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14화
[XXX 강릉시장]
[OOO 충주시장]
“대표님, 뭘 그렇게 열심히 쓰십니까?”
아침부터 수첩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도혁에게 황도준이 다가왔다.
순진한 그의 얼굴을 보자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이, 이게 뭡니까? 대표님.”
“데스노트라고 들어나 봤나? 우리말로 살생부 작성 중이야.”
“헉! 잠시만요. 일부러 빨간색으로 이름 쓰신 겁니까?”
“어. 내가 안 죽여도 곧 죽을 사람들이야.”
“대,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크게 뜬 황도준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아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걸 본 황도준이 더 무서워했다.
“살려주세요.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도준아. 그게 아니라…….”
“최민아 선배한테 은근슬쩍 귀찮은 거 미룬 적도 있고요. 맞다, 그러니까 이진우 선배 귀여워서 장난도 많이 쳤어요. 그리고 그, 탕비실에서 커피도 좀 가져가 먹고 그랬어요. 자취방에 커피가 떨어져서. 하아.”
“뭐? 이 추잡한 자식아!”
“아, 잘못했습니다. 대표님. 살려주세요!”
부산스러운 평소 성격대로 온갖 주접을 떨며 살려달란다.
도혁이 웃으며 황도준의 머리에 헤드락을 걸었다.
“이놈의 자식, 감히 공용 커피를 가져가?”
“그, 그게 대표님이 커피 좋아하셔서 종류별로 있지 않습니까. 맛있는 게 좀 많아야죠. 프랜차이즈 브랜드 커피도 있고. 죄송합니다!”
“귀여운 자식. 야! 이거 살생부 한가운데 크게 써놔야겠구만! 빨간 매직 가져와!”
“대표님!”
시끄럽게 구는 둘을 보고 차현우가 수첩을 들었다.
“죄다 정치인들이구만, 뭐. 애 데리고 장난 그만 치고 이거 진짜 뭐냐?”
“살생부라니까?”
“명 대표 어제 사극 보고 왔냐?”
강태오가 다가와 황도준의 헤드락을 풀어주었다.
도혁이 웃으며 자연스레 회의를 시작했다.
“출근하신 분 모두 모여보시죠. 농담은 관두고 공지할 것이 있습니다. 이 노트 살생부가 아니라 생(生)부예요. 우리가 이번 지방 선거에 캠페인 진행할 정치인 명단을 적은 겁니다.”
“아, 대표님 진작 말씀을 하시지. 저는 커피 때문에 살해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살해는 무슨.”
아직도 너스레를 떠는 황도준을 보며 도혁이 미소 지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생(生)부가 맞긴 하다. 앞으로 아주 흥할 정치인 명단을 추렸거든.
도혁은 미래에 누가 흥하고 누가 망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정치인은 망하면 정말 폭망해 버려서 십 년은 고쳐 쓸 수가 없다. 하여 신중하게 광고주를 추려본 것이다.
“전에도 여러 번 강조했다시피 이번 지방선거 광고는 정치색 완전히 빼고 진행합니다. 예전에 함께했던 지자체 슬로건 캠페인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이니까요.”
“맞아. 순수하게 광고적으로만 봐도 정당이나 정치색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지자체의 발전, 특색에 주목하는 게 훨씬 낫지. 지방 선거니까.”
“맞습니다. 양산형이라고 생각하고 공장처럼 쭉쭉 포스터 브로슈어 뽑아야 할 거예요.”
도혁이 제작팀을 보며 황도준의 어깨를 툭 쳤다.
“이번에도 수고 좀 해줘야겠다.”
“넵!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황도준을 보고 모두 웃음이 터졌다. 최민아만이 한숨지었다.
“건설 광고 쪽 일도 아직 남았는데, 할 수 없지 뭐. 정치인들 나이가 있어서 얼굴 포샵 엄청 해야 해. 각오하고 있지?”
“네. 포토샵으로 주름 제대로 다려놓겠습니다!”
제작팀에게 설명을 마친 도혁이 기획팀을 돌아보았다.
