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88화
“이 자식들, 나 빼고 이런 깜찍한 회사를 만들었냐? 나도 같이해야지, 인마.”
“탁기준 선배.”
털썩 자리에 앉아 냉수를 들이켠 남자는 탁기준이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묻자 한수철이 불렀다는 말이 돌아왔다.
한수철이 중간에서 곤란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우연히 내가 메일 열어보는 걸 기준 선배가 본 거야. 사업설명서라고 PPT 파일 보낸 거 말이야.”
“아……. 그래서 제안서 읽어보신 거예요?”
“뭐, 자세히 볼 거 있나, 보면 딱 각 나오는 거. 광고쟁이 독립하는 거야 흔한 일이지. 솔직히 대기업 그만두는 거 조금 망설였는데.”
탁기준이 도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와 달리 장난기가 쏙 빠진 모습이었다.
“명도혁이 보고 딱 결정했지. 우리 손발 잘 맞지 않았나?”
“손발이야 잘 맞았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AE 부족하다면서. 멤버 구성 봤는데 내가 봐도 기획 쪽이 부족해. 광고회사는 AE 장사야. 정 안 되면 제작은 외주 뿌려도 되잖아.”
“…….”
탁기준 말이 정확했다.
도혁이 제작팀 출신이라 무의식중에 크리에이터를 끌어모은 면도 없지 않았다.
비록 명도혁이 미래의 숱한 광고를 알고 있고 한수철이 좋은 AE인 건 확실했지만 역시 유능한 AE는 필요한 상황.
‘하지만 탁기준 선배는 태강애드에서 끝도 없이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인데. 이거 뭔가 너무 미래가 바뀌는 느낌이 들어서 미안하네.’
칵테일바를 했던 강태오나 한 오 년 뒤에나 광고회사를 차리게 될 차현우, 그리고 기러기 아빠로 고생하던 한수철을 데려오는 것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최민아 역시 실력에 비해서는 태강애드에서 피나 빨리는 포지션이었거든.
하지만 탁기준은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AE로서 입지가 분명했던 사람이었다.
도혁은 고개를 기울인 채 탁기준에게 물었다.
“선배. 대기업 때려치우고 이렇게 작은 회사에서 다시 시작해도 되겠어요? 김철준 대표가 선배 엄청 밀어주고 있잖아요.”
“뭐 명도혁은 안 밀어줘서 태강애드 나오는 거냐?”
“그것도 생각해야 해요. 내 밑에서 일하는 거잖아요. 어쨌든 제가 대표인데 괜찮겠냐는 뜻이에요.”
“와, 이거 약간 무시당하고 있는 거 맞지?”
탁기준이 얼굴이 벌게져서 따지고 들었다.
“내가 공과 사도 구분 못 하고 똥오줌 못 가리는 인간으로 보여? 그래?”
“그런 뜻이 아니라, 선배.”
“대표되면 깍듯이 모셔야지. 그런 거 잘해서 AE 하는 거 모르냐? 그리고 그깟 대기업 체질에 안 맞아. 나 자유 영혼이라고.”
누구보다 대기업 체질인 탁기준에게 그런 말을 듣자 기분이 이상해졌지만 도혁은 한 번 더 그를 말려보았다.
“나중에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면 안 되요. 선배까지 데려오는 건 좀 부담스럽다구요. 김철준 대표님께도 미안하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거야. 그리고 대기업 다니는 여자랑 결혼하면 되지.”
아, 서희주 선배가 있구나. 와이프 믿고 본인은 자유롭게 꿈을 펼쳐보시겠다.
그런 거라면 조금 부담을 내려놔도 되려나. 하긴, 미래를 아는 회사가 망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한 도혁이 결심을 굳혔다.
“탁기준 선배님. 감사합니다. 누구보다 모시고 싶었지만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대표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우리 재밌게 일해요. 나 지금 완전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정말로요.”
“그래. 우리 잘해봅시다.”
