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13화
도혁이 화이트보드 위에 매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커다란 벽면이라고 생각하고 보세요. 가로로 긴 벽을 자동차가 파먹어가면서 지나가는 거죠. 그 길을 따라 부서진 벽면을 표현하는 겁니다.”
“헉! 벽보다 단단한 자동차?”
“맞습니다. 속도감도 함께 나타낼 수 있어요. 뉴욕 외곽엔 다양한 벽이 많으니 차체만큼 크지는 않아도 제법 큰 사이즈로 구현할 수 있을 겁니다.”
커다란 화면 위에 단단하게 생긴 SUV 자동차가 벽을 갉아먹다시피 뜯으며 파헤쳐 가는 그림이었다. 대충 그림을 완성한 도혁이 매직을 귀 뒤에 꽂곤 아쉬워했다.
“아, 진우. 이 자식 그립네. 이 팀장이 있었으면 머릿속에 있는 거 그대로 그려줬을 텐데.”
“대표님도 입으로 잘 그리셨어요. 무슨 말인지 알긴 알겠다구요.”
최민아가 장난스레 웃음기를 머금었다.
“어쩜 우리 조카보다 못 그리시네요. 웃기긴 해요.”
“내가 봐도 참, 아무튼 다들 알아들으시긴 한 거죠?”
도혁이 두 국장을 보며 묻자 심각해진 표정의 둘이 동시에 끄덕였다.
“이거 아이디어는 TT자동차 컨셉과 딱인데 어떻게 구현할지가 관건이야.”
“맞아. 안정성, 속도감, 이보다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없지. 다만, 실사로 할 건가, 그림으로 할 것인가. 그림으로 한다면 어떤 느낌으로 그려낼 것인가, 고민이 되는구만.”
“흠, 꼭 제 아이디어로 진행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가져오신 러프한 시안들, 거의 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광고주에게 A, B, C, D 안을 주고 고르라고 하고 싶을 만큼요.”
진심으로 괜찮은 시안들이었다. 특히 강태오의 친환경 자동차는 TT에서 채택하지 않으면 다른 광고주에게 제안하고 싶을 정도로 탐났다.
그린 캠페인과 같은 시류를 반영한 공익광고는 공모전에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차현우가 컨셉에 관해 말을 꺼냈다.
“나도 시안들은 모두 마음에 들지만 광고주에게 제안할 캠페인은 컨셉이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점에서 기획 방향을 어떻게 잡고 들어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게 맞다고 봐.”
“명 대표의 ‘벽 뚫는 자동차’와 최 팀장의 ‘코뿔소’ 안은 TT의 최대 강점인 튼튼한 내구성과 안정성을 강조했지. 아주 직관적이고 조금은 충격적인 방식으로.”
“맞아요. 강 국장님은 신사업인 친환경 자동차를, 차 국장님은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글로벌 최강 기업이라는 위상을 강조했습니다.”
“컨셉적으로는 안정성 쪽으로 들이미는 게 무난하긴 해.”
차현우가 도혁의 말을 받아 강조했다.
“그렇기는 합니다. 친환경은 아주 신생 사업이라 당장 무언가를 홍보할 정도의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기 어려울 거예요.”
“시장을 내려다보는 컨셉도 괜찮기는 한데, 흠.”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도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석대로 기획안부터 시작해서 컨셉 잡고 아이디어 도출할 걸 그랬나요. 컨셉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했어야 했나 약간 후회 중입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선수끼리 그냥 쭉쭉 가는 게 낫지 않아? TT는 우리가 시장분석 할 만큼 했었던 광고주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만.”
“그래야 다양한 아이디어도 나오고 그러는 거지.”
강태오가 TT의 작은 자동차를 공중에 높이 띄웠다가 잡았다.
“난 명 대표 아이디어에 한 표. 뉴욕에서만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엠비언트 광고(주변 환경을 활용한 광고)가 탄생할 것 같아. 서울에서는 어림없잖아? 엄청나게 가로로 긴 벽이 없을뿐더러 거기다 그림을 그린다는 게 쉽지 않으니까.”
“나도. 듣자마자 굉장히 직관적으로 와닿았어.”
