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87화
사성전자 본사 앞 카페에 모인 신입팀이 어리둥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페 손님들이 전부 목에 사원증 걸고 있네?”
“하긴 워낙 큰 회사니까. 이 일대가 전부 사성전자 사람들뿐이라더라고.”
도혁이 플래너를 펼치며 아이데이션 준비를 하자 한수철이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우리끼리 진행할 거야? 조덕현 본부장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 알면 가만 안 있을거야.”
“가만 안 있음 어쩔 건데. 본인도 프로덕션 피 뽑아서 김철준 모르게 진행하잖아. 그리고 잘 생각해 봐. 결국 우리도 피 빨리는 입장이라고.”
“프로덕션처럼?”
“어. 기획에서 우리팀 띄워주니까 워크숍이니 뭐니 해서 아이디어 뽑아가고 본인 실적 올리려는 거야. 진심 조덕현 본부장 호구는 되기 싫다.”
“하긴. 독립하는 마당에 누구 눈치를 보겠냐.”
한수철이 동조하자 도혁은 아이스커피를 쭉 들이켜며 회의를 시작했다.
“카페 오래 죽치고 있으면 안 되니까 한 시간 동안 추후 진행할 역할 나누고 큰 틀만 잡고 찢어지자.”
“그래. 생각해 보니까 회의만 계속했지 뜬구름만 잡았던 것 같아.”
“방향성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혁이 종이 위에 슥슥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난 사성전자 광고 현실적으로 접근하면 좋겠어. 일단 오늘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브레인스토밍부터 해보자. 다들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말해봐.”
“나도 그래. 솔직히 말해도 돼?”
“그럼. 우리끼린데 당연하지.”
“툭 까놓고 이 광고는 못 딴다고 봐.”
한수철이 딱 잘라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부정적으로 말하고 단정하는 성격 아닌 거 도혁이는 잘 알 거야.”
“그렇지. 최민아면 몰라도 한수철 긍정적이잖아.”
도혁의 농담에 최민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근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재계약 상황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계열사 사성애드랑 다시 계약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어. 심지어 대표끼리 친척이야. 사성애드 대표가 사촌 동생이라고.”
“아니, 본부장님은 그런 거 알고 이 광고 따 오자고 한 거야? 무슨 생각인 건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 속을 모르겠어.”
“대충 알겠지만 뚜드려 보는 거. 그래서 우리 신입팀 데리고 하는 거야. 성공하면 우리 아이디어 갈취해서 하는 거고, 실패하면 우리 탓할 걸? 신입은 어쩔 수 없는 신입이야 이러면서. 다음에는 더 유능한 애들 붙여달라고 하겠지.”
“와, 그런 거였어?”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회사니까 귀국하자마자 내가 건드려 봤다, 김철준 대표님한테 생색내고 프로덕션에서는 뒷돈 받고 손해 볼 거 없네.”
“와, 잔머리 무엇. 그래서 도혁이가 따로 하자고 한 거구나.”
도혁이 끄덕이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난 수철이와 생각이 달라. 우리 사성전자 따낼 수 있어.”
“무슨 수로? 아무리 생각해도 각이 안 나오는데?”
“현실적으로 접근하면 되지. 잘게 쪼개서.”
“쪼갠다고?”
“그래. 쪼개서 우리가 가져갈 거라니까.”
도혁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의 첫 번째 사업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 * *
주말 아침. 일어나자마자 백팩을 둘러매고 나가는데 누나에게 뒷덜미가 붙들렸다.
“야! 명도혁, 요즘 왜 이렇게 바빠. 너 이 자식 밥은 먹고 다니냐?”
“올~ 명현진. 걱정해 주는 건가.”
“어. 걱정이다. 삽질하고 다닐까 봐. 죽으라고 일만 하다가 너 쭉정이 호구 된다.”
워커홀릭 끝판왕 명현진에게 저런 소리를 들으니 실소가 절로 새었지만 도혁은 웃지 못했다.
원래 태강애드 호구 새끼 명도혁 맞았으니까.
