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46화
LVNN 시즌 캠페인 당일.
북미와 유럽, 그리고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TV에 LVNN의 광고가 걸렸다. 동시에 신문, 잡지 등 기존에 활용하던 매체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특히 이번 캠페인은 TV 영상광고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주로 고급 잡지와 하이엔드 매체를 통해서만 오픈했던 명품 시장의 전통을 깨고, 심야 시간대 TV를 선택한 LVNN의 새로운 시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최근 들어 급부상하는 DW애드의 동향에 주목하고 있던 뉴욕의 BBTT 광고대행사 대표 역시 LVNN의 새로운 시즌 광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오픈 예정을 알리는 티저 광고가 전파를 탔기에 기대는 더욱 고조되었다.
남자의 시선이 시계 초침을 따르고 곧,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동시에 화면에서 동양풍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띠리리릭, 두둥.
오묘한 한국 악기의 소리와 동시에 동아시아 특유의 은은한 색감이 얽힌 화면이 펼쳐졌다.
마치 하늘이 안개를 품은 듯 몽환적인 배경 속에서 옥빛 저고리와 연분홍의 쓰개치마를 두른 모니카가 얼굴을 내민 채 고개를 돌렸다. 서 있는 곳은 바다의 한가운데였다.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부드럽게 넘실거리며 그녀의 발밑을 감싸고, 순한 파스텔 빛 색감 속에서 태양이 비치며 LVNN을 상징하는 황금빛이 쏟아졌다.
곧 화면 속에서 연꽃이 흐드러지게 쏟아지며 학이 너울지듯 날아들었다. 동양풍 신화를 품은 듯 아름답고 고고한 풍경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BBTT 대표는 침음성을 삼키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흐음, 한국의 신화, 아니, 전설인가, 몽환에 동양을 품었다라.”
더 혼잣말을 잇기도 전에 카메라가 모니카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강렬한 일레트로닉 사운드에 동양의 북소리가 섞여들었다.
강력한 리프 위에 얹힌 교묘한 멜로디, 그리고.
툭.
음이 끊어지며 한국의 악기로 보이는 악기의 스트링이 끊겼다. 어느새 배경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미래로 향하고, 명품 광고 특유의 전위적인 풍경 위에 난해한 비주얼이 섞여들었다.
부드럽고 우아했던 전편의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붉은 색감이 화면을 잠식했다. 곧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니카의 커다란 눈동자에 카메라가 고정되었다.
순간 시선을 휘어잡는 비주얼과 사운드가 다시 빠른 비트로 움직이고 리듬을 따라 끊어지는 사이키델릭한 화면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다크한 배경의 세기말적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모니카의 존재가 빛을 발했다. 아까의 연분홍빛 몽환을 그대로 이어가며 어두운 배경을 장악해 갔다. 곧 전편에서 나타났던 우아한 학들이 여자의 쓰개치마를 벗기며 환상적인 화면과 함께 조화로운 국악이 흘러나왔다.
화면은 시간을 거슬러 스트링을 이어붙이고 현이 울리던 처음의 소리로 마무리되었다. 역전된 영상 속에서 다시, 모니카의 뒷모습이 비치고 은은한 연분홍빛 속으로 영상이 빨려 들어간다.
“이번 시즌 LVNN 크리에이터가 도대체 누구야, 미친.”
BBTT 대표는 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몸의 모든 감각이 영상에 압도된 듯한 기분이었다. BBTT 대표가 눈을 끔뻐기며 화면에서 고개를 돌리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마지막 광고를 시작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까 이어붙인 현의 오묘한 울림이었다.
“뭐야, 3연작 시리즈인가? 아주 돈을 쏟아부었구만.”
연작의 끝은 바로 뉴욕이었다. 무려 지하철 역사가 배경인 마지막 광고 속에서 모니카는 신화적인 메타포를 품은 기존의 모습 그대로 신비한 모습을 드러냈다.
서양적 아름다움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모니카와 동양적인 단아한 미의 정점이 마주 닿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크리에이터의 역량을 바닥까지 쏟아부은 듯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영상이었다.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하아. 모니카! 모니카가 저 정도였던가.”
BBTT 대표는 연신 모니카를 부르짖으며 움직이지 못하고 광고 속에 동화되었다.
전작에서 쓰인 학과 연꽃, 그리고 한복의 이미지를 차용해 절정의 아름다움을 선사한 광고는 무표정했던 모델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를띠며 마무리되었다.
우아한 모니카의 입에서 3연작 속 유일한 카피가 흘러나왔다.
[It’s Different. LVNN.]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나.”
BBTT 대표는 헛헛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올해 3대 광고제는 LVNN이 휩쓸어 가겠구만. 허허.”
* * *
같은 시각. 서울을 비롯한 동아시아 3국에서는 현지의 동향에 맞춘 캠페인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동시에 오픈한 LVNN 시즌 광고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시장에 맞춘 광고 전략을 별도로 선보인 것이다.
미국과 달리 대낮에 시작된 LVNN 광고였다. 대한민국의 광고인들이 모두 오픈 시즌 광고에 주목했다.
한국방송광고공사의 매체 담당 대기실에서 각 광고대행사의 직원들이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광고공사 지사장이 다가와 웅성대는 그들의 뒤에 섰다.
“어허, 지금 나오는 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LVNN 광고인가요?”
“네. 맞습니다. DW애드 코리아 아시죠? 명도혁 대표님 말입니다.”
“오호! 잘 알지요. 대한민국 광고 바닥에서 명도혁 씨 모르는 사람이 있나? 이번에 클리오도 휩쓸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뉴욕을 뒤집어놓으셨어요.”
