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66화
칸 광고제는 비싸다.
광고제 기간에 모든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는 프리패스를 구매해 이용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세금을 포함해 인당 수백만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마케터들의 축제답게 광고제 역시 장사인지라 이 가격에 걸맞은 셀링 포인트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강연자의 인지도였다.
멀찌감치 헐리우드 스타 킹베리가 강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혁의 강연을 돕기 위해 따라온 한수철이 혀를 내둘렀다.
“이야, 킹베리 다음이 명 대표인 건가? 와,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다.”
“나는 어떻겠어. 저쪽에 혹시 유엔 사무총장님인가? 미쳤구만.”
유명 인사가 한둘이 아니라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휴우, 유엔 사무총장부터 래퍼에 배우, 엇 저기 수영 선수 맞지? 올림픽 8관왕. 칸도 너무 하네. 흥행도 좋지만 수영은 너무 거리가 멀지 않아?”
“작년에 펠리스 선수가 찍은 광고가 몇 갠데. 연관성이야 만들기 나름 아니겠어?”
“와, 이런 사람들이랑 한 무대라니, 떨리겠다, 명 대표…….”
입으로는 도혁을 걱정하면서도 한수철의 시선은 배우 킹베리에게 꽂혀 있었다.
식순을 보고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강연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더불어 저들과 함께 한 섹션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웅장해졌다.
‘광고인의 축제니까 꿀릴 거 없지. 콘텐츠로 승부한다.’
대기실에서 시나리오를 점검하며 최종 마무리를 하는 도혁의 이름이 드디어 호명되었다.
“세계를 이끌 동양의 젊은 크리에이터. 명도혁 대표를 소개합니다.”
심호흡한 도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매끄럽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자신과 한국을 동시에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온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DW애드 코리아의 대표이자 크리에이터입니다. 오늘은 우리 회사에서 노미네이트한 작품의 사전 시사와 함께 광고에 관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박수가 쏟아지고 어둑한 실내 위로 푸른 빛의 조명이 드리웠다.
영어로 강연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프랑스어로도 동시에 통역되고 있었다.
프랑스어 인사까지 끝나자 도혁이 실내를 여유롭게 돌아보며 강연을 시작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들어보지 못한 분도 계실 겁니다. 동아시아에 위치한 작은 나라이죠.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전쟁을 치른 지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구요. 또한 축구를 잘합니다.”
이 당시 유럽에서 한국은 크게 알려진 국가가 아니었다.
도혁이 농담처럼 축구 얘기를 던졌지만 월드컵 본선에 올라오는 동양의 작은 나라 정도로 인식하던 때였다.
“이렇게 영토가 작을 뿐 아니라 전쟁까지 치른 나라는 세계 강국을 향해 미친 속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앞서 첫 소개에서 가장 부지런하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전 세계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만 저희는 놀 때조차도 부지런합니다. 아마 유럽에서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렌트카 기름이 닳도록 돌아다니는 여행객이 있다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할 겁니다.”
좌중에 웃음이 터지고 도혁이 잠깐 여유를 두었다.
그러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국인은 이 부지런한 특징을 바탕으로 ‘빨리빨리’라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생산도 소비 역시 빨리합니다. 트렌드가 엄청난 속도로 급변한다는 겁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광고인일 텐데 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광고 지옥에서 왔다는 소립니다.”
‘압축 대한민국’이라는 아이콘이 화면에 커다랗게 나오고 그 압축 파일을 클릭하자 한국을 광고하는 영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에서는 전쟁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오십여 년의 시간 동안 변해온 대한민국 광고의 흐름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한국은 유럽이 몇백 년에 걸쳐서 해온 성장과 문화의 발전을 압축해서 진행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런던에 지하철이 들어올 당시에 조선은 소가 농사를 짓고 있었으니까요. 현재의 한국은 보시다시피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잠깐 말을 끊은 도혁이 관객들과 하나둘 시선을 맞추었다.
“대한민국 광고의 역사는 짧고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저 역시 한 수 배워간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칸 광고제에 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만들어낸 크리에이티브의 퀄리티만큼은 자부합니다. 급변하는 트렌드 속에서 매일 엄청난 경쟁을 뚫고 절박하게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광고부터 보시죠.”
강태오가 만들었던 시안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시리도록 푸른 빛의 배경. 이른 새벽의 어두우면서도 푸릇한 분위기를 품은 색감이 선뜻했다.
색은 힘이 세다. 톤은 더욱 그렇다.
국제광고제, 특히 칸의 취향에 맞춰낸 강렬하면서도 세련된 톤의 화면이 펼쳐지자 여기저기서 짧은 탄식이 터졌다.
도혁이 화면 쪽으로 몸을 틀어 멈춘 광고를 재생했다.
기존의 인쇄 광고물이었던 강태오의 시안을 영상으로 만들었다.
밤새 술을 마신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차 문을 열어젖혔다.
한 손엔 여전히 보드카 병을 든 채였다.
조금 망설이다가 운전대를 잡은 남자.
창문을 내리며 새벽의 공기를 맞는다.
푸릇한 새벽의 배경과 대조적으로 핏빛의 붉은 술병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전방 주시를 놓친다.
순간 끼이익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고 남자의 술병에서 붉은 피가 쏟아지며 남자의 얼굴과 몸, 그리고 차 안에서 사정없이 튀어 핏자국을 만든다.
