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인도양 통제소
프랑스와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독립한 리투아니아와 독일, 그리고 왕정이 복구된 에스파냐, 거기에 그레이트브리튼의 기치를 내건 잉글랜드까지 6개 나라가 참여하는 일명 리스본 동맹군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북부에 모여 있던 그레이트브리튼군 중 5만과 에스파냐 전선에서 회군한 프랑스군 중 3만, 살아남은 폴란드 육군에서 2만, 리투아니아 의용군 1만, 러시아 귀족군 1만 5천에 명성 자자한 기사단을 앞세운 독일 시민군 1만이 합류한 리스본 연합군의 총 병력은 13만 5천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 병력이 사방에서 오스트리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요청으로 조선군 비행선에 의한 사전 폭격이 개시되었다. 날틀043 80대, 날틀053 20대가 동원된 이 폭격은 리스본 동맹군이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돌파해 빈에 도달하는 10일간 내륙 쪽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돌로 기둥을 받치고 모래주머니로 지붕을 보강한 오스트리아의 대비방식은 공중 폭격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건물의 구조강도가 공중폭격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시를 이루는 대부분의 건물이 목조인 상황에서 투하된 나급 공투탄의 화염 공격엔 아예 방비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굴을 깊숙이 파고 만들어진 대피소 정도가 조선군 비행선의 공중 폭격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내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리스본 연합군의 공격에 너무 쉽게 점령당했다.
조선군 비행선의 폭격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가 파괴된 상태에서 대규모 연합군의 공격에 노출된 탓이었다.
그래도 빈은 여러 준비가 빛을 발해 연합군의 공격을 자그마치 1달간이나 버텨냈다.
그렇게 애를 먹인 탓이었을까? 성문을 깬 연합군은 노도처럼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애는 살육전을 전개했다.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고 도시민의 절반가량이 죽임을 당한 상태에서 한 독일 기사에 의해 당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마티아스의 목이 황궁에서 잘려나감으로써 빈 공방전이 끝났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이었으며, 헝가리의 왕이었고,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자의 최후로는 너무나 초라했다.
12월 27일 끝난 이 빈 공방전을 끝으로 오스트리아 정벌전도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리스본 연합에 참여한 6개 나라는 오스트리아를 여섯 조각으로 찢어 나누어 가졌다.
리스본 연합은 공중 폭격의 대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도였던 빈을 조선에 헌납했다.
광해는 그렇게 조선의 몫으로 넘겨진 빈을 잉글랜드에 과감히 팔아버렸다. 대신 조선은 잉글랜드 남부 지역의 항구도시 폴리머스를 영구 할애 받았다.
그레이트브리튼을 구축하기 시작한 잉글랜드 왕실도, 또 조선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잉글랜드 의회도 폴리머스에 주둔하게 될 조선의 대서양 함대를 강력한 우군으로 생각한 까닭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울러 조선은 이 거래의 대가로 볼고르라드에서 로스토프를 잇는 러시아의 땅에 대한 조선의 배타적 권리에 대해서도 그레이트브리튼, 그러니까 영국의 인정을 받았다.
잉글랜드로써는 러시아의 땅인 이 지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로부터 할애 받은 프랑스 남부의 세 개 지역을 에스파냐에 팔아버렸다.
대가는 에스파냐의 남부에 위치한 지브롤터와 알헤시라스, 그리고 에스파냐가 확보하고 있던 모로코 북부의 항구도시, 탕헤르의 영구 소유권이었다.
물론 에스파냐에도 볼고르라드에서 로스토프를 잇는 지역에 대한 영구적인 조선의 권리 또한 인정해야 했다.
광해는 지브롤터와 알헤시라스 그리고 탕헤르를 아우르는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들어가는 지브롤터 해협의 통행권을 완벽하게 틀어쥘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광해는 대서양군을 파견하여 거의 완벽하게 파괴된 콘스탄티니예를 점령했다. 이로써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도 조선이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으로 조선은 지중해를 거쳐 흑해에 이르는 교역로의 통제권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가 지브롤터 해협의 제해권이 갖는 중요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너무 잘 알아서 진즉부터 해협건너 모로코의 탕헤르까지 장악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현 상황에서 세계 최강인 조선의 해군력에 맞서 이 지역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에스파냐에게 아무런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에 더해 상국이 된 조선의 요구를 거부할 배짱과 능력이 없기도 했고.