천군만마를 얻은 도혁의 어밴저스가 완성되었다.
도혁은 직원들에게 오픈 전 사전 과제를 던졌다.
“여러분께 첫 번째 미션을 드리겠습니다.”
“뭔가요.”
“브랜드 네이밍. 우리 회사의 이름 제가 독단으로 짓지 않고 함께 지으면 좋겠어요. 인테리어 끝나기 전에 다시 모여서 이름 정하고 간판도 디자인해요.”
“네. 그렇게 하시죠, 대표님.”
“아, 뭔가 오글거리네. 대표님 소리 적응 안 된다. 다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에이, 대표님 왜 이러세요.”
“그러니까요, 대표니이이임.”
오그라드는 손가락을 말았다 펴며 도혁이 머리카락을 훅 털었다.
이 분위기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도하면서.
부디, 이멤버 포에버.
* * *
조덕현의 강요로 사성전자 광고주와 미팅 자리에 불려 갔다.
도혁과 수철을 데려간 조덕현이 사성전자 홍보팀장에게 쓸데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S대와 영국계 광고 회사 출신이라는 간판을 내세워서 자기 자랑의 빌드업을 쌓아가는 조덕현을 보며 도혁은 입속의 살을 씹었다.
‘으…….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 거냐.’
광고주 앞에서 자기 자랑이라니. 어른답지 못할 뿐 아니라 멍청하기 짝이 없는 조덕현의 행동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미팅 후 늘 그랬듯 회사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퇴근하려는 조덕현을 기쁜 마음으로 보내주었다.
“조심해서 살펴 가시기 바랍니다.”
“같이 한잔할까? 이 근처에 곱창 잘하는 집 있는데 말이야.”
“저희는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요. 들어가세요.”
어떻게든 붙잡아놓고 자랑과 허세를 늘어놓으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는 도혁이 도망치듯 한수철을 데리고 발을 돌렸다.
BBC방송이며 타임지며 클리오 광고제까지 이어지는 그의 허세는 전생으로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잘 끊었네. 계속 저런 말 듣고 있기가 좀 거북했는데. 쪽팔리지도 않나 봐.”
“자기 입으로 자랑하는 거? 인성이 좋았으면 능력이 더 빛을 발했을 거야.”
“어. 아우 아주 광고주 보기 민망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
“그래서 말인데, 사성전자 다시 들어가자.”
“뭐?”
한수철이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내가 태강에서 마지막 선물로 사성전자를 가져갈 거라고 했잖아.”
“에이, 태강에서 뺏어 간다고 할 순 없지. 김철준 대표도 모르는 일인데.”
“그렇지. 아무튼 퇴직금 조로 조덕현에게서 뺏어 갈 건데 말이지. 문제는 우리가 오늘 브리핑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거든.”
“하긴. 이런 식으론 뭘 어떻게 진행할 건지 감을 못 잡겠어 나는.”
“그래서 일단 다시 사성전자 팀장을 만나겠다는 거야.”
한숨을 내쉬는 한수철을 데리고 사성전자 홍보팀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팀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왜 다시 오셨습니까?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어요?”
“아닙니다. 간단히 제안드릴 사안이 있어서요.”
“뭔가요?”
“사성전자 신제품 프로모션 진행하실 예정이시죠? 현재로서는 사성애드와 진행하실 거구요.”
“뭐 그렇죠.”
건성건성 들으며 귀찮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도혁은 그를 보며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제안했다.
“사성애드도 프로모션 진행은 외주 처리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획 정도만 짜고 당연히 협력 업체 넘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왜요.”
“저희는 기획과 진행을 동시에 믿고 진행하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프로모션 부분만 경쟁 PT에 붙이시는 건 어떨지 제안드리려고 온 겁니다.”
경쟁 PT, 그것도 프로모션 부분만 떼어서 진행하자는 말에 홍보팀장이 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려 보이는데 굉장히 재밌는 말을 하는군요. 우리 론칭 제품이 이번에 주력작이라서 프로모션을 강화하기는 할 건데…… 그렇다면 태강기획과 사성애드가 경쟁 PT를 진행하겠다는 건가요?”
