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61화
“메인 타깃은 없습니다.”
“뭐? 메인 타깃이 없다고?”
탁기준이 놀라 소리쳤다.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차근차근 한번 보시죠. 3단계 로드맵은 괜히 짠 게 아닙니다.”
도혁의 말에 다시 화면에 집중한 탁기준의 눈살이 조금씩 펴졌다.
“어허, 이래서 최민아가 디자인 중이었구만. 이 정도는 제작국에 의뢰해도 되는데.”
“저희 기획안에 맞춰서 수정도 해야 하니까요. 민아가 하는 게 편할 거 같아서 진행한 겁니다.”
“네. 선배님. 기획 방향 귀 쫑긋하고 듣고 있으니까 저도 AE로서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림 그리게 해주세요. 제발요.”
최민아가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탁기준이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신입들을 둘러보았다.
“으이구 이러고 나 무섭다고 그러지. 지들 마음대로 디자인도 하고 타깃도 없애 버리고 할 거면서.”
“그래서 선배님, 이번 기획안 별로입니까?”
“그럴 리가. 신박하다. 신박하긴 한데 이걸 가지고 또 어떻게 광고주를 설득할지가 관건인 거지.”
“그거야 뭐, 선배님 전공이시니까요. 믿습니다.”
“또 비행기 태우지 말고. 야, 우리 좀비들, 고생했는데 제대로 된 기획국 맛을 봐야지?”
“맛이요?”
탁기준이 입매를 늘이며 느긋하게 웃었다.
“따라와 보면 알아. 이게 바로 기획국이다, 느끼게 해줄 테니까.”
“선배님 우리 집에 가는 거 아닙니까? 지금 밤 열한 시입니다.”
“초저녁이네. 짐 싸.”
그리고 헬 게이트가 다시 열렸다.
1차는 삼겹살에 소주, 2차 맥주, 3차 다시 소주에 노래방 한번 갔다가 4차로 감자탕집에서 다시 소주를 마시고 찢어졌다.
정확히 새벽 3시 30분.
도혁은 무거운 발을 끌어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털썩 눕자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래. 밤새워 근무하고 술 마시고, 또 광고주 접대하고 PT를 하면서 피 튀기게 사는 그런 시절이었다.
기획팀의 그 살인적인 일정에 맞추어 카피를 쓰며 함께 밤을 지새웠었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언젠가 이 조직 문화를 타파하고 말 것이라고 다짐하며 도혁은 잠이 들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 * *
“흉악한 사람들, 와.”
다음 날 출근한 도혁은 단정한 자세로 벌써 업무에 임하고 있는 기획국 사람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강철 체력 실화냐? 나야 젊어서 그렇다지만 기획1팀장님 뭔데? 와, 대박. 대애박.”
“그러니까. 술도 술이지만 잠이 부족해서 죽을 맛인데 대단들 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시에 출근해 벌써 업무에 몰입 중인 기획국 직원들이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한수철의 팔을 이끌어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서는 역시나 탁기준이 어젯밤 맥주 한 잔이라도 했냐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기획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도혁은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속으로 다짐을 새겼다.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전생처럼 일만 하고 살지 말자 제발. 자꾸 까먹는구만.’
젊을 때야 야근하고 밤새워 술 먹어도 멀쩡한 것 같지만, 속으로 뼈가 삭아가고 있음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는 도혁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선배를 보고 이런 결심을 하는 게 조금 미안하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 생각하냐. 어제 잘 들어갔고?”
“네. 선배님 굿 모닝입니다.”
준비된 예비 AE 한수철이 숙취 해소 음료를 내밀었다.
“선배님 이거 드십시오.”
“술 얼마나 마셨다고 이런 걸 다 먹냐만, 고맙다. 잘 마실게.”
바이플렉 기획 초안이 나오고 한결 부드러워진 탁기준이었다.
신입들이 모여 막 회의를 시작하려는데 누군가 출입문을 열었다.
