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크게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지금은 람바스의 성정을 이어받아 무척 게을러진 상태이지만, 그 전까지는 ‘조철웅’의 가치관으로 살아왔다.
스킬 정보창에 적힌 내용을 보고 나니 과거의 감각이 한순간에 되살아난 것.
뭔가가 꿈틀꿈틀 뱃속을 뚫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하아…….”
으으…….
‘하지만 귀찮아!’
람바스라는 인간 자체가 먼치킨인 동시에 게으름의 화신이기 때문일까? 그리운 감각이 치고 올라오는 느낌은 있어도 결정적인 영향력은 미치지 못했다.
그보다 귀찮다는 생각에 밀려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이거 혹시…….’
람바스는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가진 인격적 장점들을 ‘조철웅’이라는 특수능력으로 묶어놓고, 스킬을 통해 발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려나?
어차피 지금의 나로서는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스킬을 사용하는 것만이라면 게을러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테니까.
‘레벨 20이 된 시점에 특수능력을 각성하도록 해 놓았지.’
헌터 능력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시점에 특수능력을 각성하도록 했다.
만약 내가 더 성장해서 람바스의 성정을 누르고 내 본래 특질들을 더 잘 발휘할 수 있게 된다면…….
헌터의 기본 능력과 스킬은 레벨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내 본래 성격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장담은 못 하겠지만.
‘마냥 게을렀던 것만은 아니구나.’
나는 람바스가 최후의 순간에 품었던 회한을 떠올렸다.
애끊는 심정으로 지난날을 후회했던 마음.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대신해 목표를 이룰 사람을 선택하고, 그것을 위한 장치를 해두었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먼치킨이 마지막 순간에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한 것.
“음.”
어제 잠들기 전 미미에게 들었던 말도 나름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귀찮은 일이 전부 없어진다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거라는.
게으른 것에도 스케일이 있다나?
람바스가 누렸다는 자유는 듣기만 해도 무척 달콤했다.
‘목표로 삼도록 할까……?’
귀찮은 일은 ‘조철웅’이 하도록 하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과거의 나는 그야말로 노력과 근성으로 똘똘 뭉친 열정의 결정(結晶), 그 자체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무려 오 분씩이나 빡세게 무언가를 생각했더니 급 피곤해졌다. 물론 실제로 몸이 피로해졌을 리는 없고 그런 기분이 드는 것뿐이지만.
문득 머리맡을 보았더니 추리닝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정말 부인도 아니고…….’
미미의 살뜰한 챙김은 아마 람바스 때부터 몸에 밴 것일 테니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겠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꿈틀꿈틀 몸을 움직여 옷을 바꿔 입고 추리닝을 장착했다.
‘역시 게으름뱅이에게는 추리닝이 안성맞춤이지.’
예전 어떤 영화에서 ‘추리닝이 귀차니즘을 만든다(수트가 매너를 만든다.).’라는 명대사가 있었다.
“주군~ 식사하셔요~”
때마침 반가운 멘트가 들려와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꾸물꾸물 엉덩이를 움직여 밥상까지 다가갔다.
‘맛있게 먹어볼까나?’
그녀가 만든 요리는 늘 미각을 황홀하게 했기 때문에 저절로 기대심이 일었다.
그런데…….
‘뭐냐, 이 소박한 요리는?’
밥상에 놓여 있는 것은 매우 익숙한 요리. 아니, 요리라기보다는 식사 대용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페이머스 푸드(famous food)였다.
“라면?”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근 이틀 먹었던 화려한 요리들과 비교하면 질적인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내 앞에 앉은 미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군, 쌀이 떨어졌습니다.”
“뭐?”
그게 말이 돼?
“우리 어제 사냥했잖아. 그것도 A급을 잡았는데, 돈으로 바꾸면 되지.”
“그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주군.”
“알아듣게 설명해 줄래?”
“어제 아미토스가 출현했던 게 생각보다 큰 화제가 됐거든요. 드문 A급 비정규 몬스터가 나타나고 변종이기까지 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 버렸죠.”
“……제길.”
미미가 말하는 요지는 명확했다. 화제가 된 몬스터 사냥을 정식 라이선스도 없는 내가 했다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그 사냥은 라이온스 길드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엄청나게 귀찮은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곧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냥 네가 혼자 했다고 하면 되잖아?”
