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7화 (7/252)

광고 천재 명도혁 7화

일이 커졌다.

과장급까지 알게 되었으니 탁기준의 얼굴이 부담으로 일그러졌다.

잘못하면 인턴이 물어다 준 먹이를 대리가 놓쳤다는 질책을 떠안게 생겼다.

조태진이 자리를 뜨고 탁기준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냉수를 들이켰다.

자, 일단 간단히 탁기준을 괴롭혔으니 브리핑은 해주기로 했다.

어쨌든 광고주 얼굴을 본 건 나니까 기본적인 건 말해줘야지.

“제 느낌대로만 브리핑해 볼게요. 인턴이니 참고만 하십시오.”

“그래, 뭐라도 좀 말을 해봐라.”

“일단 일레라 가구 김영석 대표는 당장 대소비자 홍보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맞아. 거기 오피스 가구잖아. 일단 계속 말해봐.”

“사무 가구 전문이니까 사장한테만 어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나도 라디오 광고를 한다는 게 조금 의아했어. 사장들은 신문이나 잡지 같은 지면광고를 선호하거든.”

“하지만 아이템을 하나 선정해서 소비자를 공략한다면요? 저는 예를 들어서 의자를 말씀드렸습니다.”

“의자?”

“여기까지가 김영석 대표와 나눴던 대화의 전부입니다.”

훗날 일레라 가구는 사무 가구의 실용성과 소비자 지향의 디자인을 접목한 심플한 스타일로 가구 시장을 평정한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광고비를 집행하는 가구업체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니까 꼭 이 광고 따 와라, 탁기준 선배.’

도혁이 속으로 말을 삼키며 가방을 주섬거렸다.

“야! 인턴 너 진짜 가냐?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오늘 집안에 일이 좀 있어서요. 제사거든요.”

“후우, 그럼 내일 미팅에는 같이 가자. 그래도 처음 컨택한 사람이 얼굴 보여야지.”

“알겠습니다.”

있지도 않은 조상님 제사를 팔아먹고 일어섰다.

탁기준은 집안에 일까지 있다는 인턴을 차마 붙잡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확하게 명도혁이 탁기준에게 브리핑을 받으면 짓던 표정이었다.

도혁은 정말 십 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걸 느끼며 말을 보탰다.

“척 하면 탁, 기획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인데요. 시원하게요.”

밤새도록 고통에 몸부림칠 탁기준을 남겨두고 경쾌하게 발을 돌렸다.

인간의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빙그르 돌아가는 회전문 밖으로 나와 태강애드의 사옥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태강애드의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그 빛을 본 도혁은 감회가 새로웠다.

‘진짜 돌아왔구나. 태강애드로, 이십 년 전의 명도혁으로.’

잠깐 감상에 젖어 있다가 회사 앞 편의점으로 들어가 맥주를 샀다.

회귀를 축하하는 술 한잔하려고.

혼자만의 비밀을 홀로 즐기기로 했다.

흔히 농담처럼 말하는 인생 2회 차.

아무도 함께 나눌 수 없는 명도혁만의 축복을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 모금 들이켠 맥주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는, 초여름의 밤이었다.

* * *

다음 날 상품권 미션에 성공한 인턴은 많지 않았다.

걷어놓은 계약서를 얼핏 훑어본 결과 쉰 명 중에 서른 몇 명이 성공하고 나머지는 실패했다.

물론 근성 하나로 죽고 사는 한수철은 상품권 광고를 따서 귀환했다.

“나 어제 열 시까지 돌아다녔잖아.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성공했네.”

“결국 아버지께 부탁했지 뭐. 친구분 중에 가맹 사업하시는 분이 있어서. 너는 어디서 영업했냐?”

“나 일레라 가구.”

“가구?”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것저것 물으려 하던 한수철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문이 탁, 열리고 탁기준이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온 것이다.

넥타이를 반쯤 풀어 헤치고 머리도 새집을 지은 것이 밤을 꼬박 새운 게 분명했다.

쥐어짠 듯 구겨진 얼굴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 모습이 정확하게 회귀 전 명도혁의 모습 같아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그는 툭 다이어리를 탁자 위에 집어 던지더니 턱짓으로 맨 뒷자리 인턴을 가리켰다.

“저기 모아놓은 계약서 좀 가져와 봐.”

“네, 알겠습니다. 대리님.”

맨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계약서를 걷어갔다.

탁기준이 그걸 확인하고 회의실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 고생 많았다. 자, 인턴 중에 프로그램 계약을 두 개나 성공한 사람이 있군. 우리 학교 후배님이네? 김민수!”

“넵!”

군기가 바짝 들어간 김민수라는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실전 미션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그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넘쳐났다.

‘김민수?’

낯익은 남자의 이름에 도혁의 촉이 예민해졌다.

들어본 이름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탁기준 후배면 S대라는 소린데. 누구지?

남자의 얼굴을 살펴봐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이 쭉 찢어진 걸 제외하곤 평범한 인상이기도 하고.

경쟁사 직원이었나? 외주업체? 일하면서 만난 사람이 워낙 많았어야 말이지. 서류상 이름만 아는 경우도 많았었고.

잠시만, 설마?

머릿속에서 오래전 짜증 났던 사건이 하나 스쳐 갔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탁기준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후려쳤다.

“조용, 조용! 다시 모두 주목한다. 김민수도 잘해줬지만 이번 미션의 우승자는 따로 있지. 명도혁 일어나 봐!”

아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뭘 또 일어나래?

