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8화 (8/160)

▣ 8화

9

다음날 눈을 뜬 나는 내 앞에 뭔가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귀찮아서 손을 휘저었지만, 그것은 투명해서 만져지지조차 않았다.

‘이건 뭔가의 데자뷰 같은데…….’

잠기운이 물러나자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제 게임을 할 때 나타났던 것과 같은 현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응?”

똑같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네 개의 메시지는 내가 확인하자 스르륵 사라졌다.

‘뭔 레벨이 올랐다는 거야?’

“으으음~ 왜 그러세요? 주군?”

“앗! 깜짝이야!”

미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가 부스럭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너 내 침대에서 잤냐?

그럴 거면 새 침대는 왜 샀는데?

나는 오늘도 미녀가 한 침대에 있는 걸 모르고 쿨쿨 잠만 잤단 말인가?

“주군, 왜 그러세요?”

미미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내가 눈을 뜨자마자 겪은 현상을 말해주었다.

“아! 그것은 람바스 님의 능력이 주군께 제대로 안착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뭐가 바뀌었는지 모르시겠으면 정보창을 한 번 열어보세요.”

나는 그녀의 말대로 빨간 점을 터치해 스테이터스 창을 열었다.

그러자 딱 하나 바뀐 것이 눈에 띄었다. 등급 레벨이 5가 되어 있는 것.

‘뭘 했다고 레벨이 오르냐?’

나는 그냥 집에서 잠만 잤을 뿐인데.

모르긴 해도 헌터가 성장을 하려면 엄청난 고생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거기 사용되는 장비나 아이템값만 해도 아파트 몇 채 값은 기본이라나?

잠만 자고 일어났는데 레벨이 4나 오르다니.

다른 헌터들이 알면 박탈감에 벽을 칠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죽도록 노력만 하고 성취는 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와 완벽히 대비되는 일이었다.

‘이러니 게을러질 수밖에.’

물론 게으름의 원인을 엄청난 재능에만 돌릴 수는 없다. 세상에는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별로 공감은 안 되지만.’

침대에서 쑥 빠져나간 미미가 “끙차!”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녀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드디어 오늘 주군과 함께 첫 사냥을 하겠네요! 정말 기뻐요!”

젠장.

그랬지.

오늘은 사냥을 가기로 한 날이다.

미미는 사냥감으로 C급 몬스터를 예약해두었다고 했다. 그녀는 일단 A급으로 등록이 되어 있지만, 실습자를 대동한 상태로는 B급 이상의 몬스터 예약은 불가하다고 한다.

‘약한 몬스터랑 싸우면 사냥이 빨리 끝나니까 좋지.’

나는 굳이 강한 몬스터를 사냥해서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없다.

이번에 사냥해서 돈을 벌면 몇 달은 놀고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군식구가 한 명 늘어서 생활비가 더 나가겠지만 청소와 요리를 해주니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미미가 설명했다.

“원래는 헌터용 장비랑 무기가 있어야 하지만요. 지금은 돈이 없을뿐더러 헌터 관리소에서 대여해 주는 것은 주군 수준에 안 맞을 거예요. 그래도 주군이라면 C급 몬스터 정도는 맨몸으로도 끄떡없을 겁니다.”

‘그런가?’

하긴 S급 헌터가 C급 몬스터를 사냥한다는 자체가 미스매치이기는 하다. 물론 나는 가급적 미미가 사냥하는 것을 구경만 할 생각이지만.

“주군이 얼른 보구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 오직 주군을 위해서만 제작된 것이랍니다. 저는 빨리 주군이 예전 람바스 님처럼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뭘 했다고?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갈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미미가 아득한 눈으로 덧붙였다.

“산에 매복한 적들을 소탕하실 때는 귀찮다고 산 채로 밀어버리시고, 바다에서 적이 밀려올 때는 바다를 증발시켜버리셨죠! 그 모습이 어찌나 늠름했는지!”

‘아, 그랬었군.’

이제야 이해가 된다. 람바스의 성정이 옮은 지금의 나라면 그의 행동 양식이 오롯이 귀찮음을 피하려는 동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미는 인벤토리에서 언제 구한 것인지 모를 헌터용 장비를 꺼내 입었다. 몸에 달라붙는 소재의 그것을 그녀가 입으니 무척 난감했다.

‘그렇게 나가면 남자들이 다 쳐다볼 텐데…….’

미미가 내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을 한몸에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미미는 인벤토리에서 롱코트를 하나를 꺼내어 장비 위에 걸쳤다.

‘으음,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군.’

여기서 궁금한 것 한 가지. 나는 헌터 능력을 각성했을 텐데 왜 인벤토리가 없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인벤토리(S급)가 생성되었습니다.]

[‘자동 정렬’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검색’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백과사전’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아…….”

인벤토리도 S급이냐?

스테이터스 창을 여는 붉은색 점과 달리 이번엔 파란색 점이 생성되었다.

그것을 터치하자 확 하고 아공간이 펼쳐진다.

역시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엄청나게 깊고 넓어 보이는 게 일반적인 인벤토리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나는 미미에게 물어보았다.