“아니요. 공고를 통해 공모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계열사이지만 너무 오래 한 회사와만 홍보를 진행하셨고, 프로모션만 공모하는 거니 부담도 없구요.”
“흠.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두 분은 아까 함께 왔던 분과는 좀 다르네요. 혹시 성함이?”
“저는 명도혁입니다. PT 공고가 나온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눈빛이 아주 좋은 친구네요. 좋습니다. 윗선에 제안해 보도록 하죠.”
홍보팀장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어내 도혁에게 내밀었다.
* * *
의사와 교사는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는 말이 있다.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일이니까. 그런 일에는 반드시 책임이라는 것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직업군 속에 기업의 대표도 당연히 들어간다.
남의 인생을 바꿔 버린 명도혁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강태오에 차현우, 탁기준, 최민아까지. 미래를 뒤엎어 버렸으니 무조건 성공해야겠네. 명도혁 정신 차리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지금 그 첫 번째 책임이라는 것을 지러 도혁은 발을 재촉하고 있었다.
바로 김철준에게 찾아가 데리고 나갈 직원들의 퇴직을 직접 알리는 일이었다.
무려 4명의 전도유망한 직원을 잃게 될 태강애드의 대표이사 말이다.
-똑똑
“그래, 들어오시게, 우리 명도혁 씨. 오랜만에 나를 찾았다는데 무슨 일인가.”
“대표님.”
우리 명도혁이라며 반기는 그를 보자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평소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는지 김철준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러곤 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나쁜 소식이라도 전하려고 그러는 건가?”
“좋은 소식은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말해보게.”
“회사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뚝, 찻잔에 대려던 손길이 멈추었다.
그 손끝을 바라보던 도혁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졸업 전에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모양이로구만. 요즘 회사들이 이렇게 인재 경쟁에 치열하다니까.”
“그런 건 아니고…….”
“얼마 제안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거기서 50% 더 연봉 올려서 계약하면 어떻겠나.”
아직 졸업 전이라 스카웃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도혁이 한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대표님 저, 독립하려고 합니다.”
“뭐? 독립?”
김철준의 눈썹이 거칠게 말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도혁을 보더니 껄껄 웃어젖혔다.
“명도혁, 그래 인정한다. 남의 밑에서 오래 일할 그릇 아니지. 숱하게 봐와서 알아.”
“대표님.”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내 품에서 보내야 한다, 그런 날이 올 거다 생각은 했어.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
“배워. 한 십 년은 더 배우고 나가야지. 지금 젊은 패기로 경험 없이 나갔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이 바닥 보기보다 거칠어.”
“잘 알고 있습니다.”
명도혁에게 부족할 리가 없는 경험을 근거로 김철준이 그를 붙잡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아니면 못 할 거친 일도 더 거칠게 부딪혀 보려구요. 젊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패기는 인정인데…… 이것 참. 후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일찍 독립했지 않은가?”
“네. 대리 때 대일기획에서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잘 알고 있어. 만만치가 않아.”
“구르고 깨지더라도 꼭 해보고 싶습니다. 대표님.”
“이거 완전히 결심이 섰구만.”
김철준이 턱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혁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더 할 말이 있었다.
“후우, 그래 설마 혼자 할 생각은 아닐 거고, 같이할 친구는 있는가?”
“우리 신입팀 한수철, 최민아도 함께 퇴사할 예정입니다. 아마 다들 따로 와서 대표님께 인사드리겠지만, 제가 데리고 나가는 입장에서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인 듯하여 이렇게 미리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싹이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할 수 없지.”
“그리고…….”
“또 함께 나가는 사람이 있나?”
어쩔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도혁은 김철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탁기준 선배와 함께하려고 합니다.”
“아니, 기준이를? 탁기준?”
김철준이 찻잔을 탕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