도혁이 마지못해 엉거주춤 일어서자 김민수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당연히 자신이 미션에서 일등을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렇게 기분이 얼굴에 그대로 표시가 나서야 사회생활 어떻게 하냐.’

도혁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김민수가 정말 죽을힘을 다해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른 척하곤 일어서 꾸벅 인사했다.

탁기준이 도혁의 성과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명도혁은 이번 미션에서 프로그램 상품권 광고 5건을 계약했다. 그리고 같은 광고주에게 라디오 CM 기획안을 내겠다고 제안했다. 선제적으로 말이지.”

“오~”

웅성거리던 인턴들의 시선이 도혁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한수철은 놀라 도혁을 올려다보았다.

김민수와는 달리 경계를 세우지 않은 감탄이었다.

명도혁이 좋아했던 그의 선한 눈빛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됐어. 명도혁은 앉고. 역시 계약 못 딴 몇 놈은 오늘 오지도 않았구만. 그런 멘탈로 이 바닥 못 버틸 텐데 차라리 잘됐다. 이왕 그만두는 거 빨리 나가는 것도 답이지.”

“…….”

벌써 낙오자가 여럿 생긴 것을 확인한 인턴들이 술렁거렸다.

“저는 카피 지원했어요, 난 디자이너 될 거예요. 이딴 소리 하면서 집에 여러 명 갔다고 들었다. 영업은 AE만 하는 게 아니야. 내가 AE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

탁기준의 저 말을 알아들을 인턴이 몇 명이나 될까.

광고는 결국 무언가를 파는 것이다. 기획하고 홍보하고 선전해서 제품을 팔아먹는 일.

영업에 대한 이해는 기획팀과 제작팀을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도혁은 끄덕이며 탁기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순간 매체팀 PPL(제품간접 광고) 담당 대리가 들어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솔직히 대학생 인턴 여러분이 이렇게 상품권 영업을 잘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요.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선배님!”

“저희가 좋은 프로그램에 넣어서 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인턴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죠.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매체팀 대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기준이 도혁을 불렀다.

“지금부터 남은 시간은 매체팀이 교육할 예정이다. 인턴들은 수업 잘 듣고. 명도혁! 너는 나 따라와.”

* * *

탁기준은 일레라 가구 미팅에 가자며 제 차의 보조석에 도혁을 태웠다.

그러곤 앉자마자 툭, 서류 봉투를 던져주었다.

“가면서 기획안 한번 읽어봐. 느낌 어떤지.”

도혁은 광고주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의 기획안은 깔끔하고 단정했다.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올~ 탁기준, 성질만 부리는 줄 알았더니 살아 있네.’

꼴 보기 싫은 선배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자.

딱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광고주의 의도를 알아듣고 기획안을 만들어 왔다.

기획안은 애초에 도혁이 생각했던 콘셉트에 거의 일치하는 방향이었다.

심지어 하루 만에 만든 CM송 카피의 퀄리티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또 어느 카피라이터의 고혈을 밤새 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뭐 그건 일단 부딪혀 보는 걸로.

도혁은 끄덕이며 기획안을 덮었다.

“좋네요. 선배님.”

“그래? 김영석 대표한테 통할 거 같아?”

“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 *

도혁의 예상대로 김영석 대표는 크게 만족했다.

벌써 CM송을 흥얼거리면서 멜로디까지 붙이고 있었다.

흠, 음치인 것 같은데.

“이거 뭔가 벌써 시장의 활로가 뚫리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니, 정말로요. 빈말이 아니라 시야가 넓어졌다고나 할까요. 대소비자 광고를 왜 생각하지 못했지.”

“향후 여러 매체를 다각적으로 활용해 캠페인을 진행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탁기준의 말에 도혁이 숟가락 하나를 슬쩍 얹어주었다.

“일단 브랜드 인지도부터 올리시죠. 그리고 인지도, 선호도가 오르면 혹시 압니까. 사무 가구의 실용성을 겸비한 가정용 가구 시장을 선점하게 되실지도요.”

김영석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촉이 남다른 그가 저 말의 저의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일레라 가구가 가정 가구 시장으로 뛰어들 일이 몇 해 당겨질 수도 있겠는데?

김영석은 아주 화끈하거든. 닥치고 직진.

벌써 광고비 집행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분위기 좋게 미팅이 이어지고 커피도 바닥날 즈음이었다.

드디어 김영석의 입에서 우려했던 얘기가 나왔다.

“기획안에 나온 성우 말입니다.”

“네. 저희가 무조건 S급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요즘 반응 좋은 분 중에 김준수 님이라고…….”

“아니요. 저는 한진성 성우를 원하는데요.”

“아, 한진성 성우는 은퇴를 앞두고 계십니다. 다른 분으로 저희가 최대한 브랜드를 살려서…….”

“아니요. 일반인이 들었을 때 한 번에 목소리를 아는 분으로 해야죠.”

당황한 탁기준의 설명이 조금 빨라졌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더 이상 일을 받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한진성 성우의 광고가 계속 나오고 있어서 체감을 못 하시겠지만 벌써 녹음 안 하신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잠깐 침묵한 김영석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탁기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탁기준 씨, 사업을 하다 보면 말입니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해야 할 때가 있어요. 아니, 그럴 때가 아주 많아요.”

“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진짜 실력 아니겠습니까?”

“저기, 대표님.”

“첫 작업인데 우리 태강애드 실력, 한번 확인해 볼까요?”

순간 도혁의 머릿속에 씁쓸한 기억이 스쳤다.

‘드디어 나왔다. 김영석 대표 똥고집. 탁기준 선배 X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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