“저도요. 진짜 옥외다운 옥외광고가 될 거 같아요. 다만…….”
최민아는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찬성을 표하면서도 걱정 서린 눈빛이었다.
“이 팀장님 데려와요. 입체감 있게 정말 튀어나올 것처럼 그려낼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그 느낌을 살려야 하는데 말이지.”
“잠깐만. 진우 팀장한테 한 장 그려서 보내라고 하면 어때?”
“그림이 그렇게 뚝딱 나오는 걸까요.”
“그러니 그림쟁이지. 이 사람들 예전에 동아리 방에서 콘티만 그려대던 이진우를 잊어버린 거야?”
“오, 그랬었지.”
사실 그 당시 공모전을 휩쓸었던 애드포인트의 가장 큰 비결이 이진우의 콘티였다. 정말 지문이 닳도록 그려댔었지.
“그때야 어리고 멋모르고 일도 없었을 때지만 지금은 우리도 없는데 CF 찍느라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텐데요.”
“그래도 어떻게든 그려낼걸? 진우라면 하고 싶어 할 거야. 그 자식 그림 그리고 싶어서 손가락이 간질간질할 텐데 신이 나서 그릴걸?”
“오호. 그럼 일단 말이라도 해볼까요?”
마블 느낌이 물씬 나는 이진우의 그림은 미국 쪽에 가까웠다. 그 독특한 느낌 때문에 공모전뿐 아니라 창업한 후 규모가 작을 때 크게 도움이 됐었다.
“아직 한국은 새벽이니까 메일로 보내놓을게요. 잘 진행되면 좋을 텐데요.”
-띠릭.
놀랍게도 금세 답장이 도착했다.
“뭐야, 이 자식 안 자냐?”
바로 국제전화를 연결한 도혁이 이진우를 구박했다.
“이 팀장. 잠을 자야 일을 하지. 왜 이 시간에 메일을 받고 그러냐.”
-대표님!!!!
“진우야, 안 피곤하냐? 내일 출근 어떻게 하려고 아직도 안 자.”
-아, 충분히 잤습니다. 일찍 일어난 거라서요. 대표님이 미라클 모닝 하시는 거 보고 감동받아서 저도 아침형 인간을 실천 중입니다! 대표님, 정말 반갑습니다!
“오! 아주 좋은데? 그래, 일어나서 뭐 하고 있었어.”
-그림 그리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그린 그림을 모아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 꿈입니다.
“좋아. 아주 좋아 역시 진우다.”
-그래서 말인데 그 메일에 있는 그림 꼭 그려보고 싶습니다. 채색까지 제대로 하면 프린트를 통해 벽화로 구현할 수 있을 겁니다.
“오호!”
갑자기 머릿속에 짧은 아이디어가 스쳐 갔다.
“그라피티와 벽화 그리는 친구들 인터넷으로 소집해서 그림 그리는 과정을 캠페인처럼 보여주는 건 어떨까. 홈페이지를 통해서 말이지.”
-오! 그거 너무 좋은데요? 예술적인 느낌도 나고. 어차피 옥외를 여러 군데서 진행하니까 한 군데는 정말 벽화 프로젝트를 실행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역시 대표님이십니다!
“오글거리는 칭찬 들으니까 이 팀장이랑 이 시간에 통화하는 게 실감 난다. 아무튼 잘 부탁해! 초안 나오면 보내주고!”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 건강 조심하세요!
소란하면서도 반가웠던 이진우와의 통화가 끝나고 직원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캠페인 완성되면 되게 괜찮을 거 같아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요?”
“맞아. 충격적인 비주얼, 거기다 방금 명 대표가 말한 퍼포먼스를 곁들이면 작품 하나 나올 것 같아.”
“그러취! 명 대표 그림 위에 이 팀장의 그림을 덧대어 생각하니까 감이 팍팍 오잖아. 안 그래?”
“대작의 스멜이 몰려오는데요?”
그리고 곧 뉴욕팀은 세계를 흔들어놓을 대작을 만나게 되었다.
* * *
“잠깐만. 도미니크 밀러? 벽화 지원자 중에 도미니크 밀러가 있다고?”
