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28화
“저게 뭐야? 세상에. 토마토?”
“키위도 같이 나오는데? 와! 색감 미쳤다.”
광화문 사거리. 거대한 광고판 위로 쏟아지는 색의 향연에 출근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웅성대며 옥외광고판에서 나오는 색색깔의 광고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브랜드명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ALL? AT텔레콤의 새 브랜드라고?”
“기존에 핸드폰 끄라던 그 AT텔레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네.”
“아! 10대 브랜드구나. 그런데 저 여자애 처음 보는 애네.”
같은 시각 TV에서 아침 드라마를 기다리며 청소기를 돌리던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멎었다.
“세상에 저게 광고야? 어머! 토마토를 왜!”
“에고, 우리 딸처럼 예쁘게도 생겼다. 근데 저게 뭐야? ALL?”
대한민국이 뒤집혔다.
과일의 색감으로, 신비한 모델로, 그리고 신규 브랜드 ALL로 말이다.
각 세대를 대표하는 모델들이 4가지 색깔의 과일을 맞고, 던지고 가지고 놀며 광고계를 함께 가지고 놀았다.
강렬한 색감과 메시지로만 이루어진 티저와 다름없는 광고였다.
그리고 AT텔레콤의 신규 브랜드 ALL은 통신사 론칭 이래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키며 고공 행진을 이어갔다.
주요 타깃인 십 대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ALL 그 여자애 누구임?
ㄴㅋㅋㅋㅋ완전 미친 광고ㅋㅋㅋㅋ어제 꿈에서 토마토 터짐 피 나는 줄.
ㄴ눈이 얼굴 절반이던데. 신비주의인지 뭔지 광고 말고 아무 데도 안 나옴ㄴ나 걔 알아. 우리 학교 다님ㄴ구라 까지 마세요.
ㄴ어???? 같은 학교 다닌다고?
ㄴㅂㅅ저걸 믿냐? 핸드폰 바꿔야 되는데 ALL이 AT 맞음?
언론에서도 파격적인 AT 광고를 집중 조명했다.
특히 신비주의 컨셉을 적용한 모델과 DW애드에 관심이 쏟아졌다.
[스물한 살의 ALL 세대, ‘AT로 부모님과 소통했죠.’]
[대한민국을 하나로 만든 AT텔레콤의 힘, ALL 캠페인으로 저력 과시.]
[ALL 캠페인 선보인 DW애드 코리아, 청년 기업의 힘.]
[AT텔레콤. ALL 브랜드 성공에 힘입어 주가 급등, 연중 최고 기록 달성.]
그리고 이 기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AT그룹 회장이 신문 속 AT 광고를 바라보며 입매를 씰룩였다.
포커페이스로 소문이 자자한 이 회장의 미소에 비서가 움찔했다.
“김 비서, 오늘 정례 브리핑은 준비됐나?”
“네.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오라고 해.”
AT 그룹 계열사별 분기 실적을 보고받는 브리핑이었다.
이 회장의 아들 삼 형제를 비롯해 계열사를 맡고 있는 대표들이 하나둘 회장실로 들어왔다.
그룹의 실세 중 실세, 극소수의 로열패밀리만 모이는 자리였다.
더불어 경쟁자들의 정례 성적표가 공개되는 각축전이기도 했다.
“그래, AT텔레콤 이현철이, 요즘 좋은 일 있다면서.”
“살펴주신 덕분에 제법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나. 대한민국을 뒤집어놨더구만. 조간신문에서 방금 ALL 광고 보고 오는 길이야.”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있어? 그룹의 핵심 사업인데. 안 그래?”
회장의 입에서 ‘핵심’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여럿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룹의 수장이 딱 잘라 그룹의 중심이라고 규정한 것 아닌가.
이현철 대표의 큰형이자 그룹의 장자인 AT화학 대표가 딴지를 걸어왔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아니겠습니까. 돈 퍼부어서 광고 노출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돈 쏟아붓는 거야 화학만 하겠습니까? 제가 형님 따라가려면 한 수 아니, 열 수는 더 배워야지요.”
팽팽하게 날을 세운 분위기에 회장이 한쪽 눈썹을 치켰다.
“그만들 치고받고, 빨리 실적이나 줘봐. 이 정도 떠들어댔으면 뭔가 나와야지.”
