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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6화 (6/252)

광고 천재 명도혁 6화

탁기준이 미션을 내주고 정확히 4시간 뒤, 도혁은 회사로 돌아왔다.

당연히 대회의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도혁은 탁기준을 찾아 기획 1팀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다녀왔습니다.”

“뭐? 벌써 왔다고?”

탁기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네. 뭐 벌써랄 게 있나요. 4시간이나 지났는데요.”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도혁이 계약서 다섯 장을 꺼내어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광고주는 일레라 가구. 총 다섯 건입니다. ‘박경아의 라디오 시절’ 등 NBD 방송국 라디오 다섯 프로그램 상품권 광고 계약했습니다.”

“다섯 개? 계약을 땄다고?”

“네. 그렇습니다.”

탁기준이 한쪽 눈썹을 치키며 도혁을 돌아보았다. ‘이 자식 뭐지?’라는 눈빛으로.

“뭐 잘했네. 이번 미션 1등. 가봐.”

“계약은 계약이고 선배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무슨 말인데?”

“광고주께서 퇴근 시간 라디오 CM까지 의뢰하셨습니다. 그래서 내일까지 기획안이랑 시안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탁기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동공이 크게 부푸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CM? 라디오 CM을 땄다는 거야?”

“라디오 프로그램 광고 희망하십니다.”

“야, 인턴! NBD 방송국 AM은 아무나 못 들어가. 이 자식 들떠서 사고 치고 왔네.”

“옵션도 설명드렸습니다. 옵션 걸면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놀란 탁기준이 몸을 완전히 돌려 도혁을 바라보았다.

“옵션까지? 인턴 너 옵션이 뭔지는 아냐?”

“아니까 팔았죠. 팔아 오라면서요. 아무튼 기획안 좀 준비해 주십시오, 선배님. 내일까지 꼭 가져오라고 하셨거든요.”

“아니, 기획안이라는 게 툭 하면 톡 나오는 게 아니야.”

“그럼 저는 선배님 믿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야! 저 자식 저거 진짜 또라이네. 야 명도혁!”

뭐라고 욕하는 거 같은데 모른 척 나와 버렸다.

카피라는 게 툭 하면 톡 나와야 하지 않냐고 구박하던 탁기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거 은근 재밌네. 이 맛에 탁기준이 제작팀 굴렸구만.

넓은 마음으로 탁기준의 심정을 이해하며 커피를 입속에 넣었다.

시럽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가 그렇게 달달할 수가 없었다.

‘슬슬 다시 나타날 때가 됐는데.’

“야!! 명도혁!”

그럼 그렇지.

다급한 탁기준의 목소리에 돌아보지 않고 직진해 버렸다.

급박한 발소리가 로비에 울렸다.

“야, 명도혁 이 자식아,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네?”

“브리핑은 해주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아, 브리핑.”

그거야말로 기다리던 말이었다.

오래전 탁기준의 브리핑이 떠올랐던 것이다.

-왜 있잖아. 그거 좀 응? 귀에 팍 꽂히게, 예쁘게 좀 만들어봐.

-예?

-거, 광고주 이름만 들어도 감이 탁 안 오나? 카피 쓰는 사람이?

탁기준은 대충 말해주고 철저하게 컨펌하기로 소문난 AE였다.

오죽하면 제작팀에서 ‘감이탁’으로 불렸을까.

아픔의 감이탁을 들이대며 도혁이 탁기준에게 말했다.

“감이 탁 안 오십니까? 광고주 이름만 들어도 기획의 감이 팍 꽂히실 것 같은 인상이신데요.”

“뭐 내가 좀 그렇기는 한데, 이번 건은 광고주를 직접 만난 게 아니라서….”

“에이,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기획 1팀 최고 에이스시잖아요. 브리핑 같은 건 딱히 없는데요. 저도 인턴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광고주가 그냥 기획안 가져오라고 했을 뿐인걸요.”

인턴한테 뭘 바라냐, 네가 알아서 하라는 메시지를 최대한 공손하게 전했다.

다급한 탁기준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와, 천하의 탁기준이 긴장을 다 하네?

하긴 인턴이 물어 온 라디오 광고를 대리가 날리는 모습은 볼만하겠다.