조선은 영토 교환을 통한 거래 당사국들만이 아니라 제1차 유라시아 전쟁을 계기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볼고르라드에서 로스토프를 잇는 지역에 대한 조선의 배타적 지위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나라들 중에는 당연하게도 해당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칭은 일종의 독점적 사용권에 해당하는 배타적 지위라지만 러시아의 귀족들은 추가적인 영토의 할애나 마찬가지였던 조선의 이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간신히 얻은 조선과의 평화를 깰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거부했을 때 조선이 이 지역을 군사력을 통해 강제로 점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흑해와 지중해를 통해야 한다는 제한사항이 걸려있긴 했지만 러시아가 바다로,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이 영구사용권을 요구한 것은 그렇게 연결된 지역 전체도 아니었다. 조선은 카자흐의 서남부에서 시작해 볼고그라드를 거쳐 로스토프에 이르는 구간에 철도가 놓일 공간만을 원했던 것이다.
수치상으로는 대략 폭 5백보(약909M)의 땅이었다. 이 조차도 국제법상으로는 러시아의 영토다. 단지 그 범위에 대한 영구적인 조선의 사용권을 러시아가 보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중간기착지인 볼고그라드와 종착지인 로스토프는 도시 전체가 조선에 넘어갔다. 이것도 할애가 아니라 조차였다.
단지 ‘영구’라는 단서가 달려 할애와 다를 바가 없긴 했지만.
물론 그보다 남쪽에 위치하는 러시아의 영토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조선의 관리감독 하에 허가된 일부 구간을 통해 러시아의 통과는 용인되었다.
사실 이 당시의 러시아는 그냥 남부지역의 땅을 달라고 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조선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 영구 사용권 및 영구 조차에 대한 조약이 로스토프에서 이루어졌다.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서 맺어진 이 조약은 체결장소였던 도시의 이름을 따서 로스토프 조약이라고 불렸다.
조선은 이렇게 확보한 지역에 철도를 놓아 현재 후금과 준가르, 위구르를 거쳐 카자흐로 확장중인 철도가 유럽의 흑해까지 연결되길 바랐다.
이렇게 연결된 철도와 로스토프의 항구를 출발점으로 하는 흑해와 지중해, 그리고 대서양으로 연결되는 해상 수송로를 결합하면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생산된 상품들을 훨씬 많이, 더 빠르게 유럽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실크로드라 불러도 손색없는 이 교역로는 흑해와 지중해 그리고 대서양을 잇는 해상 교역로의 안전이 필수적이었다.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지브롤터 해협의 통제권을 조선이 틀어쥐길 원했던 것이다.
또한 이 새로운 실크로드의 육상 교역로를 담당할 철도는 조선의 황도인 신의주를 기점으로 이미 대한제국 내 여러 제후국으로 한창 건설이 확장되고 있었다.
신의주에서 출발한 서부선의 중간 기착지인 서경(베이징)에서 북원의 호화호특을 거쳐 할하의 카라코룸으로 연결되는 카라코룸 선은 이미 완공되어 여객과 대량의 화물을 운송하고 있었다.
대한제국들 내에서 가장 낙후되어있고, 개발이 늦어졌다는 평가를 받던 북원의 발전 속도가 철도 개통이후로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렇게 속도가 붙은 북원의 소비물동량 증가 추이가 연 2할(20%)씩 상승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제후국들보다 연 5푼(5%)이나 많은 증가추세였다.