“네. 다행히 빈 수레는 아닙니다.”
이현철이 리모컨을 누르자 화면에 다양한 그래프가 떠올랐다.
가파르게 우상향으로 올라가는 꺾은 선 그래프의 향연을 본 회장이 의자에서 등을 떼어냈다.
“대충 사전 보고를 듣기는 했지만, 놀라워. 내 평생 사업했어도 이렇게 단기간에 저 정도 성장을 보는 건 처음이라고.”
“말씀 감사합니다. 매출만큼 브랜드 가치에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10대부터 60대까지에 걸친 ALL 브랜드와 AT텔레콤의 선호도 조사결과 화면이 이어졌다.
매출 그래프보다 두 배 가까이 급등한 주가 그래프까지 나오자 회장이 무릎을 탁 쳤다.
“우리 막내가 통신으로 간 지 얼마나 됐지?”
“삼 년 조금 넘었습니다.”
“끝내주는구만. 내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 회장의 눈초리가 AT화학 쪽을 향했다.
이어진 AT화학의 실적 발표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 회장의 혀 차는 소리만 회의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질타가 이어졌다.
“매출은 그렇다 치고, 브랜드 선호, 기업 이미지 조사 결과는 왜 안 넣었나?”
“저희 AT는 후발 주자인 데다가…… B to B 사업이 주류를…….”
“쓸데없는 소리. 내 예전부터 캠페인에 신경 좀 쓰라고 그렇게 강조를 했건만. 쯧쯧.”
“……네. 회장님.”
“힘들어도 아래 식구들 잘 다독이고. 다음 분기는 좀 낫겠지. 내 늙어서 성질 다 죽은 걸 다행으로 여겨. 한심한 놈.”
빈말이 아니라 불과 오 년 전만 해도 재떨이가 날아다니던 회의실이었다.
AT화학 대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형제간에 경쟁을 붙이려는 회장의 뜻에 따라 영광과 치욕의 순간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회의가 끝나고 이 회장이 자리를 뜨고서야 팽팽한 긴장이 느슨해졌다.
넥타이를 조금 내린 이현철의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래서, 캠페인 진행했던 광고대행사가 어디라고?”
회의에 참가했던 AT케이블 대표였다.
* * *
“AT케이블이요?”
도혁이 출근과 동시에 회의실에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어제 AT그룹 홍보실을 통해서 의뢰받았어요. 무려 텔레콤 이현철 대표님이 직접 소개해 주신 겁니다.”
“AT케이블이면 그, 텔레콤 이현철 대표 사촌 동생이 하는 곳인데.”
“네. 그룹 정기 회동에서 얘기가 나왔었나 봐요.”
최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ALL 캠페인의 소식을 추가로 전달했다.
“지금 그 ALL 소녀 때문에 난리 난 거 아시죠? 대한민국 광고판이 아주 엎어져 버렸어요.”
“AT그룹 홍보팀장 말로는 회장님께서도 그렇게 표현했다더라고. 광고판을 뒤집어놨다고 하셨대.”
“다들 궁금해 미치려고 해. 전 국민적 관심이 모여 있는데 모델 프로필은 없고.”
“그러라고 신비주의 전략으로 나간 거잖아요. 내가 그 모델이었으면 입이 간지러워서 벌써 발설했을 겁니다. 내가 ALL 모델이다!!”
황도준이 너스레를 떨며 부연했다.
“그리고 그 중년 모델 오디션 있잖아요. 그거 매년 개최하라고 AT텔레콤 홈페이지에 청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완전 폭발적인 반응입니다.”
“그래? 아주 좋은데?”
도혁이 다이어리를 펼치며 메모했다.
“매년 진행해도 좋겠고, 정기 행사로 컨펌 안 나면 이번 오디션의 후기를 받는 것도 좋겠어. 수기 형태로 공모해서 상도 주고. 왜, 커피 회사에서도 하고 있잖아요.”
“아! 커피 문학상이요?”
“그렇지. 우린 수필상으로 해서 이건 당장 진행합시다.”
“광고주도 지금은 우리 제안 무조건 수락할걸요?”
족족 파생 프로모션 아이디어가 나오고 탁기준이 추가 제안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자, 그럼 이건 탁 팀장님이 예쁘게 만들어주시고, AT케이블 얘기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제안서를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AT텔레콤 이현철 대표님이 직접 연결해 주신 건인 만큼 신경 많이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올려준 AT텔레콤 주식이 얼만데, 이 정돈 소개받아도 되지.”