“미미, 네 인벤토리에도 ‘자동 정렬’ 기능이랑 ‘검색’ 기능, ‘백과사전’ 기능이 있니?”

“아니요~ 제 거는 ‘자동 정렬’ 기능밖에 없어요. ‘검색’ 기능이나 ‘백과사전’ 기능은 초초 레어 옵션이에요. 아마 ‘백과사전’ 기능은 세상에 주군밖에 안 가지고 계실걸요? 그리고 제 기억이 맞다면 주군의 인벤토리에는 나중에 기능이 더 추가될 거예요.”

혹시나 했는데 인벤토리도 먼치킨이다.

‘나쁘지 않네.’

이제 음료수를 마시거나 과자를 가지러 갈 때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이왕이면 화장실도…….

‘……그건 아니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을 넘을 뻔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입고 있던 추리닝 차림 그대로 나가기로 했다. 헌터용 장비를 착용하지 않으면 각종 이물질이 몸에 묻을 텐데, 이왕이면 빨래하기 편한 옷을 입는 게 좋을 테니까.

‘활동하기도 편할 거고.’

준비를 마친 미미가 명랑하게 외쳤다.

“자, 이제 가요! 주군!”

10

돈이 얼마 없는 처지이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데 택시를 타기로 했다. 버스는 기다려야 해서 싫고, 지하철은 많이 걸어야 해서 귀찮다.

‘이렇게 따지면 돈을 많이 벌어야겠구나.’

이왕이면 기사 딸린 자가용이 있는 게 제일 편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러려면 사냥을 많이 해야 하지.’

역시 적게 사냥하고 적게 쓰는 게 최고인 것 같다. 어차피 집 밖에도 잘 안 나갈 건데 뭘.

미미가 예약해 둔 사냥 장소는 멀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10분쯤 걸리는 곳.

게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웬만한 곳은 택시 운전사들이 다 알고 있었다.

목적지를 말하니 우리가 헌터인 걸 알고 게이트에서 최대한 가까운 장소에 내려주었다.

간단한 접근 금지 팻말과 함께 게이트가 도보 위에 덜렁 자리 잡고 있었다.

C급 게이트이니만큼 규모가 크지 않다. 심지어 시민들이 통행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게이트는 두 종류가 있다. 정규 게이트와 비정규 게이트.

정규 게이트는 지구 도처에 이미 자리 잡은 게이트들을 일컫는다. 등급과 출현하는 몬스터, 그리고 언제 게이트가 터지는지까지 모든 정보가 알려진 게이트들이다.

일정 기간 이상 정규 게이트를 사냥하지 않으면 몬스터가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게이트가 일종의 방어막 같은 기능을 해서, 그것이 약해지면 몬스터가 출구를 찢고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

당연히 정규 게이트는 잘 관리되고 있어서 위험도가 거의 0퍼센트에 수렴했다.

문제는 비정규 게이트.

그것은 갑자기 출현해서 갑자기 몬스터를 토해낸다.

이론대로라면 생성될 때부터 이미 게이트가 약한 상태라 생성 시기와 터지는 시기가 맞닿아 있는 것.

이것은 여전히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전체 비율은 정규 게이트가 95퍼센트, 비정규 게이트가 5퍼센트 정도.

S급 몬스터는 전부 비정규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며, 그래서 출현할 때마다 재난에 가까운 소요를 동반했다.

‘5퍼센트인데 정말 재수가 없어야 비정규 몬스터를 만나는 거지.’

나는 손목시계도 없는 손목을 들여다보면서 미미에게 말했다.

“자, 얼른 사냥하고 가자.”

그런데 그녀는 가만히 선 채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주군, 무슨 소리 안 들리세요?”

“소리는 무슨…….”

‘아, 들리네…….’

미미의 말을 듣고 보니 어디선가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도 섞여 있다.

“혹시…….”

미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하려는 말을 대신했다.

“비정규 몬스터가 나타난 것 같아요.”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비정규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건 큰일 아니야?

그래도 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내 청력이 일반적인 수준을 초월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분명했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나나 미미가 신경 써야 할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면 이미 길드에서 헌터들이 출동하여 사냥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놔두고 우리는 게이트에나 들어가자.”

“아니에요, 주군.”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이쪽으로 와요.”

그러니까 너 왜 그렇게 표정이 밝아 보이냐고.

미미의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아비규환을 방불하는 소요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는 몬스터와 눈이 딱 마주쳤다.

“크와아앙!”

미미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주군께는 몬스터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그런 게 나한테 왜 있는데?”

“주군께서 람바스 님의 능력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에요. 놈들은 람바스 님 때문에 한 번 멸망 당할 뻔했기 때문에 그분의 유지를 이은 주군을 가장 먼저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본능’이죠.”

뭐?

미미의 말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짐이 떠넘겨져 있다는 것과 같았다.

그런 건 진즉 말했어야지!

나는 그녀의 얼굴에 깃든 미소로 미루어 이 모든 게 계획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크와아아앙!!!”

대화하는 사이 몬스터가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아,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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