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25화
“아이고 명 대표! 고마워! 내 은혜를 갚아야 할 텐데.”
조덕현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짚이는 데가 있었다. 박성철.
“나를 믿고 박성철 사장을 소개해 주고 말이지. 언제 한번 크게 쏴야겠어.”
“박성철 사장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이렇게까지 공치사 안 하셔도 되는데요.”
“그 회사 규모도 제법 크고 일본에 본사가 있더라고.”
아주 신이 나셨다. 조폭들에게 컨펌 스무 번씩 까이고 8개월짜리 어음 받고도 저런 소리가 나올지 의문이었지만.
“시간 언제 괜찮아? 내 고마워서 이대로 넘어갈 수가 있어야지. 지금이라도 시간 괜찮으면 식사할까?”
“아닙니다. 방금 예식이었잖아요. 식권 받으셔서 맛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그, 그럴까? 철우야, 최철우! 얼른 식권 챙겨!”
조덕현은 카페에도 믹스 커피를 싸갈 만큼 짠돌이였다. 한턱 쏜다는 말이 우스워 한번 픽 웃어주곤 자리를 떴다.
“명 대표 아무튼 언제든지 연락해! 꼭!”
“네, 언제 한번 랍스터라도 먹죠.”
“라, 랍스터! 철우야! 같이 가야지! 저 자식 발도 빠르네.”
도망치듯 사라지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이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분 백 킬로도 넘으실 것 같은데 매우 재빠르십니다.”
“철우랑 둘이, 아니지 박성철까지 셋이 정말 잘 어울리지 않냐? 저 사람들 내가 팍 엮어줬는데 평생 나한테 은혜 갚아야 되지 않겠어?”
“하하, 랍스터 드실 때 저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조소 웃음 벨 조덕현과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결혼식이 무사히 끝났다.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가 쉬려고 누웠는데 눈이 좀처럼 감기지 않았다.
아이디어가 빙빙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에이티브도 좋지만 광고는 이게 제일 별로야.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메모리를 잡아먹고 있단 말이지.’
밥을 먹거나 샤워를 하거나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생각이라는 게 무의식을 잠식해 버리거든.
도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주방으로 나가 물을 따랐다.
마침 어머니가 나오셔서 사과를 깎아주었다.
“우리 도혁이 요즘 엄청 바쁘지? 그래도 엄마한테 얼굴도 좀 보여주고 그래.”
“집에는 꼬박꼬박 들어오고 있는데 시간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진짜 우리 엄마 얼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주말에라도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좋다. 요즘 내가 인생에 낙이 없어요. 네 아빠도 그렇고. 자식들은 죄다 바빠서 코빼기도 안 보여, 늙은이 둘이서 뭔 재미겠냐. TV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에이, 두 분 금실 좋으시면서.”
“어이구 남사스러워라. 금실은 무슨. 너도 삼십 년 가까이 한사람하고 살아봐, 뭘 해도 재미가 없어요.”
포크로 과일을 집어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 찡, 심장이 아닌 머리가 울렸다.
“잠시만요. 어머니 뭘 해도 심심하시다고 했죠?”
“그래. 이대로 늙어가는 건가 싶고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세상만사가 밍밍해. 갱년기라 그런가?”
“세상만사가 밍밍하시다구요…….흠…….”
도혁이 어머니의 말을 되뇌며 사과를 씹었다.
머릿속에서 빙빙 돌던 생각이 빠르게 정돈되고 있었다.
“어머니! 감사해요. 덕분에 아이디어가 확 풀렸어요.”
“그래? 뭔지는 모르지만 다행이네.”
“나 회사 잠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떠올랐을 때 정리해 둬야지.”
“뭐? 이건 다행 아니네. 지금 회사 간다고?”
도혁이 겉옷만 입고 급히 일어섰다.
“아무튼 고마워요, 어머니. 땡큐!”
* * *
“그래서, 대표님 어머님 덕분에 이걸 기획하셨다구요?”
이른 아침. 가장 일찍 출근하는 최민아와 도혁이 티타임 중이었다.
도혁의 어머님 얘기를 들은 최민아가 놀라 눈을 끔뻑였다.
“맞아. 뭘 해도 심심하시단 말에 힌트를 얻어서 기획했지. 인생의 중간에서 특별한 기획을 남길 오디션. 괜찮지 않냐?”
