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47화
“한판승이군요.”
LVLL의 스텔라 집무실에 이번 시즌 광고팀이 모였다. 피에르가 도혁과 강태오를 번갈아 보며 치하했다.
“이건 판정이 아니라 완전히 상대를 넘겨 버린 한판 승리입니다. 완벽하게 이겨 버렸다고요! 하하.”
“그러니까요. 두 시즌을 밀리다가 한칼에 날려 버렸네요. 아, 속 시원해!”
“맞아요. 고렌느가 이번에 안일했어요. 이미지 소모가 많았던 일본풍으로 예쁘게만 만들어 왔어요. 모델만 믿고 설친 고렌느와 우리 LVNN 광고는 차원이 달라요. 이번 시즌 광고 비평 보셨어요? 스토리와 메타포가 풍성하게 어우러진 예술이라는 반응이에요.”
스텔라가 만면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부연했다.
“이건 한 떨기의 작품이에요. 진심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크리에이티브였죠.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담은 우리 LVNN의 정신도 잘 표현되었구요. 이 이상의 광고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과찬이십니다. LVNN 측에서 예산도 넉넉히 책정해 주시고 로케에 보안까지 각별히 신경 써주셔서 가능했던 일인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감사하죠. 명도혁 씨야말로 동양에서 나타난 귀인 아닙니까. LVNN을 구원한 귀인이요.”
“그 귀인 누가 소개했더라.”
피에르가 생색을 내자 모두의 웃음이 터졌다.
“브레드 자식 열 받아 할 표정을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하네요. 정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아요. 참, 산업스파이 잡았다면서요.”
“어. 고렌느 쪽 부하 직원이 제보했어. 역시 배신자들의 말로는 비슷해. 배신자를 누군가 다시 배신하게 마련이거든.”
“아, 속 시원해. 여러모로 정리가 되었어요. 이제 정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도혁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스텔라를 격려했다.
“내심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한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직원들을 번갈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무척 곤란해 보였거든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번 캠페인을 계기로 힘든 일이 모두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저희가 끝까지 돕겠습니다.”
강태오의 말에 스텔라가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촉이 좀 좋은데요, 우리 명 대표님도 조심하셔야 해요.”
“네?”
“아마 강태오 디렉터님께 러브 콜이 쏟아질 것 같은데요? 다른 회사에 뺏기는 것 아니에요?”
예상했던 부분이라 도혁 역시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된다는 듯이 강태오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그러게요. 사실 정말 걱정입니다. 이 천재 디렉터가 언제까지 제 곁을 지킬지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이야. 서운하게.”
강태오가 정색을 하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앞가림 못 하는 나 같은 인간 명 대표가 거둬줘야지. 세금은 누가 내주나.”
“세금이요?”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강태오가 대답했다.
“네. 제가 좀, 세상 물정에 어둡고 생활력이 떨어집니다. 명 대표 옆에 빌붙어 살고 있다고나 할까요.”
“제발, 강 국장님 그 마음 변치 않았으면 좋겠네요.”
“대학 동아리 때부터 함께했던 의리인데 변할 리가 있나. 명 대표나 나 외면하지 마라.”
“어! 강 국장님 약속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증인이십니다!”
도혁이 재차 확인하며 강태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피에르가 흐뭇하게 웃었다.
“두 분 든든하고 좋네요. LVNN의 새 크리에이터로 손색이 없지요?”
“DW애드는 뉴욕을 대표하는 대행사로 거듭날 겁니다. 두 분 역시 탁월한 아트 디렉터로서 그 위상을 높일 거구요. 참, 오늘 괜찮으시면 저녁 함께하시죠.”
“저희야 좋습니다.”
“고렌느를 물리친 기념으로 위스키 창고 좀 풀까요? 저에게 괜찮은 컬렉션이 제법 있는데.”
스텔라의 말에 도혁과 강태오가 마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희 술통이 커서 감당하기 어려우실 텐데요. 창고가 거덜 날 수도 있습니다.”
