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62화
김영석과 헤어지고 다시 태강애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정인이 굳었던 포커페이스를 풀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김영석 대표는 사모님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눈치기는 했는데. 이것 참 갑갑하네.”
“그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일단 사모님 만나 뵙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멋대로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김영석 대표님이 빤히 계속 보고 계셔서.”
“그래, 그 자리에서 딱 자를 수도 없으니 만나는 봐야지. 제품 확인한다고 손해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제품 굉장히 어려워. 신입이라 알는지 모르겠지만, 이 광고는 심의가 안 날 거야.”
“방송 광고 심의가 어려울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카피라이터가 심의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기획팀장님이야말로 직접 체감하지 못하셨을 겁니다만?
도혁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모든 TV 광고 소재는 심의가 떨어져야만 방송에 걸 수 있다.
특히 TV나 라디오 같은 방송 광고는 사전 심의인 데다,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조심스럽게 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있어야 말이지.
광고주는 좀 더 자극적으로 제품의 효능을 강조하려고 하고, 수위 조절 못 하면 심의는 절대 나지 않고. 중간에 끼여서 아주 죽을 맛이었다.
광고 시간까지 다 잡아놨는데 심의가 간당간당할 때, 카피라이터의 그 고통을 기획팀장이 어떻게 알겠는가.
도혁은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심호흡했다.
“명도혁 씨도 머리 아프구만. 이거 정말 골치가 아프다. 하필 대형 광고주 사모님이라서 거절하기도 그렇고.”
“저기, 팀장님 혹시 외주업체 생각하고 계시는 걸까요?”
도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강애드는 시쳇말로 하청 업체를 여럿 끼고 있었는데, 대부분 규모가 작은 대행사나 프로덕션이다.
간단한 일은 외주업체로 던지기는 하지만 김영석이 들으면 식겁할 일이라 이정인은 속으로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이정인이 흠칫 놀라며 도혁을 돌아보았다.
“역시 신기해. 신입이 외주 시스템도 알아?”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습니다.”
“선배들이 별걸 다 말해줬구만. 맞아. 지금으로서는 사이즈 맞는 업체 소개하거나 우리 이름으로 나가더라도 외주 처리하는 게 맞지. 근데 또 김영석 대표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신뢰가 떨어질 거고. 아, 머리야.”
도혁은 잠깐 심호흡을 하곤 이정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외주, 우리 신입 1팀으로 주시죠.”
“뭐?”
“신입 1팀에서 맡아보겠습니다. 완전히 전담해서요.”
“명도혁 씨, 괜찮겠어? 이거 위험부담이 있는 광고야.”
“그러니까 신입 1팀에게 맡긴다고 하세요. 그렇게 되면 아무튼 태강애드 직원이 진행하는 거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외주로 돌리면 김영석 대표님이 많이 서운해할 거예요.”
“하긴 명도혁 씨를 짚어서 미팅하고 싶어 했잖아. 우리 명도혁씨가 속한 신입 팀에서 진행한다고 하면 오케이할 거야. 내 탁기준이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일단 샴푸 광고주부터 만나보도록 해.”
그제야 이정인의 미간의 주름이 펴졌다.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그가 도혁을 바라보았다.
“계속 재밌는 기획 기대해도 되겠지? 우리 명도혁 씨?”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위트 있고 그런 스타일은 아닙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혁의 썰렁한 농담에 더 만족한 웃음을 터뜨리는 이정인이었다. 그렇게 기획국에서의 일거리가 하나 더 늘어버렸다.
* * *
세상을 살다 보면 돌이키기 힘든 일이 있게 마련이다. 한번 놓치면 좀처럼 붙잡기 어려운 것들.
예를 들자면 직장, 명예, 여자, 사회적 성공 그리고.
머리카락 같은 것 말이다.
회귀 직후에 가장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 중 하나가 풍성한 머리카락이었다고 하면 오버일까.
회귀 전에 이미 탈모가 진행되고 있던 상황이었거든.
유전성 탈모에 스트레스가 더해져서 듬성듬성해진 머리카락이 싫어서 거울조차 잘 보지 않고 살았었다.
도혁은 손바닥으로 제 머리를 어루만지며 다시 한번 가슴이 웅장해져 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김영석의 아내가 운영하는 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차혜진`s 탈모랩]
“안녕하십니까. 태강애드에서 온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세요. 차혜진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처음 만난 차혜진 대표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하얀 가운을 툭 걸치고 머리를 질끈 대충 묶었을 뿐인데도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미모였다.
20대와 같이 풋풋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기품 있고 고상한 매력이 넘치는 성숙한 아름다움이 있다고나 할까.
“이쪽으로 앉으시죠. 커피 하시겠어요?”
차혜진이 우아한 손길로 핸드드립을 내리며 도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남편이 도혁 씨 얘기 정말 많이 했어요. 일레라 가구 캠페인을 진두지휘했다고 들었어요.”
“태강애드 신입1팀이 함께한 겁니다.”
“짚어서 명도혁 씨 칭찬만 하던걸요? 제가 그 얘기 듣고 남편 조른 거예요. 태강애드 명도혁 씨 소개해 줄 수 있냐구요.”
“영광이네요.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혜진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도혁은 연구실의 실내를 둘러보았다.
규모에 비해 현대적이고 위생적인 설비가 돋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커피 향을 뚫을 정도로 강력한 한약 냄새가 인상적이었다.
다모아 샴푸라는 이름답게 창포와 한약재를 모두 모아 만든 한방 샴푸임을 제품 설명을 듣지 않고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향이었다.
주변을 살피는 동안 차혜진이 커피를 세팅하고 도혁은 받은 머그잔에 담긴 커피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향과 맛은 최상급 커피임을.
