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27화
AT텔레콤 중년 남성 모델 선발 대회가 개최되는 서울의 한 실내 체육관.
끝을 모르고 들어오는 참가자들의 행렬에 DW애드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지원자가 이렇게 많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서류 전형 봐서 추릴 걸 그랬어요.”
“아저씨들 아주 신났구만. 어휴, 저분은 아예 춤을 추면서 들어오시는 데요?”
“그런데 대표님. 우리 오늘 모델 뽑는 거 맞죠? 락 가수 오디션이 아니구요?”
황도준의 말에 도혁이 난감한 눈빛을 보냈다.
대한민국에 이렇게 락 매니아인 중년 남자가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더 웃긴 건 모델 오디션 대기 중에 모두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메인 카피인 ‘락 페스티벌’과 더없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전자 기타 소리에 고음을 지르는 참가자, 심지어 드럼까지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황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내 체육관 빌린 건 천운이네요. 스튜디오 같은 데서 오디션 진행했다가는 민원이 터져 나왔겠습니다.”
“그러니까. 한두 명 정도는 노래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저기, 대표님. 제가 진심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저 가죽 바지랑 라이더 재킷은 다 같이 맞춘 걸까요? 교복인 줄 알았습니다.”
“저 머리는 어떻고. 모두 같은 미용실에 다녀오신 건가?”
도혁과 황도준이 속닥거리는 가운데 이진우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대표님 덕분에 저는 지난 한 주 동안 잠을 거의 못 잤습니다.”
“왜 잠을 못 자고 그래. 그리고 그게 왜 나 때문이냐?”
“대표님이 우리 아버지한테 바람 넣으셨잖아요. 헤비메탈 바람.”
온라인 사업부의 투자를 약속한 날 이후 이우영이 퇴근만 하면 음악을 그렇게 틀어댔단다.
최근엔 전자 기타도 한정판으로 새로 뽑으셨다고.
이진우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아예 지하에 연습실을 만드시겠답니다. 저는 걸 그룹 SMS 좋아한단 말입니다!”
“우리 이우영 대표님 열정을 불태우시는구만. 시끄러우면 연습실 벽에 계란판이라도 붙여. 방음이 잘되거든.”
“하아. 저 라커들 진짜 어디서들 그렇게 에너지가 샘솟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진우가 ‘소리 질러’를 외치고 있는 무리들을 가리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표님, 우리 모델 뽑는 거지 가수 데뷔시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락 가수 컨셉이니까 노래도 잘 부르면 마이너스는 아니지. 락밴드의 전설 배수민 님을 심사 위원으로 모시기 잘했네. 체육관에, 배수민 심사 위원에 내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
도혁이 선견지명 운운하며 잘난 척할 만했다.
오디션 참가자들의 배수민 심사 위원을 향한 찬양이 이어졌으니까.
“영광입니다. 선생님. 이렇게 살아 있는 레전드, 한국 락 음악계의 선두 주자인 선생님을 직접 뵙게 되다니요!”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헤비메탈 팬분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만날 기회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와아아아.”
“락큰롤! 소리 질러!!!”
“와아아아아.”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뜨겁게 달아올랐다.
허공에서 DW 직원들의 눈길이 마주쳤다. 모두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오디션, 제대로 끝날 수 있을까요?”
“글쎄. 분위기로 봐선 오늘 밤새울 것 같다.”
“심사 위원들도 심사 볼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요? 잠시만요. 배수민 심사 위원장님 어디 전화 거시는 거예요?”
참가자만큼 고무된 배수민이 어디론가 연락을 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제가 락 음악계의 선후배들 쫙 끌어모았습니다.”
“선후배라면 설마?”
“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지리산, 한라산 그리고 그룹 백록담이 함께 할 겁니다!!!! 지금 출발한답니다!”
“와!!!! 배수민! 배수민! 배수민!”
역시 가무의 민족, 대한민국의 아버지들다웠다.
양복 속에, 가장이라는 무게 속에 저 정열을 감추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무거웠을까.