소문이라도 나면 커리어에 금이 쫙 가버리겠지.

탁기준이 도저히 안 되겠다며 1층 베이커리에 도혁을 데려다 앉혔다.

케이크와 커피를 억지로 사 안기더니 도혁을 달래기 시작했다.

“일단 광고주가 뭐라고 했는지 다 말해봐. 인턴인 거 감안하고 들을 테니까.”

“진짜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광고주가 딱히 한 말이 없었거든요.”

사실이었다. 설명은 명도혁이 다 했으니까.

김영석 대표는 그저 고개를 주억이다가 계약서에 사인한 것뿐이었다.

“CM송 얘기는 나왔습니다. CM송은 꼭 넣어달라시더라구요.”

“그, 그래야지. 당연히.”

바야흐로 라디오 CM의 시대였다.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울려 퍼지는 CM송을 전 국민이 따라 부르던 CM송의 전성시대.

도저히 뺄 수 없는 카드였다.

탁기준은 하루 만에 CM송 초안까지 짜야 할 판이었다.

잔뜩 구겨진 탁기준의 얼굴을 보니 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경쾌한 기분으로 커피 잔에 입술을 대었다.

탁기준 역시 목이 탔는지 냉수를 들이켰다.

“혹시 그 회사 대표가 너희 집안사람이냐? 너 일레라 가구랑 무슨 관계 있어?”

“아니요. 김영석 대표님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만.”

“그럼 생짜로 계약을 따 왔단 말이야? 4시간 만에 광고 의뢰를? 누구를 등신으로 아나. 빨리 썰 좀 풀어봐. 김 대표가 뭐라고 했어?”

당연히 지인 아니냐며 탁기준이 어이없어했다.

하긴 인맥을 동원하지 않으면 인턴 나부랭이가 4시간 만에 광고 의뢰를 받아오는 게 불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정말 김영석 대표는 한 말이 없는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미소에 탁기준이 폭발했다.

“명도혁 너 지금 웃었냐? 이 자식 이거 안 되겠네. 어디서 약 팔고 와서 사기를 쳐?”

“계약서 허위 아닌데요. 궁금하시면 직접 확인해 보시던가요.”

“무슨 소란이야!”

탁기준의 높아진 목소리에 지나가던 조태진이 소리를 질렀다.

“과장님 오셨습니까! 제작팀 조태진 과장님이셔. 인사드려!”

“어이, 명도혁 씨! 출근 잘하고 있나? 오늘 첫날이지?”

“네. 조 과장님 덕분에 첫 출근 잘했습니다.”

도혁이 고개를 숙이며 조태진과 악수하자 탁기준이 놀라 둘을 바라보았다.

인턴이 첫날부터 광고를 따 오질 않나, 거기에 조태진 과장과 아는 사이라니.

탁기준이 놀랄 법도 했다.

빤히 도혁의 임시 사원증을 바라보던 조태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첫 출근인 명도혁 씨가 왜 혼이 나고 있었을까? 탁기준 이 자식, 인턴 갈구고 있었냐?”

“과장님 갈구다니요. 오해십니다.”

“내가 봤는데 인마. 시끄러워서 와본 거야!”

“교육의 일환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가르치는 중이었습니다.”

“인턴이 그럴 일이 뭐가 있어서. 여기가 군대냐? 수평적 조직 문화 몰라?”

수평이라는 말에 또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광고대행사는 얼핏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하는 것 같지만, 수평적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

일반 기업이나 관공서의 관료제에 특유의 도제 문화가 더해졌다고나 할까.

선후배 관계 같기도, 사제 관계 같기도 한 묘한 구도가 혼재하는 곳.

유연하면서도 엄격한, 아무튼 특이한 기업 문화다.

조태진 과장은 명도혁의 미소가신경 쓰였는지 조금 더 인상을 구기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럼 우리 AE 탁기준이가 카피라이터 지망생 명도혁을 어떻게 갈구고 있었는지 좀 들어볼까?”

“오해십니다. 과장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커피 좀 가져오겠습니다.”

탁기준이 벌떡 일어나 커피를 사러 갔다.

그사이 조태진이 말을 붙여왔다.