“그것도 어려운 일이에요. 현장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았나요? 자존심 강한 길드가 자기네가 사냥했다는 말을 번복하고, 여자 한 명에게 사냥감을 뺏겼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겠어요? 게다가 저는…….”
미미가 얼굴 옆에 손가락을 붙이고 브이를 그렸다.
“가짜 라이선스 보유자랍니다.”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자랑처럼 이야기하지 말란 말이다!
“…….”
사면초가로구나. 어제 나는 무엇 때문에 그 귀찮은 일을 했단 말인가?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울지 마세요, 주군.”
나는 눈가를 재빨리 훔쳤다.
“방법이 있답니다.”
미미가 생긋 웃었다.
“주인님의 역할을 대신할 귀여운 애완동물이 있어요.”
“애완……뭐?”
“실제로는 람바스 님이 키웠던 아이지만요. 그 애도 이쪽 세상에서 부활했답니다.”
나는 무슨 이야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미미가 휴대폰을 들이밀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헉!”
커, 커엽다…….
뭐지, 이 생물은?
강아지를 닮았지만 어딘지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귀가 삼각형 모양으로 접혀 있고, 단추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복슬복슬한 털은 반곱슬이라 더 귀여운 느낌이 들었으며 반듯하게 서 있는 자세에서 어딘지 모를 귀티가 흘러나왔다.
크기는 양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이게 람바스가 키운 애완동물이라고?”
“네. 이름은 파프리카에요. 아직 각성이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주군을 보면 아마 곧바로 알아볼 거예요.”
“각성?”
강아지가 각성한다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그런 케이스가 드물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사람이 각성하면 헌터가 되지만 동물이 각성하면 각성수가 된다.
녀석들은 헌터의 애완동물이 되거나 길드에서 집단으로 키워 전투에 동원하기도 한다.
인간 헌터처럼 능력이 각양각색이며 비전투능력을 가진 종은 애완전용으로 매매되기도 했다.
하지만 각성수를 키우는 일에는 대체로 마나가 사용되기 때문에 일반인은 키우기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말하자면 각성수를 키우는 것은 헌터의 럭셔리한 취미-엄청 비싸기 때문에-중 하나라고 할까? 테이밍 능력이 뛰어난 헌터라면 각성수를 키우는 게 주력인 경우도 있지만.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무척 귀찮다.
조그만 녀석이 털을 풀풀 날리고 똥을 여기저기 싸 놓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패닉이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뭐가 이렇게 귀엽냐?’
단순히 그것뿐이 아니라 나는 왠지 녀석과 영혼이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파프리카라고?”
생긴 게 무척 온순한 걸 보면 채식을 할 것 같기는 하다.
‘람바스가 키웠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게으름에 있어서 나보다 몇 수나 위에 있는 그가 무턱대고 애완동물을 키웠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있는데?”
“가까워요. 요 아래 각성수 전용 분양소에 있어요.”
“그래?”
“람바스 님은 최후의 전투가 끝난 뒤 심복들의 영혼을 수습해 모두 이곳에 미리 보내셨어요. 주군을 보필하여 목표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죠. 그들은 모두 주군 가까이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랍니다.”
“음…….”
나는 미미가 다섯 명쯤 있는 그림을 상상해 보았다.
뭔가 하렘 같아서 좋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 좁은 집에 그 많은 인원이 산다는 것은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좁은 방에 침대가 두 개나 놓여 있어서 부담스러운 상황인데.
‘가능하면 안 만나는 걸로.’
그들이 내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들면 그것만으로도 되게 귀찮을 것 같다.
‘하지만 파프리카는 예외지.’
나는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다가 미미에게 말했다.
“이 사진 나한테도 보내줄래?”
14
믿을 수가 없다. 내가 3일 연속으로 외출을 하다니.
물론 이번에는 귀여운 애완동물을 사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웬만큼 자발적인 동기가 있지만.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 보니 문득 큰 의문이 들었다.
“근데 각성수는 엄청 비싸잖아? 우리는 쌀까지 떨어진 처지고.”
“걱정 마세요, 주군. 저는 A급 라이선스 보유자잖아요. 얼마든지 외상과 할부가 될 거예요. 그리고 이건 제 예감이지만 왠지 돈이 필요할 것 같지 않기도 하고요.”
그놈의 가짜 라이선스는 어떤 데는 통하고 어떤 데는 통하지 않는구나.
