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14화
“십 년입니다. 선배.”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십 년 뒤에 선배가 오늘 나한테 크게 감사할 거란 말이에요. 저 화가 크게 될 거거든요.”
도혁이 실감 나지 않는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태오가 그걸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림이 독특하네. 솔직히 겁나 좋은데, 저 도미니크라는 놈이 십 년 뒤에 성공할 거라고 어떻게 자신하는 거야?”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확신합니다. 분명히 잘될 거예요.”
“올~ 그렇게만 되면 우리 부자 되는 거 아니냐? 제발, 플리이즈. 이게 몇 장이냐. 우와. 천만 원씩만 가도 춤을 추겠네.”
천만 원이라니요. 유명 화가의 습작이라고요. 그것도 초기 한정판, 심지어 화풍도 어느 정도 괜찮게 자리 잡은 그림들이었다.
이 스케치북 두 권으로 이미 미국행은 성공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도혁은 비실비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사무실로 향했다.
[세계적 거장 도미니크 밀러. 십 년 전 TT자동차 벽화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져.]
[DW애드 코리아 도미니크와의 각별한 인연. 뉴욕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TT자동차와 도미니크, 콜라보 프로젝트 발표.]
[도미니크 특별전, 후원과 헌정으로 맺어진 TT자동차와의 오랜 우정.]
노트북을 열자마자 보도 자료부터 작성하기 시작했다. 몇 년 뒤에 써먹을지 모르지만 도미니크가 뜨면 바로 내보낼 미래의 기사들이었다.
“TT자동차 계 탔구만. 도미니크가 그림 그려줘, 광고 회사 대표가 십 년 뒤에 쓸 보도 자료도 적어줘.”
“뭐라고 중얼거리고 계신 거예요?”
최민아가 회의실로 들어오며 의아한 눈길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강 국장님하고 다니시더니 옮으신 거예요?”
“뭘 옮아? 강 국장님 감기 걸리셨냐?”
“아니, 중얼중얼병이요. 그거 한동안 직원들이 전염돼서 제작국 전체가 시끄러웠다고요.”
“흠, 그래? 중얼거리면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나 보지?”
“뭐라도 해보려고 부적처럼 국장님 따라 한 거긴 한데, 정말 뭘 그렇게 중얼거리세요?”
최민아가 기사를 훔쳐보려고 하자 얼른 가렸다.
“이건 천기누설이야. 많이 알면 다쳐.”
“다쳐도 좋으니까 좀 봐요. 가리니까 더 궁금하네.”
“그런 게 있어. 아, 우리 최 팀장도 그림 한 장 가져갈래? 저기 차 국장님도 오시네. 스케치북에 있는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거 한 장씩 찢어 가시죠.”
슬렁슬렁 넘겨보던 차현우와 최민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오! 어디서 난 거야? 진짜 가져도 되는 거?”
“네. 마음 변하기 전에 가져가시라고요. 딱 한 장씩만!”
“그림 되게 괜찮은데요? 차 국장님, 이 스케치 느낌 있지 않아요?”
“내 눈엔 제법 괜찮아. 신예 디자이너인가?”
둘이 사이좋게 그림을 나눠 가지고 흐뭇하게 품속에 집어넣었다.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 부적처럼 잘 보관하시면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만.”
도혁은 마치 보너스를 지급한 것과 같이 넉넉한 마음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그럼 최종 기획안 컨펌해 볼까요?”
미래의 통장을 생각하며 가슴 한편이 든든해지는 오후의 회의실이었다.
* * *
“헐!! 저게 무슨 일이야. 벽에 자동차가 박혔어.”
“그림이었어? 아니, 실사인가? 너무 입체감 있어서 진짜인 줄. 와!”
뉴욕 외곽 여기저기 커다란 광고판이 붙었다.
첫 번째는 그림을 실사화해 표현한 광고였고, 두 번째는 조형물로 튀어나온 입체감을 주어 자동차가 벽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모습을 그대로 살렸다.