술병에서 사방으로 튀어가는 핏방울이 직관적으로 끔찍한 사고를 예고하고 남자 역시 몸이 크게 튕기며 운전대 앞으로 쓰러지며 정신을 잃는다.
멀리 검푸른 하늘 사이에서 붉은빛을 품은 새벽의 해가 떠오르기 직전. 섬뜩한 색감의 사이로 남자가 사고를 낸 차량에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난다.
툭, 열린 차 안에서 팔이 뜯어진 곰 인형이 떨어진다.
[If U Drink, Drive or Live?]
짧은 카피 한 줄이 건조하게 펼쳐지고 나지막이 싸이렌이 울리며 화면이 페이드 아웃된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도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충격적인 색감과 메시지를 담은 영상에 아이를 암시하는 감성 소구를 더했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얼핏 봐서 잘못 본 걸 수도 있습니다만.”
어느 결에 관객석에 앉아 있던 피에르가 손을 들었다.
도혁이 끄덕이자 진행 요원이 빠르게 마이크를 피에르에게 전달했다.
“사고를 낸 남자의 차 안에 곰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음주 운전이 자신의 아이, 혹은 제 아이와 비슷한 연령의 어린이를 죽일 수도 있다는 디테일을 숨겨놓은 것이 맞습니다.”
“어허, 끔찍하군요.”
아이의 죽음은 섬뜩한 암시이자 약간은 금기시되어 있는 메시지이기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고 숨겨두었다.
찰나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피에르의 예리함에 도혁은 감탄했다.
“메시지를 감추어두는 것은 무의식을 자극합니다. 색감의 대조를 통한 효과와 더불어 서브 메시지로 메인 메시지의 극렬한 전달을 추구했습니다.”
“흐음. 그렇군.”
깐깐한 피에르의 입에서 짧은 침음성이 흘렀다.
주변에서는 갑자기 끼어든 피에르를 보고 찌푸리며 웅성거렸다.
도혁은 질문자인 피에르에게 가볍게 묵례하곤 다음 노미네이트 작품으로 넘어갔다.
“이번에 보여 드릴 광고는 인쇄 광고입니다. 세계적인 수제 햄버거 전문 프랜차이즈인 빅시버거에 제안할 이번 캠페인은 아주 간결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 장의 시안 함께 보시겠습니다.”
처음 최민아 팀에서 만들었던 빅시버거 시안 사진을 그대로 따왔다.
빅시버거 특유의 대형 간판 위로 연기가 나며 화염이 번져가고 있는 기사 사진.
분주하게 화재 현장을 진압하고 있는 소방관들의 모습이다.
하단에 한 줄 걸쳐져 있는 카피라인엔 캘리포니아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빅시버거에서 일어났던 사고 지역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Grilled Only, Vicy.]
짧고 간결한 한 줄의 카피가 인장처럼 찍혀 있다.
도혁이 다시 입을 떼기도 전에 끄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제법 보였다.
몇몇은 감탄의 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마케터분들이다 보니 금방 이해하시는군요. 한국에는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를 행운으로 바꾼다는 말입니다. 저희가 빅시버거를 조사하던 중 여타의 프랜차이즈에 비해 화재 사고가 잦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착안하여 전화위복으로 발상을 전환해 보았습니다.”
도혁이 Grilled Only라는 글자를 포인터로 가리켰다.
“빅시버거는 후발 주자이지만 수제방식의 제조, 특히 직화 구이로 굽는 패티로 젊은 층의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릴로 직접 굽기에 화재의 위험이 가장 높다는 점에 착안하여 제품의 특장점을 강조했습니다.”
“디자이너는 놀았겠구만.”
피에르의 말에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비행기에서 하던 빌런 짓 다시 시작되는 건가?
도혁이 의아한 듯 바라보자 피에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머리를 쓰니까 디자이너가 할 일이 별로 없잖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화재 현장 사진을 조금 가공해서 썼거든요.”
“흠……. 인쇄 광고의 기본을 담은 좋은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시비를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짧게 호평을 뱉은 피에르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연거푸 끼어드는 피에르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함께 박수를 쳤다.
연이어 관객들과 주최 측의 호평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열리는 시사회나 세미나에 비해 한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데 사회자가 다가와 도혁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추가 담론은 앉아서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로운 질문과 대담, 그리고 토론이 이어질 예정이니 관객 여러분, 놓치지 마시고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유럽 광고계의 주요 인사들이 제법 참석했다.
토론에 약간의 부담을 느꼈지만 담담하게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파리에서 광고 만드는 피에르입니다. 오늘 인상적인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준 명도혁 씨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대담에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주최 측과 관객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발표 내내 툭툭 튀어나와 질문했던, 조금 독특한 광고인인 줄만 알았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베일에 싸여 있던 숨은 장인이 자신을 밝히며 관객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황한 주최 측에서 애써 침착하게 자리를 마련했다.
제작진이 분주하게 오가며 장내를 정돈하고 곧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사위를 울렸다.
“프랑스의 거장 크리에이터와 젊은 라이징 스타와의 만남이네요. 여러분 올해 가장 유력한 후보작을 낸 명도혁 대표와 피에르를 소개합니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며 칸의 해변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펑펑 폭죽이 터진 듯 호화롭게 빛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