“너의 예감은 너무 잘 맞아서 불안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예감이니 예외로 해 두지.”
나는 각성수 분양소에 도착하여 마치 별세계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곳이 동네에 있었다니.’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크지 않은 숍인 것 같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무척 넓었다.
또한 각양각색의 각성수들이 마나가 코팅된 시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떤 놈들은 따로 관리되어 컴컴한 우리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예측건대 꽤 위험한 녀석들 같았다.
“어서 오세요~”
딱 보기에도 영업에 최적화된 분위기를 풍기는 사장이 우리를 반겼다.
그는 미미의 A급 라이선스를 보더니 훨씬 더 밝은 표정을 지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천천히 살펴보십시오. 마음이 가는 녀석이 있으면 저한테 말씀해 주시고요.”
처음에는 신기해서 사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각성수들을 구경했지만, 곧 지루함이 찾아왔다. 사장 놈이 풍기는 독한 스킨 냄새가 거슬리기도 하고.
대체 후각이 예민한 헌터를 상대로 접대하면서 이런 냄새를 풍기는 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내 낌새를 느낀 미미가 성큼성큼 한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주 조그마한 우리.
그곳에 사진에서 보았던 조그만 녀석이 웅크리고 있었다.
몸을 말고 쌕쌕 잠을 자는 모습을 보니 일부러 깨워서 괴롭혀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로서는 매우 드문 감각인데, 그 정도로 녀석은 아주아주 귀여웠다.
내가 상체를 기울이고 들여다보자 움찔 몸을 움직이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사진에서 본 대로 단추 구멍 같은 눈이 새까맣고 초롱초롱했다.
나를 발견한 녀석이 갑자기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기 시작한다. 유리로 된 겉면에 다가오더니 앞발을 붙이고 혀를 내밀었다.
“왈! 왈!”
크읍!
통한다 통해! 녀석과 나의 영혼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지금 이 순간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아~ 애완용 각성수가 필요하신 거군요. 그렇다면 진즉에 말씀을 하시죠~ 이 아이는 저희 분양소에 들어온 지 1주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엄청 귀여워서 인기가 무척 많아요. 손님이 데려가시지 않더라도 아마 금방 분양이 될 겁니다.”
장사꾼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놈이 내가 파프리카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보고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미가 물었다.
“얼마죠?”
“아시겠지만 이렇게 귀여운 각성수는 매우 희귀합니다. 저희 분양소에서도 애완용으로는 하이 클래스로 분류하고 있거든요.”
사장은 손바닥을 싹싹 비비면서 눈알을 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매우 귀찮았다.
“그래서 얼마라고요?”
“음~~ 에잇, 모르겠다! 손님이 이 아이를 너무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으니까 특별가에 드리겠습니다. 딱 잘라서 3억만 주십시오.”
뭐라고라고라?
3억이라고라?
방금 집에 쌀이 떨어져서 라면을 먹고 나온 사람한테 그런 숨 막히는 소리를 하기냐?
‘그래도…….’
파프리카는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다 못해 유리막 앞을 오락가락했다.
모습을 보아하니 내게 안기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았다.
“3억이라…….”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분명하다. 흥정은 귀찮지만 똑똑한 미미에게 맡기면 되겠지.
억 단위의 돈이 들더라도 놈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쿠아앙!!!
엄청난 소음이 나며 분양소 전체가 흔들렸다.
안쪽에서 직원이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도망치세요! 폴클로로가 폭주했어요!”
“뭐? 그놈이 왜 폭주를 해?”
“모르겠어요! 우리가 부서졌어요. 사장님! 빨리 피해야 합니다!”
직원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길게 상황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다시 한번 폭음이 울리면서 폴클로로라는 놈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콰아앙!!!
모습은 고릴라를 닮았다. 덩치는 세배쯤 크고.
천장이 부서져 돌가루가 날리는 현장에서, 나는 미미의 예감이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소위 ‘람바스의 유지를 이은 자에게는 몬스터가 저절로 끌린다.’는 것이었다.
귀찮다.
하지만 파프리카를 위해서라면!
나는 처음으로 자발적인 마나 분출을 했다.
웅웅~
이번에는 나를 중심으로 진동이 일어났다. 살짝 의욕만 가졌을 뿐인데, 포클로로가 만들어낸 것보다 훨씬 더 큰 진동이 발생한 것.
“끼웅?”
덩치 큰 고릴라가 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