“기획 진짜 괜찮아요. 광고가 신선한 느낌이라서 마스크도 신선했으면 했거든요.”
최민아가 기존에 제출했던 샘플 시안을 가져왔다.
“중견 탤런트급으로 인쇄 광고 만들었었잖아요. 이분이 나쁜 게 아니라 워낙 우리가 오랫동안 봐왔던 얼굴이다 보니까 광고랑 어우러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비주얼은 파격인데 모델이 너무 안정적이에요.”
“맞아. 그래서 중년이랑 십 대 여자 모델은 일반인 오디션을 진행하면 어떨까 기획한 거야. 어머니가 힌트를 주셨고.”
“응. 요즘 들어 낙이 없다고 하시더라고.”
[인생의 한가운데서 만나는 특별한 이벤트. 중년의 락(樂)!]
도혁은 보드판에 써놓은 한 줄 문구를 가리켰다.
“인생의 낙이 없다는 말에 착안했지. 인생의 낙? 중년의 락!”
“중년의 락! 저 카피 좋은 것 같아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애들 키울 때는 하루하루가 이벤트의 연속이래. 매일 다르고 매일 새롭고 그러셨다고.”
“그렇겠죠. 아이들은 하루가 무섭게 자라고, 또 달라지니까요.”
“그러다가 자식들이 다 크고 나면 멀뚱멀뚱 할 일이 없다고 하시더라. 취미로 그림도 그리시는데 아이들 키울 때만큼 다이내믹하게 재밌지는 않나 봐.”
“인생의 숙제가 끝나가서 무료하신 거구나. 한편으로는 부러운데요?”
“뭐가 그렇게 부러워?”
강태오였다.
그렇게 하나둘 직원들이 출근하며 자연스레 아이데이션이 시작되었다.
“컨셉 괜찮은데? 역시 현장에서 타깃을 직접 만나야 아이디어가 풀려.”
“그러니까요. 생각이 머리에서 빙빙 돌다가 어머니 얼굴을 보는데, 팍!”
“꽂혀 버렸구만.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주자. 생의 중간에 만나는 색다른 이벤트 이렇게 연결하는 건 어때?”
“용기를 내세요. 한 번뿐일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이어가면 어떨까요?”
“오디션 홍보를 위해서 퍼포먼스를 덧붙이는 건?”
“아무거나 계속 말해봐!”
툭툭 아이디어를 뱉으며 즐거운 아침 회의가 이어졌다.
차현우가 전체 스케줄을 조율해 가져왔다.
“오디션 일정 최대한 빨리 잡고 신문광고부터 진행합시다. 중년층 겨냥해서 프로그램 뽑으면 되겠지?”
“이제 광고 공사는 현우 선배가 들어가지 말고 신입 중에 매체 하나 키우시죠. 전체 일정 조율만 하시구요.”
“안 그래도 한 놈 찜해놨지. 아주 빠릿빠릿한 신입으로 말이지.”
“광고공사 일은 눈치가 절반이죠. 좋습니다.”
손발이 맞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눈빛만 마주쳐도, 아니, 눈도 마주치기 전에 이미 실행하고 있는 직원들을 보고 있으면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뭉쳤던 이름 그대로 이 멤버 영원하기를.
도혁은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 * *
[인생의 낙? 중년의 락!
내 삶의 한가운데서 만난 락 페스티벌, AT텔레콤의 락락한 오디션]
신문광고 전면에 적힌 커다란 카피.
그 아래엔 가죽 재킷에 전자 기타를 든 남자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텅 빈 얼굴 위에 얹힌 물음표를 따라 말풍선에 한 줄 멘트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얼굴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광고가 나가자마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의외로 주부들보다 중년 남성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대기업 사보에 실은 게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매체비도 저렴하고요.”
“시사지랑 주부 잡지도 곧 풀리니까 지켜보자고. 월간지 오늘 풀리는 날이지?”
“거의 오늘 자로 나가요.”
“여성지 쪽은 주부 타깃으로 만든 광고 나가야 하니까 잘 챙기고.”
“네! 대표님. 잘 나왔는지 챙겨볼게요.”
인쇄 쪽 검수를 맡고 있는 최민아가 꼼꼼히 신문광고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차현우가 프로모션 소식을 전해왔다.
오디션 홍보를 위한 사전 락 페스티벌로 관심도를 증가시킬 계획이었다.
“중년의 락 페스티벌 참가 가수 라인업 나왔어.”
