래 걸린 건, 학교까지 오는 길을 떠올리는 것에 많은 시간을 썼던 까닭이었다.
‘다니던 학교가 어딨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니, 이거야 원···. 허허.’
성현이 고등학교에 다녔던 건 육십 년 전의 일.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육십 년이면 여섯 번은 변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하다못해 현재 자신의 집 위치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서 학교가 어딨는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흐릿한 추억에만 의존해 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그가 점심시간 즈음에 도착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뒤늦게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기능을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5교시나 6교시쯤에나 도착했을 터였다.
‘이런 식으로 세월의 흐름을 체감할 줄이야.’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등교를 준비하며 챙긴 교과서에 학년과 반이 쓰여있었다는 점이다.
아니라면 자신의 학년과 반을 찾기 위해 또 한참 왔다 갔다 했을 테니까.
‘고등학교 1학년이라. 딱 좋을 때로구나.’
“후우···.”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무슨 일 있었어?”
한숨을 내쉬는 성현에게 다가온 건 그에게 코톡을 보냈던 이, 강수연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커왔고, 지금은 바로 옆집에 살고 있으며, 과거 성현이 검도를 시작했던 계기가 되었던 그녀.
그리고, 성현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다만 대학이 서로 갈라지면서 멀어졌고, 이후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었는데······.
‘어리구나.’
어깨까지 내려오는 새카만 단발과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한 피부,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얼굴까지.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앳된 소녀의 얼굴에 성현은 색다른 감회를 느꼈다.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수연은 마흔이 넘은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으니까.
애초에 미모가 뛰어난 덕에 그 나이에도 예쁘긴 매한가지였지만, 여하튼 지금 같은 소녀는 사진으로나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성현의 모습에 수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아무것도.”
성현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담담해 보이는 표정과는 반대로, 그의 가슴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분명 오래전에 그녀에 대한 감정을 모두 정리했을 텐데도.
‘이것도 과거로 온 영향인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음을 거둔 노인 성현과는 달리, 고등학생 성현은 아직 수연을 짝사랑하고 있을 때였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싱숭생숭했던 성현의 마음은 언제나 그랬듯이 평온을 되찾았다.
지금 성현의 정신은 칠십 대 노인의 것이었고, 옛 첫사랑이 흔들기에는, 그의 정신은 너무나도 굳고 단단한 것이었기에.
검도에 인생을 바쳤던 노인의 평정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그래? 그래서 왜 늦은 거야?”
“늦잠을 좀 자서 그렇단다.”
성현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그로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한다 한들, 그걸 믿어주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칠십 살 넘게 먹은 노인이 과거로 돌아와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리라.
하물며 그게 더 높은 검도의 경지를 위해서라는 이유라면?
‘제대로 미친놈이라고 하겠지.’
그러니 속이듯 대답할 수밖에.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 말투 뭐야~ 사극이라도 보다 잤어?”
‘아차.’
“크흠.”
무심코 노인 때처럼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성현이 헛기침했다.
확실히, 학생이 쓸만한 말투가 아니긴 했다.
별생각 없이 말했던 그는 최대한 기억을 짜내, 학생다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니, 아냐. 음···. 그냥 늦잠 좀 잤어.”
“난 또, 아침 훈련 싫어서 늦은 줄 알았어.”
“···그랬으면 1교시에는 학교에 왔겠지. 안 그러, 큼. 안 그래?”
“그건 그렇네~”
끄덕이는 수연을 보며 성현이 쓴웃음 지었다.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에 실제로 그랬던 적이 있었다는 걸 깨달은 까닭이었다.
하기야, 그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검도에 빠져들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다.
그전까지는 거의 관성적으로 검도를 했을 뿐이니 훈련을 빼먹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검도를 시작한 이유조차 수연이와 좀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순수하지 못한 것 때문이었으니······.
“···음- 그, 성현아?”
“응?”
“혹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면 내가 깨워줄까?”
볼이 살짝 발그레해진 수연이 말했다.
생각도 못 했던 제안이다.
성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자, 그녀가 황급히 변명하듯 덧붙였다.
“바로 옆집이고, 어차피 나는 좀 일찍 나오니까! 깨워줄 시간은 충분하거든!”
“아, 그런가?”
“응응! 이렇게 지각하면 아주머니께서도 걱정할 거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뭐가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랬다간 수연이 발끈해서 자리를 박차고 떠나갈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도─지금은 미래지만─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었던지라, 그 반응을 예상하는 건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이자, 수연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어···때? 깨워줄까?”
“나야 좋긴 한데···. 수연이 네가 귀찮지 않겠니?”
“아냐! 귀찮기는! 어차피 바로 옆집인데!”
“그렇구나. 그럼 부탁해도 될까?”
성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은 표정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는 그가 고등학생 소년이 아니라 칠십 대 노인의 정신을 가진 까닭이었다.
그에게 있어 수연의 제안은 손녀가 할아버지를 아침에 깨워주겠노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응! 매일 내가 깨워줄게! 나만 믿어!”
수연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소리쳤다.
하지만 교실 내에 있던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몰려들자,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비명처럼 “밥 맛있게 먹어!”라는 말을 남긴 그녀는 휙 하고 돌아서 달려나가, 금방 성현의 시야에서부터 사라졌다.
아마 점심을 먹기 위해 급식실로 가는 것이리라.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가봐야겠구나.’
느긋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성현.
그리고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쪽에서 한 소년이 머리통을 불쑥 들이밀었다.
“야, 이성현.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응?”
기괴한 무언가를 본 것 같은 소년의 얼굴에 성현은 “아.”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었던 까닭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이름은 김태준.
성현과는 고등학교 때 친하게 되어, 이후 칠십 대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함께한 친구였으니까.
앞으로 주야장천 볼 얼굴이고, 성현의 기준으로는 예전에도 주야장천 봐온 얼굴이니 익숙할 수밖에.
‘허허, 김태준이의 어린 모습이라니.’
특히나 눈에 띄는 젊음은 풍성한 두발이었다.
미래의 태준은 중년에 시작된 탈모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 결국 남은 부분을 깨끗하게 밀어버린 대머리였기 때문이다.
“정신줄 놓은 거 보니까 잘못 먹은 거 맞나 본데? 괜찮냐, 너? 아까 강수연이랑 말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던데.”
“태준아.”
“어.”
“너 나중에 탈모 온다. 관리 잘해.”
뜬금없는 폭언에 태준의 표정이 팍 찌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