“에이, 달랑 두 분인데 마셔봐야 얼마나 드시겠어요. 같이 가시죠.”
“올~ 스텔라 위스키 창고 아무한테나 안 푸는데. 밤새워 마셔보자고. 참, 모니카도 부를까?”
피에르가 웃으며 모니카를 찾는데, 스텔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니카는 당분간 푹 쉬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이참에 휴식기를 가지고 싶다면서 여행을 갔는데 어딘지는 정확히 몰라요.”
“저희가 압니다.”
도혁의 입매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모니카, 한국으로 갔습니다. 제주도요.”
* * *
“진우 이 자식, 갑자기 제주도는 왜 간 거냐?”
이른 아침, DW애드 코리아의 제작국을 어슬렁거리던 탁기준이 이진우를 찾았다.
“글쎄요, 그림 몇 장 더 건져 올 거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어요. 그 그림이 뭔지는 말 안 해줬구요.”
“이 팀장 개인전 준비 중이라고 했지? 하여간 유능한 자식.”
“참, 그림을 누가 산다고 했던 거 같은데요. 묘령의 여자와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찾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이 팀장이 그런 말을 했어?”
제작국 디자이너들의 말에 탁기준이 눈썹을 치켰다. 전혀 이진우가 했을 것 같지 않은 소리라며 한수철이 다가왔다.
“커피 드세요. 이 팀장이 웬일이래요. 바람이라도 났나 본데요?”
“바람은 우리 유부남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진우야 봄바람 불면 아름다운 거 아닌가?”
“올~ 이진우 팀장 연애라도 하나 봅니다.”
“우리 제주도 쳐들어가서 짠 나타나 줄까? 놀리면서 방해도 좀 하고 말이야.”
“그럴 여유가 어딨습니까. 매체사랑 연이어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LVNN 일이라 아래 직원에게 맡겨놓을 수도 없고. 하아.”
“아이고, 기획국은 한시름 놨는데 매체까지 하시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한 팀장님.”
“차현우 국장님 돌아오실 날만 손꼽고 있는데. 안 오시겠죠?”
“아마도?”
탁기준이 씁쓸한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너 같으면 오겠냐? 미국물을 좀 제대로 먹었어야지. 뉴욕팀 팀워크가 아주 좋더구만. 강 국장님도 한국에 있었으면 그 정도 스케일 만들어내기 어려웠어.”
“하긴. 3연작의 스토리 텔링이라니요. 게다가 예술에 가까운 전위적인 광고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을 광고주가 한국에 있을까 싶습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니 가능하지. 한국 대기업에 그 시안 가져가면 어떤 표정 지을지 눈에 선하다.”
한수철이 피식 웃더니 노트북을 당겨와 오뜨 꾸르트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번 LVNN의 패션쇼라는데, 전위를 넘어 난해하더라구요. 일반인이 보면 우스꽝스럽다고 느낄 지점도 많아요.”
“그렇지. 말 그대로 그들만의 세계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그 세계에 들어가기를 열망하고 바라지. 그러다 보니 더 다른 그림, 더 다른 세상을 창조해야 하니까 명품 디렉터들도 골치깨나 아프겠어.”
“DW애드 미국팀의 무서움이 거기에 있죠.”
숨을 고른 한수철이 말을 이었다.
“이번 LVNN 연작이요. 낯선데 익숙해요. 그래서 더 손에 잡힐 것 같은 열망을 부추긴다고나 할까요?”
“특히 동아시아권에는 더욱 그렇지. 직접적인 메타포를 사용한 한국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벌써 폭발적인 반응이 온다고 하더라고.”
“이번 기회에 한국이 글로벌 시장의 주요 거점으로 거듭날 거라고 봅니다.”
“크, 그 어려운 걸 우리가 해내는 거냐?”
“자화자찬 아주 좋은데요?”
연이은 자화자찬으로 화기애애한 아침이었다. 순간 사무실의 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황도준이 탁기준을 바라보았다.