도혁이 고개를 기울이며 커피의 맛을 칭찬했다.
“엄청나네요. 최근에 마셔본 커피 중 최고입니다.”
“제가 커피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마실 만하시다니 다행이에요.”
“마시자마자 카페 광고 만들고 싶어지는데요? 그 정도로 향과 맛이 깊어요.”
“커피가 탈모 샴푸보다는 잘 팔리겠죠. 그냥 카페나 할까?”
차혜진이 농담에 뼈를 심어 한탄을 뱉었다.
“명도혁 씨,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이 탈모 샴푸 시장성이 있을까요?”
“시장성이라. 일단 제품과 가격대, 그리고 생각하시는 마케팅 방향이 있습니까?”
“아무 생각 없어요. 정말로요.”
차혜진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갈색 병에 담긴 샴푸를 들었다.
“저는 원래 화장품 연구원이에요. 결혼 전에 에모라 화장품 화학부에서 근무했구요.”
“네. 연구원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이들 키우고 사업 뒷바라지에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개발이라는 걸 다시 해보고 싶은 거예요. 너무 하고 싶어 하니까 남편이 한번 해보라고 밀어주겠다길래, 탈모 샴푸를 기획해 본 거고요.”
“그 집안에 탈모인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혹시 탈모인의 고통을 아시나요? 아, 모르시겠구나.”
차혜진이 풍성한 도혁의 머리카락을 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도혁 역시 함께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유전적 탈모에 원형 탈모로 고통받으며 아침마다 마이녹실을 바르고 출근하던 일이 생각났거든.
하지만 지금은 풍성한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20대의 몸이었기에 엉거주춤한 미소로 커피만 홀짝였다.
“우리 오빠가 처음 탈모를 겪을 때 이야기를 들었었어요. 군대 갔을 때, 그러니까 병장 때부터 빠졌다고 했어요.”
“20대 초반부터 탈모가 진행됐군요.”
“네. 우리 집 유전자가 워낙 강력해서요. 오빠가 그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차라리 손이나 다른 신체 부위가 없는 게 낫겠다구요.”
“…….”
“그냥 신체 부위 중 하나가 없는 건 똑같은데, 대머리라고 우습게 보고 희화화되는 게 제일 못 참겠다고 하더군요.”
정말 맞는 말이다. 사실 그냥 털이잖아? 하지만 또 그냥 털은 아니지.
한 사람의 탈모인으로서 도혁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차혜진처럼 역시나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말을 들은 이후 탈모에 집착하고 연구하게 됐어요. 양가의 유전자가 워낙 강력해서 우리 아들들이 오빠와 같은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그러셨군요. 모정을 담은 샴푸인가요.”
“그렇죠. 엄마의 정성으로 정말 모든 걸 쏟아부었어요. 주요 성분인 창포 발효 효모뿐 아니라 보조 한약재도 수십 가지가 넘게 들어갔어요.”
“그럼 제대로 팔아야죠.”
도혁이 익숙한 갈색 병을 들었다.
탈모 시장에 반향을 일으켰던, 그리고 도혁도 회귀 전에 꾸준히 사용했던 그 샴푸 말이다.
향도 좋고 거품도 부드럽고 무엇보다 굉장히 순했던 걸로 기억한다.
탈모 약이 독해서 병행해서 쓰기 그만이었지.
샴푸 병을 만지작거리는 도혁을 보며 차혜진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팔릴까요? 아시다시피 샴푸는 대기업에서만 나오고, 저는 신문광고에서 파는 탈모 샴푸처럼 비싸게 팔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가격대는 일반 샴푸보다 조금 비싼 정도로 생각하시는 거죠?”
“네. 몇몇 제품은 백만 원대에 달하더라구요. 이게 말이 돼요? 약점을 이용해서 폭리를 취하는 거로밖에는 안 보여요.”
“매우 동감합니다.”
설비는 현대적이었지만 대기업과 비교하면 가내수공업에 가까웠다.
인지도 0, 충성도 0, 미안하지만 연구원인 광고주의 마케팅 감각도 0.
하지만 제품력과 입소문으로 야금야금 시장을 장악했던 다모아 샴푸였다.
무려 일천만 탈모인을 위해 마케팅을 강화해서 좀 더 빠르게, 그리고 널리 이 샴푸를 알려야겠다.
도혁은 마케터로서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제가 제품을 몇 개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히 써보셔야죠. 제 진심은 아시겠죠?”
“저 역시 이번 광고에 진심입니다.”
도혁이 차혜진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불모지에 가까운 시장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풍성하신 분이 탈모인에게 이렇게 공감해 주시다니, 감동했어요.”
“젊을 때 미리미리 대비해야 하니까요. 그 점도 강조할 생각입니다.”
유비무환, 네 글자를 가슴속에 깊이 새기며 도혁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참. 연구원이시니까 더 잘 아시겠지만, 탈모는 샴푸만으론 치료가 안 되잖아요.”
“그건 그래요. 우리 샴푸가 두피 개선이나 비듬 완화에는 효과가 탁월하지만, 유전적 탈모를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탈모도 초기 대응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패키지에 꼭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탈모 약을 조기에 사용해야 하고 샴푸는 보조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구요.”
“아, 그렇게 할게요. 저 역시 탈모 퇴치가 최종 목표니까요.”
끄덕이는 차혜진을 보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드님들 기미가 보이면 꼭 병원 가라고 하세요. 꼭입니다!”
털 잃고 외양간 고쳤던 과거를 되새기며 도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에야말로 지킨다. 반드시.
그의 머릿속에는 다다다다 빠르게 탈모 샴푸의 카피들이 나열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