마지막으로 뉴욕 거리의 한쪽에서 TT자동차의 광고를 그리는 이른바 ‘벽화 프로젝트’가 실시되고 있었다.
세 광고의 반응과 화제성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특히 참여할 작가를 온라인에서 모집한 벽화 프로젝트에 대한 시민사회와 지역 언론의 관심이 굉장히 높았다. 연일 소비자 친화적인 캠페인이라는 둥, 거리의 화가가 작품을 만든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뉴욕의 거리에 펼쳐진 신기하고 기발한 광고에 대한 뉴욕 시민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젊은 층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미쳤구만. 와, TT자동차는 벽도 뚫을 정도로 튼튼하다? 그런 말이 하고 싶었던 건가?”
“헐, 어지럽네. TT가 저 정도였냐?”
“몰랐어? 저긴 안정성 빼면 시체야. 교통사고 동영상들 안 봤구나.”
커뮤니티를 타고 TT자동차의 안정성을 인증하는 교통사고 영상까지 돌고 있었다. 사고 시 다른 차량과 달리 TT의 차체는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소비자들이 긍정적 여론을 조성하며 바이럴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TT자동차 교통사고 인증.
고속도로 추돌 사고였는데 우리 차만 멀쩡해서 우리도 놀랄 지경이었어요.
ㄴ헐 미친. 앞의 차 찌그러지는 거 좀 봐.
ㄴ너무 찌그러져서 무슨 차인지도 안 보이네. 브랜드도 가렸고.
ㄴ아 ㅅㅂ 혐짤 표시 좀.
ㄴ딱히 혐오는 아니지만 수정했습니다.
ㄴ찌그러진 자동차가 혐짤이지. 저기 탔다고 생각해 봐라. 으.
ㄴ다행히 운전자는 구조됐어요. 하지만 정말 끔찍하네요.
ㄴ이래서 벽 뚫는 광고가 나왔구만. 이제 이해했어
ㄴ윗댓 반응 느리시네요…….
ㄴ헐, 나 왜 이 영상 지금 봤지? TT 노관심이었는데 저 SUV모델 이름이?
커뮤니티의 반응을 타고 옥외광고와 벽화 프로젝트가 널리널리 퍼져 나갔다.
반면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조금 놀라셨다. 거리를 지나던 할머니가 굽었던 허리를 펴며 손자에게 물었다.
“에그머니, 저기 저게 뭐야. 교통사고 난 것이여? 공중에서 저게 뭔 조화람.”
“네? 할머니, 하하, 광고예요. 자동차가 벽을 이긴다는 뜻이라고요.”
“아, 툭 튀어나온 게 벽에 걸려 있으니 진짜 사고 나서 벽에 박힌 줄 알았지 뭐야, 어우.”
“TT자동차 사장이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헷갈릴 만큼 잘 만들긴 했어요.”
그 시각, 손자의 말처럼 TT자동차 뉴욕 지사장이 진심을 다해 웃고 있었다.
“하하, 아주 좋아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카피 한 줄 없이 너무 파격적인 비주얼이라 걱정했는데 제법 괜찮은 반응이라 다행입니다.”
“제법이라니요. 말씀하신 대로 카피 한 줄 없이 뉴욕을 뒤집어놓으셨는데요. 하하.”
TT 지사장이 한 번 더 호탕하게 웃어젖히곤 말을 이었다.
“광고 걸린 거 보고 나도 놀랐어요. 내가 기획안 컨펌하면서 알고 있었는데도 보는 순간 헉, 숨이 막히더라니까요.”
“직관적이라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럼요! 당연히 칭찬이지요. 대만족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광고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역시 젊은 타깃의 반응입니다.”
“네. 그동안 가족이 있는 중년층에 비해 매출과 반응이 아쉬웠던 게 사실인데 젊은 친구들이 이번 광고에 관심을 많이 보이더라구요.”
“맞아요. 뉴욕의 명소처럼 되어버렸어요. 젊은이들이 우리 광고 사진까지 찍어서 커뮤니티에 올리고 난리더라니까요.”