태강애드 매체 담당 직원이 화면에서 펼쳐지는 LVNN 광고를 가리켰다.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모두 말없이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곧 3연작의 메인 광고가 끝나고, 공사 지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숨도 못 쉬고 봐서 그런지 목이 턱턱 막히네. 어이구.”
“정말 그렇습니다. 차라도 한잔 함께하실까요?”
“그럽시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하나둘, 소회를 전했다.
먼저 태강애드 직원이 마른 입술을 떼어냈다.
“이번 광고로 저는 DW애드의 국제적인 위상이 달라질 것이라 봅니다. 세계 어느 크리에이티브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연작이었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명품 광고들이 전위적이고 좀, 어렵잖아요.”
곁에 있던 다른 대행사 직원이 덧붙여 말했다.
“이 광고는 신화라는 어려운 주제를 쉽고 부담 없이 그려냈어요. 그러면서도 범접하지 못할 동양풍의 아우라를 만들었죠. 대중과의 거리 두기에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거리 두기라. 정말 그러네요.”
“네. 특히 마지막 연작에서 선보인 가설의 거리 두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뉴욕에서 가장 익숙한 지하철역이라는 곳을 가상의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익숙한 배경 속에서 낯섦을 선보였죠.”
“뭐, 세 광고 모두 어마무시하더군.”
“저희 같으면 연작으로 못 풀었을 거예요. 다음 시즌, 그다음 시즌 비축했다가 천천히 풀었겠죠. 아이디어가 아깝잖아요.”
한 직원의 말에 모두의 웃음이 터졌다. 끄덕이며 크게 공감한 태강애드 직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래 명도혁 대표님이 태강애드 직원이었다고 들었는데 큰일 날 뻔했네요. 태강에 계속 계셨으면 제 출셋길이 완전히 막혔을 거 아닙니까?”
“명도혁 대표는 누구 밑에서 일할 그릇이 아니야. 내가 아주 잘 알지.”
광고공사 지사장이 아는 척을 했다.
“내가 거, 명 대표 태강애드에서 인턴 할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는데 보통 인물이 아니야. 세계 시장에서 한자리할 거라고 확신했었다니까?”
“흠, 인턴 때 말씀이세요?”
“그럼 그럼. 워낙 그때부터 탁월했어.”
사실 족구를 한 게임 함께했을 뿐이었지만, 스포츠를 함께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말이다. 지사장은 도혁과 족구 하던 때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DW 애드 갈수록 기대되는구만.”
“어! 잠시만요. 다시 소재가 나오고 있어요. 저게 끝이 아닌데요?”
십 분 뒤. 다시 이어진 LVNN의 광고를 보며 한 남자가 소리쳤다.
화면에서는 동아시아에서만 방영하는 DW애드 코리아의 작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탁기준의 동양풍 광고였다.
[삶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철학적 사유와 함께 펼쳐진 몽환적 비주얼에 모두 말을 잇지 못하고 광고에 집중했다.
이윽고 20초의 짧은 광고가 끝나고 멍청하게 화면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광고공사 지사장이 크게 숨을 뱉었다.
“허, 이거 DW애드에서 아주 작정을 했구만.”
“혹시 저희 말씀이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한수철이었다. 곧 한수철에게 폭풍처럼 질문이 쏟아졌다.
“저 소재는 한국에만 나오는 거예요? 아니지 동아시아 3국 대상인가요?”
“철학적 메타포에 대한 아이디어는 누가 먼저 낸 겁니까?”
“LVNN이랑은 처음에 어떻게 접촉했어요? 모니카 실물 직접 보신 거예요?”
대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동시다발적인 질문에 한수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한수철은 그날 밤 공사 매체 담당들에게 잡혀서 술까지 사고 말았다.
* * *
“오늘이야말로 LVNN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날이구만. 모니카가 협조를 제대로 안 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샤워를 마친 브레드가 샴페인을 가져왔다.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댄 채 샴페인을 열어 잔에 콸콸 부었다. 스파클링이 경쾌하게 터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활짝 창문을 열어젖혔다.
“밤공기가 아주 시원하구만.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스텔라 왜 가만있는 거야.”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길한 예감이 날카롭게 명치를 스쳐 갔다.
“모니카한테 이중 계약 시비를 왜 아직도 안 거는 건가? 가만있을 스텔라가 아니잖아.”
미리 터뜨린 샴페인 잔을 가만히 노려보던 브레드의 뇌리에 불안한 생각이 스쳐 갔다. 뒤통수칠 생각에 눈이 멀어 들뜬 마음이었는데 너무 조용한 LVNN의 반응이 이상했던 것이다.
“고렌느 광고에 모니카를 보면 바로 시비 걸어 올 줄 알았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 벌써 소송 중인가?”
브레드가 즉시 핸드폰을 꺼내 모니카의 번호를 눌렀다. 긴 신호음이 울렸지만 상대편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연거푸 전화를 걸던 브레드가 비서를 호출했다.
“거, 모니카 관련해서 이중 계약 소송 있는지 알아봐. 그리고 지금 어딨는지도 파악하고. 당장! 어!! 저게 뭐야!”
막, 모니카의 소송 건에 대해 알아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띠릭, 두두두둥
밤 12시 정각. 암전된 화면에서 묘한 현의 울림과 낮은 북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베일에 싸여 있던 LVNN의 광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툭.
멍청하게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던 브레드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쉣! 스텔라 이 늙은 여우 같은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동양풍이라더니, 아니, 동양풍은 맞긴 한데.”
충격적인 비주얼에 동공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한편의 광고가 끝나고 다시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이었다.
“뭐야 이거. 연작인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청하게 TV 화면만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브레드는 어느 곳에도 전화를 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