“왕년의 스타 모음집이나 다름없네. 이야, 이분 얼마 만이냐! 활동 접으신 줄 알았는데.”
“반가운 얼굴이 많지? 가수 접고 영업 사원 하시는 분도 있고, 치킨집에 다양한 생업에서 종사 중이시더라고.”
“그래요?”
도혁이 눈을 반짝이자 차현우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분들 인터뷰 따서 기사 만들려고 하는 거지?”
“눈치채셨네요.”
“그럼. 명 대표 눈빛만 봐도 알지. 조치해 놨어. 신문광고 대거 집행하는 바람에 기자들이 아주 협조적이라고.”
“하긴 전면 광고만 얼마를 샀는데. 그리고 기삿거리로도 충분하잖아요.”
역시 대기업의 물량 공세는 일하기 편한 환경을 만드는 법이다.
차현우가 내민 보도 자료 안을 꼼꼼히 살피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렸다.
“어, 잘들 지내고 계십니까?”
“대표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엑슨의 이우영 대표였다.
“어! 진우 방금 프로덕션으로 출장 나갔어요. 바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들이야 집에서 보면 됩니다. 요 앞 호텔에서 행사가 있어 들렀다가 DW애드 생각나서 들어와 봤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지요.”
대표실에서 차를 내어오곤 도혁이 근황을 물었다.
“다들 별고 없으시지요? 사모님도 잘 계시구요.”
“그럼요. 이번에 게임 론칭 캠페인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영업이익에 주가까지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 게임은 언젠가는 떴을 겁니다. 스테디셀러로 오래오래 사랑받을 거라 확신합니다.”
도혁도 그 게임 고인물이었거든.
아주 장수할 좋은 게임이었다.
“CF는 당분간 새로 제작하지 않고 그대로 갈까 합니다. 온라인 배너 광고를 조금 더 강화했으면 하는데 어떠실까요?”
“좋습니다. 참, 다음 CF도 이번 캠페인에 맞추어 시리즈로 나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해외시장으로도 나갈 생각인데 DW에서 광고 기획안을 준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어디서 이런 귀인이 나타나셨는지, 제가 항상 든든합니다.”
“저야말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영문과 나오기 잘했네.
도혁은 웃으며 찻잔에 입술을 대었다.
한참 동안 해외 진출에 관해 설명하던 이우영이 벽 한쪽에 붙어 있는 AT텔레콤 광고를 발견했다.
[인생의 낙? 중년의 락!
내 삶의 한가운데서 만난 락 페스티벌, AT텔레콤의 락락한 오디션.]
“어! 락 페스티벌이라니. 저도 락 매니아입니다.”
“그러십니까?”
이우영이 일어나 포스터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장난스레 남자의 실루엣을 가리켰다.
“나도 한때 이렇게 지냈습니다. 기타도 치고 머리도 기르고. 대학 때 락 밴드 동아리였거든요.”
“오! 멋진데요?”
“크, 추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요즘 헤비메탈은 인기가 좀 덜하잖아요. 브릿팝처럼 말랑한 락 음악이 대세인 듯합니다.”
역시 트렌드를 선도하는 게임 회사 대표답게 브릿팝도 아신다.
“나인인치 네일스나 마를린 맨슨처럼 터프한 음악도 유행이지만 예전 헤비메탈의 맛은 덜하죠. 레드 제플린이나 딥퍼플 같은 느낌은 아니니까요.”
“오! 딥퍼플! 딥퍼플을 아십니까?”
“이런. 딥퍼플 골수팬 앞에서 제가 레드 제플린을 먼저 논했네요.”
“명 대표! 젊은 사람이 올드 헤비메탈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이 놀랍습니다. 제가 방금 그 부분을 지적하려고 했거든요! 왜 레드 제플린부터 말하냐!”
그 후로 한참 동안 헤비메탈 역사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다.
무표정에 전형적인 공대생 스타일인 이우영이 이렇게 흥분하는 건 처음 보았다.
한껏 고무된 이우영이 도혁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화자찬 같지만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음악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동감입니다.”
“진우 덕분에 사업에 큰 힘이 되는 귀한 인연을 만나서 기쁩니다. 명 대표, 앞으로도 좋은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온라인 홍보 쪽으로 사업부를 만들 생각 없으십니까?”
이우영이 정확하게 고민하던 부분을 짚고 나왔다.
“온라인 사업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