“문제는 통으로 맡는 큰 건이에요. 브로슈어 작업 정도가 아니라 캠페인 전체를 맡는 건데 이미 몇 명의 기초단체장이 의뢰를 해온 상태입니다.”
“오호, 이거 급해졌는데?”
“네. 선제적으로 인천시장님의 선거전 캠페인을 만들고 그걸 샘플로 다른 정치인 광고를 따올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포트폴리오가 있어야 신뢰할 수 있으니까.”
“그럼 기획 회의부터 하시죠. 제작팀은 나가도 좋아요.”
“파이팅하세요!”
친절한 제작팀이 커피까지 배달해 주고 기획팀만 모여 앉았다.
인천시장의 얼굴을 노트북에 띄워놓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최대현 시장 당선되기 전에 3선 의원이었지?”
“네. 공천은 인천 바다가 사이다가 되지 않는 한 딸 거예요. 그래서 먼저 진행하려고 하는 거구요.”
“인천시장 두 번째 도전이지? 선거 때마다 느끼지만 인천 민심은 알다가도 모르겠더라고.”
“그래도 최 시장님이 되지 않을까요?”
지역구 분석 등 스와트 분석을 진행하며 전체적인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이에요. 일단 시장 하면서 부채도 다 갚았고. 이 부분이 사실 정말 크죠.”
“맞아. 재선 무리 없다고 봐. 그래서 명 대표도 제일 먼저 진행하려는 거잖아.”
“네. 저희 DW애드와 인연이 깊기도 하지만 재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기초단체장 후보 중 한 명입니다.”
“근데 방금 말한 부분이 홍보 진행하는 쪽에서는 독이 될 수가 있어요.”
탁기준이 팔짱을 꼈다.
“논란거리 없이 무난하면서도 화제를 일으킬 수 있도록 잘 진행해야 돼. 언론 대응이야 인천시에서 자체 팀 운영할 거고.”
“맞아요. 저희는 순수하게 캠페인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문제는 인천시장님이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원하시더라구요. 기존의 올드한 느낌을 타파하고 싶으시다고 젊은 피, 젊은 피 노래를 부르세요.”
“우리가 좀 젊기는 하지. 그래도 명색이 정치광고라서 정형성이 있단 말이지. 이거 균형 타기 잘해야겠다.”
여러 의견들이 오고 갔다. 한수철이 PPL을 제안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PPL을 진행해 보면 어때? 이은경 작가님도 계시고 우리 DW의 강점 중 하나잖아.”
“쉽지 않아. 내가 말한 균형 타기가 그런 거야. 잘못하면 언론사 유착이니 뭐니 해서 논란 소지 있어.”
“듣고 보니 탁 팀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흠.”
한수철이 무심코 던진 PPL 얘기에 도혁이 미간을 좁혔다.
“잠시만. 우리 역으로 PPL을 진행해 보면 어떨까?”
“무슨 말이야. 역으로?”
“누구나 알 법한 드라마를 차용하는 거야. PPL이지만 PPL이 아닌 캠페인.”
“뭐? PPL이 아닌, 뭐라고?”
한수철의 눈이 커졌다.
* * *
도혁과 한수철이 오랜만에 태강애드를 찾았다.
PPL인 듯 PPL 아닌 PPL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해외 출장 중인 김철준 대표는 만나지 못하고 제작국으로 향했다.
성민욱 국장이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아, 명 대표님 아니십니까. 이렇게 보니까 더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진작 한번 와보려고 했는데 늦었습니다. 말씀은 평소처럼 낮춰주세요. 제작국장님의 극존대라니, 민망합니다.”
“하하, 그래도 한 회사의 수장인데 그럴 수가 있나.”
“별말씀을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광고계에서 첫 번째로 손꼽는 스승이라면 단연 성민욱 국장이었다.
도혁은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훈훈해졌다.
“앉으시게나. 차 드시고, 요즘 하는 캠페인마다 빵빵 터뜨린다고 업계에 소문이 자자해. 아주 전국구로 움직이신다고?”