“우리 엘리트 신입1팀. 바이플렉 건은 잘 진행되고 있나?”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기획1팀장 이정인이었다. 모두 일어나려 하자 손을 들어 앉으라고 표시를 하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오늘 내가 명도혁 씨 좀 빌려 가도 되겠나?”
“명도혁을요?”
“그래. 콕 집어서 우리 명도혁 씨를 찾는 광고주가 있어서 말이지.”
도혁은 영문도 모른 채 기획1팀장을 따라 광고주 미팅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 * *
‘도저히 안 되겠다. 진짜 차부터 사야겠어.’
무려 기획팀장이 모는 차를 보조석에 앉아서 타는 신입이라니.
탁기준 차를 얻어 탈 때랑은 차원이 다른 민망함이다.
도혁은 운전하는 이정인의 눈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면허는 있는데 아직 차가 없어서요. 다음에는 제가 모실게요.”
“괜찮아. 신입이 무슨 돈이 있어서 차를 사나. 정 그러면 회사 차 몰고 다니든지.”
“회사 차 써도 됩니까?”
“다른 국은 몰라도 기획국은 출장이 일정의 절반 이상이라고. 내 총무과에 말해 놓을 테니까 필요하면 써.”
“감사합니다. 팀장님.”
신입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미안할 일은 아니었지만, 십수 년의 사회생활 짬밥이 있다 보니 가시방석 같은 건 사실이었다.
불편해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이정인이 신기한 듯 도혁을 잠깐 돌아보았다.
“명도혁 씨는 참 재밌어.”
“네? 제가 아쉽게도 위트가 넘치고 그런 스타일은 아닌데요, 팀장님.”
“개그를 한다는 게 아니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는 거지.”
“구경하는 재미요?”
“그래. 다음번에는 어떤 기획을 가져올까, 이번에는 무슨 캠페인인가, 뭘로 또 우리를 놀래줄 건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당연히 칭찬이지. 지금 우리가 만날 광고주도 명도혁 씨 팬이라고.”
무려 팬이라고 말한 광고주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간 일식집 룸에는 일레라 가구의 김영석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오셨습니까? 20분 여유 두고 도착했는데요.”
“제가 성격이 급해서 원래 약속에 지나치게 빨리 오는 편입니다. 마음 쓰지 마세요. 어이구 우리 명도혁 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지요? 대표님.”
“그럼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김영석은 오랜만에 만나는 도혁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일레라 가구 매출 신장한 것 보셨지요? 그 브랜드명 외치는 기업 이미지 광고 후에 후속작 터지고 학생 가구가 대박이 났습니다.”
“아마 봄 시즌 되면 훨씬 더 효과를 보실 겁니다.”
“그럼요, 학교도 안 가는데 새 학기가 기대된다니까요?”
“시장을 개척하셨으니까 이제 수확할 일만 남았습니다. 대표님. 하하.”
학생 가구 시장을 개척하다시피 했으니, 이후 후속 기업에서 광고를 시작하더라도 유리할 정도로 시장을 선점한 꼴이었다.
학생 가구 광고가 나오는 순간 소비자의 머릿속에서는 ‘일레라’가 떠오를 테니까. 그것이 시장 1위의 힘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개척지 변비약 시장을 떠올리며 도혁은 행운을 기도했다.
마케팅이라는 건 결국 전략과 제품 무엇보다 운이 따라야 하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운도 준비된 자의 것이지만 말이다. 지금 앞에 있는 김영석 사장처럼.
도혁 역시 김영석 사장의 흐뭇한 표정에 미소로 화답하며 즐거운 식사가 이어졌다.
“낮이지만 한잔하시겠습니까?”
“저는 차를 가져와서요. 명도혁 씨 한잔하겠나?”
“근무시간인데 괜찮습니까?”
“기획팀장이랑 같이 있는데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나. 대표님 우리 신입이 이렇게 FM입니다. 하하.”
대낮부터 사케가 들어오고 거나하게 술잔이 오고 갔다.
