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8화
김민수가 도혁에게 주먹을 들이밀던 찰나였다.
“여기가 벌써 시안을 완성했다는 1팀인가? 아니, 분위기가 얼마나 좋으면 벌써……?”
“대, 대표님!!!”
태강애드의 수장, 김철준 대표였다.
그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죄송합니다, 대표님.”
곁에 있던 이정인 팀장이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이정인이 1팀 시안 보고를 자랑삼아 했던 모양이고, 격려 차원에서 한번 가보자고 했겠지.
아니면 김철준이 인턴들 어쩌고 있는지 먼저 물어봤을 수도 있겠고.
‘이렇든 저렇든 새 됐네. 김철준 대표 이런 거 진짜 싫어하는데.’
도혁은 저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깊숙이 삼켰다.
김철준은 팀워크를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건 태강애드를 업계 최고로 키운 자산이기도 했다.
김철준은 사내에서 끝없이 경쟁을 시켰고, 손발이 맞는 프로젝트 팀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고퀄리티의 시안을 지속적으로 뽑아내는 태강애드만의 노하우라고나 할까.
팀워크는 도혁이 인턴1팀을 전부 안고 가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대로 쭉 같이 일하고 싶어서.
그런데 팀원끼리 싸움이 붙어서 주먹까지 들이대고 있으니, 우승은커녕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김철준이 인상을 구기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좀 설명해 보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즉시 유감을 표한 도혁과 달리 김민수는 얼굴을 사정없이 찡그리며 소리를 질렀다.
“명도혁 저 자식이 팀워크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요. 자기 마음대로 컨셉 잡아 오고 시안도 완성하고.”
“이게 무슨 소리야! 회의 안 했어? 1팀 팀장, 멘토, 그리고 주먹다짐하던 두 사람, 다 대표실로 따라와!”
또 대표실에 끌려가게 생겼다.
수석 카피라이터 때도 몇 번 만날 일이 없었는데 자주 만납니다. 김철준 대표님.
도혁은 난감한 눈으로 김민수를 째려보았다.
‘아, 저 자식 진짜 당장 치워 버리고 싶네.’
김민수 입장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도혁이 꼴 보기 싫었던 게 분명했다.
속 좁은 자식, 속으로 욕을 삼키며 대표실 문 앞에 섰다.
탁기준이 곁에 와 속삭였다.
“괜찮아. 차라리 잘됐다. 이번 참에 쓰윽.”
탁기준이 손날로 목을 그어 보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요. 이번 기회에 김민수를 날려 버리면 좋기는 하겠다.
탁기준과 눈빛을 교환하며 대표실로 들어갔다.
“일단, 1팀 팀장 얘기부터 들어보지. 이 소란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먼저 죄송합니다. 대표님. 분란을 일으킨 점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됐고, 상황 설명을 해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님.”
탁기준이 나서서 한수철의 말을 끊었다.
“멘토인 제가 실질적인 리더인데 잘못 관리한 겁니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래, 그럼 탁기준이가 말해봐. 똘똘하니 애들 잘 끌어줄 거라 믿고 멘토로 발탁한 걸로 아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김철준의 한쪽 눈썹이 꿈틀 이마 사이로 파고들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김철준 대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팀워크를 해치는 건 김민수입니다.”
“뭐라고요? 아, 열받네.”
“바로 저런 태도요. 누가 있든 안하무인이고 사사건건 딴지를 걸어서 팀원들이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탁기준의 말에 김민수가 발끈했다.
“공정한 경쟁이면 내가 이렇게 흥분합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김철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디서 무슨 빽을 타고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명도혁을 싸고도는 꼴이 웃겨서요.”
“말조심해. 빽이라니. 그리고 불공정?”
탁기준이 어이없어하자 말을 보태려고 하다가 말았다.
김민수의 입장을 끝까지 들어보려고.
“주변 의견은 무시하고 명도혁이 말한 대로만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그건 회의를 통해서 나온 결론이잖아!”
“타깃 잡는 것부터 전체 기획, 컨셉, 심지어 스칸디나비아의 봄인지, 컨셉 카피도 제멋대로 정하구요.”
“잠시만, 뭐라고?”
김철준이 왼팔을 들어 뚝, 김민수의 말을 끊어버렸다.
“다시 탁기준이가 말해봐. 스칸디나비아의 봄?”
“네. 시안도 나왔습니다. 한번 보시죠.”
탁기준이 결재판에 고이 접어둔 디자인 시안을 꺼내 김철준의 앞에 펼쳐 보였다.
그걸 본 김철준은 한참 턱을 매만지며 시안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이걸 명도혁이 맘대로 했다, 지금 그걸 김민수가 주장하는 거지?”
“마음대로 한 적 없습니다. 매번 회의했고, 제 의견이 반영됐을 뿐입니다.”
도혁이 나서서 말하자 김철준의 낯빛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곤 다시 시안을 살피며 말했다.
“메인 모델이 아역 출신이네?”
“제가 방송국 쪽에 알아봤는데, 김기훈 감독님 신작 주연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아역 딱지 떼주겠다고 감독님이 벼르고 있다고 하시던데요?”
“그래?”
김민수 성토의 장에서 시안 컨펌으로 상황이 변해 버렸다.
그걸 눈치챈 김민수가 다시 씩씩대며 제 주장을 펼쳤다.
“지금 시안 보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그럼 인턴들 한탄이나 들을 때인가?”
김철준의 지적이 귓가에 날카롭게 꽂혔다.
“광고쟁이는 결과물로 말하는 거야. 과정이 아니라.”
“대표님!!”
“1팀 팀워크 별로고 불협화음 있는 건 인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퀄리티의 시안이 나왔다는 것도 파악했어.”