“지금은 아니야.”
“뭐?”
“지금은 호구 아니라고.”
“뭔 소리야. 너 목숨 바쳐 구르잖아. 태강애드에 미친 듯이 일하는 신입 들어왔다고 방송국 매체팀에서 얘기하는 거 듣고 내가 지금 이러는 건데.”
“누나.”
도혁은 몸을 돌려 명현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훅 숙여 눈을 마주치자 명현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얘가 왜 이래, 아침부터 징그럽게. 손 못 치우냐?”
“누나.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그래, 말해봐. 듣고 있어.”
“나 사업할 거야. 내 사업.”
“아, 독립하는 게 목표라서 그렇게 열심히 했던 거였어? 하긴 광고대행사 직원들 다 독립하고 싶어 하더라.”
뭐 별다를 것 없는 얘기라는 표정으로 명현진이 도혁의 손을 툭 쳤다.
도혁이 웃으며 당장 시작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다음 주에 사업자 등록증 팔거야. 곧 오픈이라고.”
“뭐? 야! 명도혁, 너! 지금 당장? 와!”
“그러니까 우리 막내 피디님께서는 지금부터 명 대표님이라고 부르세요.”
“너! 엄마 아빠 이거 아시니?”
“성인인데 부모님 결재받고 사업 시작해야 해? 각자 알아서 사는 거지. 나 간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명현진의 앞머리를 한번 헝클어주곤 도혁이 밖으로 나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난주에 부모님과 상의를 마친 상태였다.
파워포인트로 사업설명서 브리핑까지 해드리는 걸 보곤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셨다.
-준비를 많이 했구나. 솔직히 놀랐다. 그리고 더 놀란 건 자본금이야. 언제 이렇게 돈을 모았냐.
-대형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계속 자본 모아왔어요. 목표가 있으니까 금방 모이더라구요.
-제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와, 우리 아들 정말. 대학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머니는 감격해서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사업이기 때문에 두 분 걱정하실 거 알고 있어요. 안정적으로 대기업 다니면 더 좋겠지만 나름대로 꿈이 있어서요.
-그래. 남자가 그까짓 거 포부대로 살아봐야지. 이 정도 준비했으면 됐다. 실패해도 배울 거야.
-아니요. 실패 같은 건 안 해요. 절대로.
패기 넘치는 도혁의 말에 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인마. 시작은 그렇게 활기차게 하는 거야. 내가 아들 하나 제대로 키웠네. 당신이 잘 키웠어.
-도혁이가 잘 자란 거죠. 우리 아들 너무 기특하다.
-솔직히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감사합니다.
-반대는 무슨. 한 번뿐인 인생인데 마음대로 한번 살아봐라. 어깨 쭉 펴고 혹시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아, 말씀 드릴 것이 있기는 합니다.
도혁의 말에 부모님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제발 이사 좀 가요. 추가 자금 필요하시면 제가 두 분 도울게요.”
-안 그래도 전세 내놨어. 우리 분당으로 갈까 생각 중이야. 평생 소원이었던 정원 있는 집을 짓고 나무나 가꾸면서 살려고.
-짓는 것도 좋죠. 상가주택이라면 더 괜찮을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잘됐습니다. 꼭 추진하세요!
-그래그래. 우리 걱정은 하지말고 아들 파이팅!
그렇게 부모님의 응원을 받으며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거였다.
명현진은 도혁이 사업 추진을 의논하던 날, 또 술 먹고 늦게 들어와서 못 들었을 뿐이었지만.
도혁은 놀라는 명현진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힘찬 발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신사동의 사무실이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에 포에버 팀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거리 중심 건물 5층에 위치한 사무실은 의외로 널찍한 공간에 채광이 좋았다.
안쪽으로 들어가 둘러보던 멤버들이 환히 웃었다.
“이제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와. 나 좀 많이 설레.”
“태강애드처럼 금방 키워볼게. 아직은 작은 회사인데 결정해 줘서 모두 고맙다.”
“데려와 줘서 우리가 고맙지. 아마 남은 신입들은 서운해할걸?”