“전국구까지는 아닙니다.”
“에이, 어제 광고인 모임에서 부산에 지사 있는 광고 회사 대표들이 볼멘소리하더라니까. 어디서 혜성같이 나타난 DW애드가 부산 바닥 쓸어담고 있다고 말이야.”
“태강에서 많이 배운 덕분입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
“광고쟁이한테 어울리지 않는 겸손은 넣어두시고. 광고인은 자기 PR을 하고 다녀야 하는 법이야. 그런 의미에서 내 가는 데마다 내 밑에서 키우던 직원들이다, 자랑하고 다니는데 괜찮지?”
“그럼요. 사실이니까요.”
따뜻한 머그잔을 그러쥐자 손끝에 온기가 묻어났다.
도혁은 제작국을 둘러보며 근황을 물었다.
“참, 태강애드가 해외 진출한다고 들었는데 함께 가십니까?”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어? 맞아. 김철준 대표님이 바람이 들어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고 하더라고. 나야 뭐, 베스트 프렌드 가는데 따라가야지. 절친이 바닥부터 구르는데 같이 굴러줘야 의리 아닌가.”
“대단하십니다. 두 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다 늙어서 주책이지, 뭐.”
성민욱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존경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만약 회귀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인턴부터 시작할 수 있었을까? 바닥부터 구르며 용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잠깐의 상념이 지나고, 성민욱이 둘에게 용건을 물어왔다.
“그래, 정말 어쩐 일인가? 많이 바쁠 텐데 이 늙은이까지 찾아오고 말이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오호, 나한테?”
성국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해줘야지. 그래, 무슨 일인가?”
“MBM 드라마 국장님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성민욱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방송국에 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능국에서 일하는 누나나 로맨스 작가인 이은경 작가보다 힘 있는 사람이 필요했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좀 더 정치적인 인물. MBM 드라마 국장 같은 사람 말이다.
그리고 성민욱 국장은 그의 절친이었다.
“거긴 내가 잘 알지. MBM이라면 우리 와이프보다 내가 훨씬 가깝게 지내고 있어.”
“네. 그분 ‘대한 공화국’ 시리즈 기획하신 분이잖아요. 로맨스 쪽이랑은 거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이렇게 성 국장님께 부탁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좋아. 내 자리 한번 만들지. 아마 DW애드 대표와 직원이라고 하면 만나겠다고 할 거야. 광고 팍팍 꽂아주는 고마운 사람들 아닌가.”
“감사합니다.”
시즌제로 진행하고 있는 드라마 ‘대한 공화국’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꿰뚫은 대작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정치 드라마일 뿐 아니라 엄청나게 흥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 드라마임에도 정치색을 배제하고 드라마적으로만 접근했다.
DW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한다고나 할까.
이 드라마를 바탕으로 PPL을 활용해 볼 생각이었다.
성민욱과 인사를 마치고 돌아 나오며 한수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내가 기획안만 잘 쓰면 되는 건가?”
“그렇지. 대한 공화국에 우리가 꽂을 PPL, 그리고 대한 공화국 특색을 역으로 따온 캠페인을 솔깃하게 작성하면 돼.”
“예썰! 쉽지 않은 미션이긴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겠습니다. 한수철 팀장님! 수철이가 쓴 기획안은 아주 솔깃하다고.”
카피라이터나 다름없다고 느낄 정도로 솔깃한 문구를 잘 뽑아내는 한수철에게 PPL 기획안을 맡기고 차에 올라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동차 창문을 열어 팔을 기대었다.
“봄바람이 아주 상쾌하구만.”
도혁은 느긋하게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벚꽃이 떨어진 거리는 모조리 꽃길이었다.
-띠리리릭
여유로운 분위기를 깨고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려왔다.
-대표님!
“네. 최민아 님. 우리 다 와 갑니다요. 급한 컨펌 있어?”
-그게 아니라…… 저기…… 이상한 사람이 와서 대표님 찾아요.
“잠깐만. 이름이 뭐라고?”
최민아의 목소리가 다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