“자화자찬 그만하셔야겠는데요?”
“이 자식, 칭찬은 스스로 해도 춤추게 되는 법이야. 고래 어쩌고 하는 말 못 들어봤냐?”
“그게 아니라, 언론에서 우리 칭찬해 준대요. KBN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뭐?”
탁기준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걷혔다.
“명 대표 한국 들어올 일정이 잡히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야?”
“탁 국장님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합니다. 한국 DW애드를 책임지고 있는 광고인이라고…….”
“헐! 나를?”
탁기준이 미간을 좁히며 안절부절못하자 한수철이 그를 격려했다.
“명 대표님에 이어 차세대 영앤리치로 거듭나시는 것 아닙니까?”
“이미 젊지도 않은데 무슨 영앤리치냐. 이런, 대표가 없으니 대외적 활동이 제일 문제네. 무려 공중파라니 난감하구만.”
“피부 관리라도 받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까? 워낙 잘생겨서 별문제는 없겠지만 카메라 잘 받아야 하니까. 큼.”
핸드폰 액정을 들어 얼굴을 확인한 탁기준이 만족한 듯 웃었다.
“언제 봐도 자알 생겼네.”
“자화자찬은 계속되는 겁니까?”
“그렇지. 하하.”
다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를 깨고 황도준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다급한 음성이었다.
“국장님! 여기 좀 보세요. 모니카 파파라치 컷이랑 기사가 떴어요.”
“파파라치?”
“네! 원래도 인기가 많았지만 이번 광고로 한국에서 인기가 엄청 올라갔다고 하더라구요. 어!! 이게 뭐야, 잠깐만!”
황도준이 가리킨 화면으로 모두의 시선이 이동했다. 사진은 흔한 헐리우드 스타의 파파라치 컷이었다. 편안한 캐주얼 차림의 모니카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남자였다.
“저, 저거 진우 아니냐?”
“헐! 허어어어얼!”
놀란 황도준이 큰 소리로 기사의 제목을 읽어 내렸다.
[LVNN의 요정 모니카, 한국 재벌 3세와 열애 중?
제주도를 찾은 모니카의 남자는 누구?]
“미쳤다. 와, 이거 이거!”
“말이 안 나오네. 그렇지, 이진우 팀장네가 재벌급이긴 하잖아. 대한민국 벤처 1세대니까.”
“미친, 모니카라니. 아! 내 모니카가 이진우 팀장이랑 제주도를 아!!!!!”
절규하듯 쓰러지는 황도준과 달리 미국 DW애드의 반응은 상쾌했다.
“어우, 속이 시원하네요! 이걸로 브레드는 두 방 얻어맞은 거죠?”
“맞아. 전 여친이 동양의 재벌 3세와 스캔들이 났으니 당분간 소화 안 되겠어?”
도혁과 최민아가 기사를 보자마자 통쾌하게 웃었다.
“지난번에 몰디브에서 모니카가 진우 그림에 관심을 보이더라고. 선이 굵고 힘이 느껴진다나 뭐라나. 이 팀장 말로는 그 자리에서 당장 몇 점을 사 갔다나 봐.”
“흠, 꼭 그림 때문에 제주도에서 만난 것 같진 않구요.”
최민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젊은 남녀니까 잘되면 좋지. 이야, 무려 모니카라니. 우리 진우 출세했구만.”
“그러니까요. 웬일이니.”
도혁은 이진우와 모니카의 사진을 손끝으로 가만히 훑었다. 사진 속의 이진우는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었지만 편안해 보였다.
모니카와 마주 보고 눈을 맞추는 것이 영락없이 호감을 가진 남녀의 모습이었다.
이 자식, 이번 생에는 기특하게 연애까지 하는구만.
가슴께가 따뜻해져 오는 감각을 느끼며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PC를 열자마자 메일이 쏟아졌다.
[새로 도착한 메일 52건.]
[광고 문의드립니다.]
[경쟁 PT 참여 협조의 건.]
…….
다시 업무를 시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