소비는 그만큼의 구매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늘어나는 만큼 북원의 개발속도가, 그로인해 북원 백성들이 쌓는 부의 축적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것은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 북원에서 생산되는 농축산물을 조선과 제후국들로 실어 나르는 양이 대폭 증가한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할하도 마찬가지여서 북원정도의 추세는 아니었지만 그들도 대한제국 평균 성장률을 초과하는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두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속도의 발전이 철도에 의한 것임을 알아본 다른 제후국들이 자국 내에 추진하는 조선의 철도 개설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그 덕이었을까, 하나의 철도를 놓자면 수년이 걸리던 시간이 크게 단축되고 있었다. 제후국들이 막대한 인원을 동원하여 철도 건설에 쏟아 붓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경(베이징)을 거쳐 서부 3도의 최남단 기착지인 항주까지 연결되어있던 조선의 서부선 철도는 명나라의 수도인 남창으로 이어졌고, 그 철도는 다시 남진으로 한창 뻗어나가고 있었다.
후금의 경우는 서부선의 중간기착지인 서경(베이징)에서 분기된 철도가 후금을 관통해 준가르를 거쳐 위구르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국을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이 철도로 후금은 상당한 물동량이 증가하여 큰 이득을 보고 있었다. 위구르선이라 불리는 이 철도는 카자흐까지 연결하기 위해 지금 한창 추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위구르는 이 공사에 수십만의 인력을 동원해 지원하고 있었다. 위구르가 얼마나 철도의 연결을 바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미 철도가 놓이면 조선은 물론이고 대한제국 내 각 제후국과의 물동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 자국 경제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모든 제후국들이 알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철도 건설의 속도가 조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광해는 그 철도 건설의 이득을 유럽에까지 옮겨놓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로스토프에서부터는 다시 배를 이용해야 하긴 했지만 거기까지만 육상운송이 가능해져도 기존의 해상 운송량을 크게 상회하는 물동량의 이동이 가능해질 테니까.
광해는 그렇게 이동된 물량 중 일부를 흑해와 지중해, 그리고 대서양을 연결한 해상운송에 맡기고 나머지는 로스토프로 찾아온 각국 상단과의 직접거래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광해는 로스토프를 대단위 무역 도시로도 키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를 비롯한 모든 준비가 끝날 때면 조선을 포함한 대한제국의 산업구조 개편작업도 끝날 테고 만성적으로 겪고 있는 생산품 부족 사태도 해결된 후일 터였다.
그 때 막대한 물동량을 소화할 유럽 교역의 거점으로 로스토프를 선택했던 것이었다.
광해의 지시를 받은 대서양군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대서양군 소속 대한제국군 1개 병단을 볼고그라드와 로스토프에 절반씩 나누어 배치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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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유라시아 전쟁이 끝나고 조선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의 지위에 올랐다.
바다는 아시아와 유럽을 가리지 않고 조선의 앞마당이란 인식이 퍼져있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진출하자면 어느 나라의 어떤 배일지라도 광무항에 개설되어 있는 인도양 통제소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인도양군 휘하의 이 인도양 통제소는 인도양으로 들고 나는 모든 함선의 기록과 관리를 맡은 부서였다.
이 인도양 통제소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인도양으로 들어선 배가 순찰중인 조선군 함선에 발견될 경우 격침될 각오를 해야 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바람과 상관없이 훨씬 빠른 속도로 바다를 달리는 조선군의 함선을 따돌릴 수 있는 배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허가를 받지 않고 인도양으로 들어설 배는 사실상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의 인도양 통제소는 아편 등 금지 품목이 아닌 이상,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경우가 드물어서 비밀리에 침투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이런 절차는 군선들도 다르지 않아서 동맹국인 잉글랜드의 군선조차 인도양 통제소에 허가를 득해 출입해야만 했다.
비슷한 조직인 지중해 통제소와 흑해 통제소가 각기 조선이 장악하고 있는 탕헤르와 콘스탄티니예에 세워져 있었다.
두 통제소는 대서양군 휘하로 인도양 통제소와 마찬가지로 허가를 받지 않은 함선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이 두 통제소가 인도양 통제소와 다른 점은 관할 해협이 좁아서 허가를 받지 않고는 조선의 눈을 피해 지중해나 흑해로 들고 날 수 없다는 정도였다.
광해는 이 3개의 통제소를 통해 인도양과 지중해를 완벽히 조선의 손아귀 안에 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