“아무래도 파격적이고 독특한 점이 어린 친구들에게 어필한 것 같습니다.”
막 미국 내에서 SNS가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신생 SNS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TT 광고가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 신기하고 튀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까? 우리 아들도 우리 회사에 관심이 전혀 없더니 이번 광고는 눈여겨봤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가족 캠페인만 주야장천해서 별로였대요. 드디어 광고 같은 광고 나와서 친구들도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군요.”
“미국 내 TT 광고가 가족 친화에 올인한 면이 있습니다.”
“맞아요. 이미지 쇄신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한 방에 해결되다니요. 하하.”
“그래도 그동안 쌓은 이미지가 있어서 오히려 이번 캠페인에서 반전이 먹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TT 뉴욕지사의 전 광고대행사에 감사해야겠는데요?”
도혁의 말에 지사장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명 대표님은 뭐, 그분께 고마워하세요. 저는 DW애드 코리아에 감사하겠습니다. 그동안 모델료가 너무 들어서 아주 힘들었다구요.”
“아, 헐리웃 배우 부부를 쓰셨죠?”
“맞아요. 부부가 아이들까지 출연시키기를 희망해서 몇 년간 들이부은 모델비가 얼마인지 몰라요. 또 경쟁사에서 한동안 유명 모델을 계속 출연시키는 바람에 디펜스 차원에서 모델을 안 쓸 수도 없고, 아주 속이 쓰렸죠. 이번 광고는 특히 모델료가 한 푼도 안 들지 않았습니까? 엄청난 비용 절감에 매출도 반응이 오고 있어서 본사에서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참, 벽화가 곧 완성될 거 같습니다. 거리의 화가들은 손이 빠르거든요.”
“네. 계속 애써주세요. 우리 TT 입장에서는 천지창조보다 귀한 그림입니다. 하하.”
끝까지 귀에 걸린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고 지사장이 도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 계속 가는 겁니다. 이 멤버 끝까지. 아시겠지요?”
이 멤버 포에버를 주창하며 지사장이 악수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도혁은 지사장과 작별을 고하고 천지창조의 현장에 직접 가보기로 했다.
현장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취재진이 모여 있었고 주변을 둘러싸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았다. 역시 도미니크의 그림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혼자 거리에서 초상화나 그릴 때와 달리 다른 화가들과 함께하는 작업에서 독특한 그의 화풍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걸 기회로 화단에서 인정받는 시기가 좀 빨라지면 좋겠다. 죽기 전에 빛을 봐야지, 죽고 난 뒤에 무슨 소용이야. 회귀라도 하면 모를까.’
도혁은 속으로 기원하며 멀찌감치 벽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꼬마가 다가와 등을 툭툭 쳤다.
“저기, 아저씨. 거기 서 계시면 뜨거워요.”
“아! 맨홀이 있었구나. 연기가 계속 나오네.”
“네. 좀 있으면 더 뜨거운 김이 나올 거예요.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벽화에 집중하느라 바닥을 보지 못했는데 연기를 뿜고 있는 맨홀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도혁이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꼬마야, 고맙다. 보답을 하고 싶은데 뭐 좋아하니. 아저씨가 지금 여기 카페 트럭에서 커피 사려고 하는데 먹고 싶은 거 사 줄게.”
“흠, 정말 사 주시는 거예요?”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코코아를 가리켰다.
“저 코코아 먹고 싶어요. 연기가 폴폴 나는 코코아요.”
“연기가 나는, 코코아?”
“네네! 이 트럭 코코아 정말 맛있어요. 거품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거든요.”
꼬마 아이의 말에 머리를 툭 얻어맞은 듯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쳐 갔다.
코코아, 코코아라. 연기. 구름 위를 걷는다…… 흠.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돈하며 도혁이 성큼성큼 카페 트럭에 다가가 주문을 했다.
“커피, 아니, 코코아 다섯 잔 주세요.”
태어나서 내 돈으로 처음 사보는 코코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