“탁기준 저 자식이 좀 빡빡하지? 그래, 우리 인턴은 무슨 일로 선배한테 혼이 나고 있었을까.”

“혼난 건 아니고 탁기준 선배님이 광고주 사전 브리핑을 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뭐, 조금 강하게요.”

“사전, 브리핑?”

조태진의 눈에서 빛이 돌았다.

의자에 기댄 몸을 들어 자세를 바꾸더니 호기심 어린 눈길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인턴이 선배 AE에게 브리핑할 일이 있나?”

“미션 수행 때문에요. 계약을 따 왔거든요.”

“인턴이 무슨 계약을 해 와?”

“상품권 광고를 영업해 오는 미션이었거든요.”

“첫날부터 영업이라니, 우리 대학생 인턴들 제대로 구르는구만.”

“상품권 광고는 그냥 하면 되는데 라디오 CM 의뢰가 같이 들어와서요.”

“CM이라고?”

조태진이 눈살을 좁히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흥미로운 미소가 입가에 번져갔다.

“계속 말해봐.”

“제가 오늘 상품권 다섯 띠, 그리고 CM 의뢰를 받아 왔거든요. 퇴근 시간대로요.”

“뭐? 너 혼자 상품권 다섯 띠에 라디오를 따 왔다고?”

“NBD-AM으로 의뢰하셨습니다. 옵션은 당연히 설명드렸구요.”

“옵션이라.”

“네, AM 따려면 붙는…….”

커피를 가져오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탁기준이 말을 가로챘다.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교육 중이었습니다.”

“무슨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데?”

“아, 그러니까 저기.”

“라디오에 대해서 알 만큼 아는 것 같구만, 뭘.”

NBD-AM은 그 당시에도 물론이거니와 도혁이 회귀하기 직전까지도 최고 인기 채널이었다.

주로 운전자나 버스 이용자들이 듣는 라디오 광고의 꽃.

당연히 이 좋은 채널에 들어가려면 조건이 따랐다.

안 팔리는 시간대를 함께 사야 한다거나, 청취율이 떨어지는 채널에 들어가야 한다거나.

그걸 매체 옵션이라고 불렀는데 탁기준이 뭐, 그런 걸 따로 교육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태진이 그걸 눈치챘는지 옵션은 제쳐두고 라디오 광고 수주에 대해 자세히 물어왔다.

“그래, 그 라디오 광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생각이지?”

“탁 대리님이 내일 바로 일레라 가구에 미팅 들어가시겠다며 기획안과 CM송 초안까지 오늘 밤에 만드신다고 하셨습니다.”

“광고주가 일레라 가구였구만. 내일 당장 들어간다고?”

둘을 바라보는 조태진의 눈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반면 탁기준의 얼굴은 죽을 맛이었고.

“이거 대단한데?”

“네. 계약서 받기 전에는 광고주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면서 빛의 속도로 진행해야 된다고 하시더군요.”

탁기준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조태진에게 꼰지르긴 했지만, 빠른 진행이 중요한 건 사실이었다.

경험상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에는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광고주의 마음이란 갈대와 같다.

경쟁사에서 치고 들어올 수도 있고 시장 상황이 언제 돌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이번 광고주는 일레라 가구의 김영석.

이들은 아직 모르지만 김영석은 태강애드 광고주 중에서도 성질이 급하기로 손꼽혔다.

이런 사정까지야 몰랐겠지만 아무튼 조태진은 광고 수주를 빨리 진행하는 것에 크게 만족했다.

“이런 젊은 피들이 회사에 떡 버티고 있으니 든든해!”

“과찬이십니다.”

탁기준이 고무된 표정을 한 채 조태진에게 90도로 인사했다.

조태진이 그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했다.

“벌써 퇴근 시간 다 되어가는데 밤새야 하는 거 아니야?”

“그깟 밤샘 뭐 특별할 것도 없죠. AE의 기본 업무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래, 내 기대하도록 하지. 일레라 가구를 따오는지 못 따오는지.”

이제 과장급까지 알게 되었으니진짜 밤을 새워 기획안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드는 탁기준의 얼굴이 빠르게 썩어갔다.

‘어이구 탁기준이, 큰일 났네.’

도혁은 연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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