TT자동차의 광고주 컨펌을 마치고 벽화 프로젝트의 지원자를 확인하던 도혁이 놀라 펜을 떨어뜨렸다.
뉴욕 거리의 빈민가에서 초상화로 시작해 21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이 될 도미니크 밀러. 설마 동명이인이겠지. 아닌가? 아직은 빈민가를 떠돌 때인가?
확인을 해봐야겠다. 이건 못 참지. 도혁이 벌떡 일어나 강태오를 잡아끌었다.
“저하고 같이 가보실 데가 있습니다.”
그렇게 둘이 할렘가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전설의 125번가에 선 두 남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도혁은 전생에도 하렘에 온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뉴욕을 관광으로 왔을 때였다.
그땐 흑인 문화를 전파하고 신선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관광 지구로 변모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미래의 일이고.
아직은 할렘가 본연의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우범 지역이었다.
“좋은데 데려오는 줄 알았더니. 하렘이 아니라 왜 할렘이냐.”
“실없는 농담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동양인이 거의 없는 거리에서 흑인들이 힐긋힐긋 그들을 바라보며 지나갔다. 약간의 조소를 보내는 이도 있었고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근데 여기는 왜 온 거야?”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이번 벽화 지원자 중에, 도미니크라고…….”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도혁의 눈에 스무 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스쳤다.
이젤을 대충 설치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와, 씨. 진짜였구나. 제가 팬이었습니다. 아니, 팬이 될 겁니다!
도혁이 속으로 말을 삼키며 자석에 끌린 듯 그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혹시, 도미니크 밀러 씨 맞나요?”
“그런데요. 요 맨, 은 누구?”
흑인 특유의 억양을 섞어 인사를 건네며 도미니크가 도혁을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도혁이 명함을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TT자동차 벽화 프로젝트에 지원하셨죠? 그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는 회사에서 왔습니다.”
“와우, 반갑네요. 나 붙은 건가요?”
“그럼요. 당연히.”
“잘됐네요. 거, 페이나 좀 넉넉히 챙겨주쇼.”
툭, 붓을 페인트통 속에 넣은 미래의 거장이 손을 툭툭 털었다. 저도 모르게 그가 그리던 화폭에 눈길이 향했다.
선이 굵으면서도 독특한 화풍, 선명한 색감. 흑인의 일상을 담은 평범한 소재 위로 도미니크 특유의 색깔이 묻어났다.
초기작은 이런 느낌이었구나. 가슴이 웅장해졌다.
도혁은 홀린 듯 그림을 바라보다 도미니크에게 제안했다.
“이 그림 파실 생각 없으십니까?”
“엥? 그냥 습작인데요? 가지려면 그냥 가져가요.”
헉, 이런 통 큰 남자를 봤나. 이러니 돈을 못 벌고 죽었구만.
요절했던 도미니크는 생전엔 거의 빛을 보지 못한 작가였다. 사후에 가치를 인정받아 경매시장에서 수백억에 거래되었다. 흔한 비운의 예술가이지만 인연이 닿은 만큼 가슴이 아려왔다.
그의 해진 옷과 신발이 눈에 들어와 속이 상했다. 도혁이 지갑 속 달러를 모두 털어 봉투에 담은 후 도미니크에게 내밀었다.
“꼭 벽화 프로젝트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이 그림은 제가 사 가겠습니다.”
“뭐 그러쇼. 준다는데도 사 간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가져가쇼.”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도미니크가 바이바이를 외치며 한 손을 높이 들어 휘저었다. 그러곤 무심코 봉투를 열어보다가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저기, 저기 잠시만요! 아저씨! 거기 사장!”
“네?”
돌아본 도혁을 보고 도미니크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거 가짜 돈이요? 내가 태어나서 본 달러 중에 제일 많아.”
“명함 내밀면서 가짜 달러 드리지 않으니 안심하고 쓰십시오.”
“헐! 대박! 대에박! 오마이갓!!!”
오마이갓을 외친 도미니크가 신이 나서 방방 뛰더니 도혁의 눈이 튀어나올 법한 짓을 했다.
“여기 스케치북 통째로 가져가쇼. 옆에 분도 하나 드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