도혁은 김영석이 주는 술잔을 받으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김영석 대표가 아무 용건 없이 대낮에 술이나 마시고 할 사람이 아닌데? 기획팀장까지 부르는 것도 그렇고.
몇 잔 술이 들어가자 역시 김영석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거 좀 꺼내기 조심스러운 말이기는 한데, 혹시 아주 작은 기업의 광고도 하십니까?”
“어떤 회사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거 원, 말씀드리기도 좀 민망하네요. 우리 와이프가 최근에 회사를 하나 차렸습니다. 샴푸 회사요.”
“샴푸요?”
이정인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샴푸라면 대기업이 독식하다시피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아주 작은 중소업체들이 기능성 샴푸를 만들기도 했지만 사장되기 일쑤였고.
도혁 역시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며 김영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가내수공업 수준입니다. 정말로요. 하지만 연구 자체는 엄청나게 했습니다. 아내가 에모라 화장품 연구원 출신이거든요. 같이 퇴사한 동료 한 명이랑 오 년 넘게 연구를 했습니다.”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내가 많이 뜯어말려 봤는데, 말을 안 들어요, 이 사람이.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편하게 살면 좋겠구만.”
“뭔가 신념이 있으신 겁니까? 기능성 제품일 것 같은데.”
한 분야를 그렇게까지 파고드는 열정이라니.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사연을 물었다.
“탈모요. 친정 쪽이 모조리 대머리입니다. 아쉽게도 저희 집안도 그렇죠.”
“어이구, 아직 괜찮으신데요.”
전혀 괜찮지 않은 듬성듬성한 머리를 손으로 휘이 훑으며 김영석이 민망해했다.
“이정인 팀장님, 역시 사회생활 잘하십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가망이 없고요. 우리 아들이 문제입니다.”
“아, 아드님이 있으시군요.”
“아들만 둘인데 둘 다 대머리 확정 아닙니까? 아내가 이걸 못 견디겠나 봅니다. 전공이 그쪽이다 보니, 어떡해서든 약용 화장품을 개발할 거라고 고집입니다.”
하아, 병원을 가셔야 합니다. 탈모는 하루라도 빨리 병원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데.
도혁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일단 김영석의 말을 듣기로 했다.
“하루 종일 한약을 찌고 다리고, 사실 정성으로 탈모가 완치된다면 벌써 치료됐을 거예요.”
“대단하시군요. 그럼 이제 출시 단계까지 연구가 진행된 겁니까?”
“그렇다고 하네요. 자신만만하더라구요. 탈모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말이죠.”
이정인과 도혁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규모 업체라서가 아니라 일단 심의가 나지 않을 것이 분명한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탈모 약 개발에 성공했다면 노벨상을 수상했을 텐데, 그럴 리는 없을 거고 자연 성분으로 정성껏 만든 샴푸 정도일 거다.
정확한 효능이 입증되지 않으면 기능성 제품은 절대 방송 광고 심의가 나지 않는다.
소비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권익 보호 장치란 말이다.
넘을 벽이 한두 가지가 아닌 어려운 광고주였다.
돈도 딱히 될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이 광고를 의뢰한 주인공이 최근 태강애드의 신규 광고주 일레라 김영석이었다.
이정인은 프로답게 난감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김영석이 슬그머니 가방에서 샴푸를 꺼냈다.
“이 제품입니다. 이름 어제 지었어요. 다모아 샴푸.”
이런, 아는 패키지잖아? 이거라면 해볼 만하겠는데?
도혁은 턱을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그리곤 이정인의 눈치가 조금 보였지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대표님, 혹시 사모님을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직접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이렇게 전해 듣는 것과 개발자와 대화하는 건 다르니까요.”
“아이고 이거, 내가 안사람한테 면이 서겠습니다. 사실 태강애드를 꼭 소개해 달라고 했거든요.”
“네. 제가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곤 있었지만, 이정인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도혁은 안심하라는 듯 짧은 눈짓을 보내곤 술잔을 들었다.
기획국 신입답게, AE의 영업 미소를 한껏 유지한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