“서인기랑 전부 데려오고 싶었는데, 아직은 여력이 없어서. 핵심 인재만 빼 왔다.”
도혁의 말에 최민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핵심 인재라고 해주니까 행복하네요, 대표님. 참, 나는 4학년이라 괜찮은데 다들 학교 강의는 정리된 거지?”
“이진태 교수님이 배려 많이 해주셨어. 조만간 우리 회사 고문으로 모실 생각이야.”
말하는 순간 강태오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도혁은 그를 보고 첫 번째 미션을 건넸다.
“선배 왔네요. 사무실 인테리어는 태오 선배가 좀 봐주세요. 너무 튀지는 않게 감각적으로.”
“이 자식 벌써 대표라고 요구 까다로운 거 봐라. 아, 이제 대표님이라고 해야 하나?”
“호칭만 대표라고 하고 평소처럼 편히 대해주세요. 편하게 일하려고 팀 꾸린 거니까요.”
“그래. 편하고 재밌게 한번 해보자. 애드포인트에서 한 것처럼.”
“네. 어! 저기 차현우 선배 온다.”
멀찌감치 복도 끝에서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고 있었다.
강태오가 뛰듯이 걸어가 그를 맞았다.
“이야, 차현우. 이게 얼마 만이냐.”
“잘 지냈어? 뭔가 더 못생겨졌다?”
“웃기시네. 시꺼매가지고. 군대 또 갔다 왔냐?”
“죽을라고. 어! 아무튼 반갑다.”
노가다로 얼굴이 시꺼매진 차현우가 포에버팀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도혁이 멤버들을 소개했다.
“선배랑 수철이는 서로 알 거고 이쪽은 최민아. 디자이너야. 여기는 PD를 맡을 이진우. 둘 다 제작 쪽인데 실력도 있고 감각도 좋아.”
“난 차현우. 태오랑 동기고 도혁이 수철이한테는 선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잘 부탁드려요.”
“보자, 전체적으로 멤버 구성이 어떻게 되나?”
“일단 자리를 옮길까? 모두 모였으니까 대략적인 사업 구상도 같이하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이제 직원이 될 포에버 팀을 둘러보자 도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전생의 경험으로 비추어봐서 어밴저스나 다름없는 팀 구성이었으니까.
최민아 역시 웃으며 머그잔에 입술을 대었다.
“내가 사무실 둘러보면서 제일 좋았던 게 이 카페가 바로 앞에 있다는 거야. 여기 커피 정말 괜찮지 않아?”
“맞아. 나도 이 건물로 정한 가장 큰 이유였어. 대대로 흥할 좋은 카페지. 핸드 드립 예술이고.”
“그래. 카피는 커피지. 참, 카피는 누가 쓰지?”
차현우의 말에 도혁이 턱을 어루만지며 대략적인 구상을 말해주었다.
“방금 선배가 카피 썼잖아요. 카피는 커피 어쩌고 하면서. 당분간 현우 선배가 저와 함께 카피도 쓰고 영업도 병행하면 좋겠어요. 크리에이티브 쪽 책임은 강태오 선배가, 디자인과 영상, 콘티 쪽은 민아랑 진우가 각각 나눠서 진행할 거예요.”
“AE가 아쉽네.”
차현우의 말에 모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대표인 도혁이 AE 역할을 함께 수행하고 차현우도 돕겠지만 아무래도 영업통이 필요한 게 광고일이니까.
“제가 따로 영입하려고 준비중이에요. 아시다시피 좋은 AE 찾기가 쉽지는 않아요. 이제 시작하는 회사이다 보니 좋은 인재 영입도 힘들구요.”
“뭐가 쉽지 않다는 거야. AE 여기 있잖아.”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틱틱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 AE가 뭐라구요?”
“이 자식들, 나 빼고 이런 깜찍한 회사를 만들었냐? 소문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지. 나도 같이 해보자.”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남자가 냉수를 벌컥였다.
이거, 생각하지 못한 상황인데? 도혁은 놀라 눈을 끔뻑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