도혁은 가슴이 찡하면서도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아무튼 이 뒤틀린 황천의 오디션을 통해 모델을 선정해야 하지 않냔 말이다.
도혁이 한숨을 내쉬며 지시했다.
“일단 카메라 몇 대 더 돌리고 열심히 찍어봐. 우리가 직접 찍은 자료로 추후에 심사를 따로 보든가 해야겠다.”
“헐. 벌써 저쪽은 콘서트장으로 변해 버렸는데요? 단체로 합창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대한민국 주입식 교육 최고의 아웃풋이라는 영어 떼창까지 부르고 있었다.
DW애드 직원들도 고무되어 하나둘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와, 근데 저 참가자는 기타 정말 잘 치네요.”
“어어! 백록담 도착했어요!”
“이런, 너네까지 구경하지 말고 빨리 참가자들 찍어!”
“넵!”
빼도 박도 못하게 야근 당첨이었다.
* * *
중년 여성 오디션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아저씨들의 장르가 헤비메탈이었다면 여긴 발라드라고나 할까.
조곤조곤하면서도 애절한 사연이 이어졌다.
“제가 원래 미스 코리아 출신이에요. 아이들 낳고 살이 많이 쪘는데 중년 모델 뽑는다고 해서. 이번에 다이어트 엄청 했어요.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흐흑.”
“왕년엔 한 미모 했는데 참고 가능할까요? 모델이 꿈이었는데 결혼을 일찍 하는 바람에…….”
“애 아빠랑 이혼하고 한동안 방황했어요. 이번 기회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어보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도 되고 싶구요.”
절절한 사연에 간혹 눈물 바람도 이어졌다.
그래도 라커 아저씨들에 비하면 제법 모델 테스트다운 심사가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참가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제대로 된 포즈를 잡고 표정도 지어주었으니까.
직원들이 착착 진행되는 오디션 현장을 보고 소회를 나누었다.
“어머님들이 생각보다 적극적이신데요?”
“젊은 시절 모델을 꿈꿨다는 분들이 많으셔. 외모 관리 잘하신 분도 많으시고. 뒷모습만 보면 이십 대 같은 분도 계시던걸?”
“왜. 나는 통통한 아주머니 모델도 좋은데? 어머니 같고 친근한 느낌도 들고.”
도혁이 통통족 아주머니 편을 들자 최민아가 엄지를 추어올려 주었다.
“우리 대표님이 뭘 좀 아시네. 아버님들이 뱃살은 인격이라고 주장하시던데 어머님들 뱃살은 훈장이에요. 임신과 출산의 자랑스러운 흔적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좀 더 당당하게 나서셨으면 좋겠어. 배도 쭉 내미셔도 되는데 말이지.”
“비주얼 감독으로서 동감하기는 어렵지만 두 사람 의견 참고할게.”
강태오가 팔짱을 끼며 현장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빛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점찍어둔 참가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중년의 카리스마에 두둑한 살점에도 당당한 모습, 그러면서도 온화한 인상이라. 흠.”
“잘 한번 살펴보세요. 선배랑 합이 잘 맞아야 하니까.”
“이분 어때?”
강태오가 내민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중년 여성 모델이 오디션을 보는걸 코앞에서 봤는데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거든. 정말이지 평범한 한국의 아주머니였다.
하지만 사진 속 여자는 푸근한 미소를 짓는 중에도 날카로운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눈동자에 빛이 서려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건 그냥 선배가 잘 찍은 거 아닙니까? 와.”
“아니지. 이분은 눈빛에 힘이 있어. 사람의 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대 바꿀 수 없는 게 바로 이 눈빛이지. 성형외과 의사들이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라고 하더라고.”
“그렇네요. 그 어떤 성형과 시술로도 눈빛은 바꿀 수가 없잖아요.”
눈이 품은 빛, 눈동자가 내뿜는 호소력.
이것을 잡아내는 것이 인물 사진 감독의 미덕이라며 강태오가 다시 한번 사진을 훑어보았다.
“누가 찍었는지 자~ 알 찍었다.”
“인정! 인정입니다.”