김철준이 넷을 동시에 바라보며 눈빛을 굳혔다.
“팀 협력도 점수에 들어간다는 걸 알 거다. 전부 탈락하고 싶어?”
“아닙니다. 제가 책임지고 다시 이끌어보겠습니다.”
“그래 탁기준이가 책임지고 계속 진행해 봐.”
“네. 알겠습니다.”
“이상. 모두 나가보도록.”
그렇게 김민수의 짧은 반란은 진정되었다.
* * *
우여곡절 끝에 경쟁 프레젠테이션의 날이 밝았다.
탁기준이 한수철에게 넥타이를 선물했다. 피티 타이였다.
“정식 데뷔는 아니지만 첫 번째 피티니까. 잘해라.”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피티 타이.
태강애드에서는 선배가 처음 발표 하는 프리젠터 AE에게 넥타이를 선물한다. 대대로 내려오는 관례였다.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탁기준 선배님.”
“별말을 다 한다. 나중에 너네도 후배한테 그대로 해주면 돼. 나한테 잘해줄 생각 하지 말고.”
“네. 선배님.”
“그래.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좋은 성과 있을 거다. 그럼 출발해 볼까!”
“파이팅 한번 할까요?”
최민아의 말에 오글거리지만 손을 모아 파이팅을 했다.
“하나 둘 셋, 파이팅!!”
모은 손 위에 한 손이 모자랐다. 김민수였다.
김민수는 오늘 결근했다.
끝내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실거리더니 결국은 프레젠테이션 당일에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
그의 불참이 찜찜했지만 중요한 날이므로 불안한 마음은 일단 덮기로 한다.
대회의실을 향하는 발끝이 조금 떨렸다.
‘이놈의 피티는 해도 해도 긴장되냐.’
카피라이터이기에 직접 발표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주로 참관하는 쪽이었다. 그래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긴장과 설렘. 그리고 흥분이 점철된 날 것의 현장. 그것이 바로 경쟁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카피라이터도 이런데 발표자인 한수철은 얼마나 떨릴까,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차분하게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었다.
새까맣게 줄이 그어진 시나리오.
한수철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상 골백번은 더 연습했을 거다.
그에게 다가가 격려의 말을 건넸다.
“힘내라. 너는 잘할 거다.”
“이상하게 안 떨리네. 오히려 연습 때보다 담담해.”
“발표 체질인가 보지.”
한수철은 싱긋 웃으며 다시 시나리오에 눈길을 돌렸다.
곧 문이 열리고 하나둘, 심사위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철준 대표와 정낙운 기획국장, 성민욱 제작국장과 각 팀의 팀장급 임원이 총출동했다.
“어??”
그런데 낯익은 얼굴도 함께 심사 위원으로 참석했다.
엘레라 가구의 김영석 대표였다.
‘광고주가 직접 사내 프레젠테이션에 참가하다니.’
그동안 김철준이 상당한 친분을 쌓아놓은 모양이다. 둘이 절친인 듯 친해 보였다.
역시 광고주 한정 친화력 대장인 김철준 대표다웠다.
짧게 감탄하는 사이 오늘의 사회를 맡은 이정인 기획1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자, 모두 앉으시고 오늘 이 자리는 인턴 다섯 팀과 우리 태강애드의 기획 두 팀, 그렇게 총 일곱 팀이 공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팀이 많은 관계로 이십 분 이상 진행하면 마이크가 끊기는 점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턴 외에 태강애드의 기획팀까지 참여했다. 인턴들에게만 맡기기 불안해서 세운 보험이겠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걸 곧 알게 될 거다.
그만큼 명도혁은 자신이 있었다.
도혁은 한수철과 눈길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발표 순서를 정해보도록 하죠. 각 팀 발표자 앞으로 나오세요.”
곧 한수철이 발표 순서를 정하는 공을 뽑았고, 우리는 세 번째로 발표하게 되었다.
순서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첫 번째는 너무 부담스럽고 뒤로 갈수록 집중도가 떨어진다.
심사위원도 사람인지라 같은 얘기 계속 들으며 몸을 뒤트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자 그럼, 팀별로 만들어 온 유인물을 배포하겠습니다.”
다른 팀의 결과물이 무척 궁금했었다.
받아 든 프린트를 넘기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어떻게 된 일이지?’
도혁이 당황스러움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경쟁 프레젠테이션의 막이 올랐다.
“자, 그럼 첫 번째 팀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5팀 발표자 나와주세요.”
“안녕하세요. 5팀의 김미영입니다.”
오, 시작부터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성 프리젠터다. 흥미로운 듯 심사 위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그럼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기획안 발표 전에 저희 컨셉을 담은 간단한 이미지 하나 보고 가시죠.”
불이 꺼지고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을 가득 메운 벚꽃.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카피 한 줄이 떠올랐다.
-시작, 봄, 그리고 핀란드.
커다랗게 ‘Spring in Finland’라는 영문이 흘러갔다.
도혁은 각 팀의 컨셉이 적힌 프린트물과 5팀의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정확히 인턴 다섯 팀 중 3팀이 봄과 스칸디나비아의 조합으로 메인 컨셉을 뽑아 왔다.
특히 5팀의 저 벚꽃과 애니메이션은 표절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최민아의 시안과 닮아 있었다.
설마, 컨셉이랑 시안이 샌 건가?
순간 대회의실의 옆문으로 김민수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틀린 입매에 비열함이 흘렀다.
김민수 저 자식이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닌 모양인데.
도혁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다가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걸 본 김민수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 자식아. 너는 나를 너무 만만하게 봤어. 이 바닥에서 십수 년 굴렀는데 이 정도로 밟힐 명도혁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