“탁 팀장님 주식 샀구나.”
“당연하지. 캠페인 시작 전에 이미 냄새 맡고 영혼까지 끌어모았다고.”
“결혼한다고 돈도 많이 썼을 텐데, 영혼을 또 끌어모으셨다니 우리 인센티브 또 풀어야겠는데요?”
“크으. 역시 명 대표님!”
탁기준이 박수를 치며 도혁을 추어올렸다.
“자, 돈 복사하려면 AT 케이블 캠페인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일단 시장조사부터 해야겠네. AT 케이블이라면 현재 케이블 중에는 후발 주자일 텐데.”
“맞습니다. 지금은 그렇죠.”
AT텔레콤은 케이블 시대를 지나 오 년 안에 IP-TV의 선두 주자로 성장한다.
지금의 핸드폰 요금제 전쟁에 이은 2차 통신 전쟁으로 인터넷, 핸드폰, IP-TV 등을 묶은 결합 상품의 피 튀기는 경쟁이 곧 시작되는 것이다.
그 신호탄을 제대로 쏘아 올리기 위해선 케이블 시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도혁은 손가락으로 툭툭 테이블을 두드리며 회의를 주도해 갔다.
“현재로서는 사전 브리핑도 받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AT텔레콤처럼 우리에게 전권을 주고 자유롭게 제안서를 꾸며보라는 입장이라고 들었습니다.”
“기업 분위기가 프리한가 보지?”
“거기 회장님 유명하잖아요. 숫자만 본대요 숫자만. 어떻게 경영하든 실적만 나면 노 터치라고 들었습니다.”
“대신 제대로 못 하면 아들이든 와이프든 끽!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한대.”
탁기준이 손날로 목을 그어 보였다.
“섬뜩하네요. 으. 그러네. 최근에 장녀 쳐냈잖아요. 지금 제주도 어디 호텔에 보냈다고 기사에서 본 것 같아요.”
“한동안 언론이 집중 보도했었지.”
“자자, 아무튼 우리가 진행할 캠페인도 기획 노 터치에 실적만 볼 확률이 높으니 미리미리 준비합시다.”
도혁이 간단하게 업무 분장을 시작했다.
“기획팀에선 일단 시장조사부터 꼼꼼하게 들어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제작팀은 흠, 이건 순전히 내 감인데 좀 따뜻한 톤의 광고를 미리 찾아보면 좋겠어요. 휴머니즘.”
“휴머니즘이요? 케이블 TV인데요?”
“그냥 느낌이 좀 와서요. 소구점을 조금 감성적인 쪽으로 잡고 조사만 좀 해봅시다.”
“오케이.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사전 회의가 끝나고 커피 한 잔씩 타 들곤 자리로 돌아갔다.
탁기준이 머그잔에 각설탕을 잔뜩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혁이 슬쩍 다가가 힌트를 주었다.
“탁 팀장님. 그 AT텔레콤 주식 팔지 마세요.”
“오! 우리 명 대표도 주식 하는구만! 그래프 좀 보는 거?”
“그럼요. 웬만한 대기업 주식은 들고 있죠. 제가 미래를 좀 봐서 특별히 팀장님한테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올~ 근데 AT텔레콤은 더 못 올라요. 고층에 물린 개미가 워낙 많아서, 그 개미들이 성불을 해야 오르지. 오늘 팔려고 딱 대기 중이었어.”
“아니요. 성불이고 뭐고 한 삼 년만 묵히면 좋은 날 올 겁니다. 할 수 있으면 한 이십 년 들고 계시든지요.”
“뭐? 이십 년?”
“여유 되시면 사성전자도 같이 사시면 달달하실 겁니다.”
티스푼을 들고 있던 도혁이 머그잔에서 녹고 있는 설탕을 휘휘 저어주었다.
“우리 명 대표 정보 좀 있나 본데? 잠시 따로 나가볼까?”
“그럴 시간이 어딨습니까, 아무튼 저, 1차 인센티브 드렸습니다! 팔지 마세요!”
“잠깐만, 명 대표 더 말해주고 가야지! 어, 어디 가! 같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