“이번 이벤트 반응도 인정이다. 난 대한민국 중년분들이 이렇게 열정 넘치시는 줄 처음 알았어.”
“다음에 시니어 모델 이벤트도 한번 해야겠어요. 메이크 오버(외모, 패션 등을 변화시켜 단장함) 해드려도 좋고.”
“오! 좋은데?”
이미 도혁이 다음 시즌 프로모션 제안으로 생각해 둔 것이었다.
통신사 고객은 이미 포화 상태로 십 대 타깃 다음은 시니어로 시장 확대를 제안할 예정이었으니까.
강태오가 도혁의 계획을 눈치챈 듯 입매를 끌어올렸다.
“하여간 마케팅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해버리는구만. 다음 시즌 제안까지 구상하고 말이지.”
“이번 중년 모델 프로젝트를 보고 놓치기 아깝다 싶어서요. 노인 계층까지 연이어 진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케이.”
남성 모델 선발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중년 여성 오디션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모델의 선발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중년 남성의 메탈, 중년 여자 모델의 발라드. 그리고 이어진 장르는 여자 아이돌이었다.
ALL 광고의 대미를 장식할 핵심 모델.
사실상 이번 캠페인의 하이라이트인 여자 10대 모델의 오디션이었다.
‘그 아이가 나타날지 모르겠다. 오디션으로 뽑지 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도혁은 전생에서 읽었던 한 인터뷰를 떠올렸다.
당시 AT텔레콤의 광고는 DW애드에서 기획한 안과는 달리 지금 뽑을 10대 모델의 신선한 이미지에 올인하고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이었기에 오디션이 아닌 캐스팅을 했다고 들었다.
감독이 모델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섭외했었다고.
“명 대표!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아, 아닙니다. 잠깐 기억나는 게 있어서요.”
“십 대 여자 모델 대기자들 들어오라고 할까?”
“그러시죠.”
도혁은 끄덕이며 의자에서 등을 떼어내었다.
오디션이 시작하고 참가자들이 하나둘 들어올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마음에 퍽 차는 모델이 나타나지 않았다.
심사를 함께 보던 강태오, 이진우 역시 성에 차지 않는 표정이었다.
예쁜데 매력이 없거나 신선한 마스크라도 연기가 부족하기도 했다.
아무튼 2% 부족한 느낌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잠깐 끊고 갑시다. 십 분만 쉴게요.”
갑갑한 마음에 휴식을 선언하고 커피를 뽑아 왔다.
독한 카페인에도 갑갑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벌써 스무 명이 넘게 십 대 모델 참가자를 자세히 살펴봤지만 딱 이 광고에 어울릴 만한 아이를 찾진 못했다.
‘무엇보다 눈빛.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한 카리스마가 부족해. 내가 너무 전생의 광고 이미지에 매몰되어 있나.’
워낙에 강렬해서 그 느낌에 집착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지만 꼭 그 분위기를 재현하고 싶었다.
기존 캠페인에서 여러 가지 컨셉을 더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모델만큼은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인상적인 소녀였으니까.
‘태오 선배 말처럼 성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눈빛이잖아.’
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다 마신 커피 잔을 구겼다.
촬영이 재개되고 다시 오디션이 이어졌지만 역시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오늘은 실패할 수도 있겠다. 썩 눈에 차는 친구가 없네.”
“강 팀장님도 그러십니까?”
“길거리 캐스팅을 하든 신인 배우지망생 중에 찾아보든 뭔가 수를 내야 할 거 같아.”
강태오가 다리를 꼬며 다시 한번 뷰파인더를 뜯어보았다.
함께 바라보던 이진우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명 남았어?”
“한 다섯 명 정도 남았습니다. 일단 오디션 마저 보시죠.”
호소력 있는 소녀의 눈이 간절히 그리운 순간이었다.
벽에 던진 토마토를 맞으며 스무 살을 논하던 소녀의 눈동자가 심장에 콕 박혀서 아른거렸다.
‘캐스팅으로도 적당한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결국 그 눈 큰 모델의 이미지는 포기해야 한단 말인데. 너무 아쉬워.’
순간 끼익 누군가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명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