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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84화 (284/325)

제284화. 도상(圖上) 훈련

날틀04 비행선들이 다시 기타큐슈로 돌아왔을 땐 중무장을 갖춘 2개 대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3차 강습작전에 투입될 병력이었다.

그들도 2차 강습 때와 마찬가지로 510단 예하 병력이었다.

그들은 대장선에서 내려지는 시신들과 물로 씻겨 나오는 흥건한 핏물에 흠칫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비사들과 무장사들이 달려들어 대장선 화물칸의 문을 아예 분리해 냈다.

그리고 기타큐슈 전략물자 사전 전개창고에서 분출한 기01 3정을 고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여전히 비행자세가 수평인 상태에서 지상을 향해 사격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화물칸 끄트머리에 밧줄을 이용해 기01을 단단히 붙들어 매는 작업이었다.

어깨걸이를 걸머진 사수가 일어서면 밧줄로 붙들어 맨 총열이 아래를 향하게끔 설치한 기01은 해군용이었다.

아직 육군용 기01은 나오지 않았다. 워낙 총이 크고 무거워서 육군용으로 만들면 포처럼 총좌에 올려 말로 끌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 장원에선 마차에 회전식 기01 총좌를 부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는 있었지만 확정된 것은 없었다.

그렇다보니 전략물자 창고에도 수동식 회전총좌를 구동하기 위해 어깨걸이가 있는 해군용 기01만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데 이게 오히려 비행선 끄트머리에 설치하기에는 더 좋았다.

어깨걸이로 인해 사수가 온몸으로 기관총을 지지할 수 있어서 무거운 무게를 버티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사수들이 설 자리 앞에 방패대신 기01이 지나갈 홈을 판 철판을 용접으로 붙여버렸다. 그것으로 대장선에는 비행대원들을 제외한 사수 3명만 탔다.

나머지 공간은 기01 3정의 무게와 총탄으로 채워졌다. 그 덕에 대장선엔 1만5천발에 달하는 기01 총탄이 실렸다.

이것은 3정의 기01이 10분간 사격할 수 있는 양이었고, 지상포격용으로 개조된 날틀042와도 같은 장탄수였다.

그런 대장선을 앞세운 9대의 날틀04가 다시 기타큐슈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3차 강습은 감영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크고 높은 감영 건물로 인해 상대적으로 곡물저장소에 비해 방어기재가 많았다고는 해도 병력적 열세는 마찬가지였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날틀04들이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날틀 04가 도착한 감영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숫자로 압도하여 빼앗으려 하는 자들과 강력한 화력으로 지켜내려는 자들의 전투였다.

빗발치는 총탄이 새카맣게 달려드는 폭도들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간간히 총탄이 끊어진 곳에서 내금의 위사들이 주를 이룬 방어병력과 폭도들 사이에서 백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계속해서 총을 쏘아댈 만큼 예비탄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곡물저장소의 보급 요청을 받았던 수송 비행대는 그래서 이번엔 상당량의 총탄을 싣고 왔다.

물론 그 탓에 준비하고 기다리던 2개 대 병력에서 실제로 탑승 가능했던 병력은 1개 대 병력인 1백 명 뿐이었다.

감영 상공에 도착하자 대장선이 앞으로 나서며 기01 세정을 동원해 공중사격을 퍼부었다.

이번엔 위험을 무릅쓰고 고도를 내릴 필요가 없었다. 기01의 사거리가 1천보(약1.8km)에 달해서 안전고도인 3천척(약909M)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쏟아지는 기01총탄 세례에 달려들던 폭도들이 짚단 쓰러지듯 무더기로 쓰러져갔다.

3분의 2치(20mm)에 달하는 기01의 총탄은 사람이 맞으면 피탄 부위가 완전히 뜯겨나갈 정도의 커다란 충격을 가한다.

관통력도 상당해서 직선거리에 놓여있다면 2명에서 3명까지도 살상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보인다.

그런 기01 총탄들이 무차별적으로 사격되고 있었다. 더구나 공중에서 쏟아지는 공격이었기에 파괴력과 살상력은 극대화 되어있었다.

무더기로 쓰러지는 가운데 공격이 재개된 이후 처음으로 폭도들이 물러났다. 공중에서 퍼부어지는 사격의 파괴력에 입는 피해가 너무 컸던 데다 하늘을 나는 비행물체에 대한 두려움이 합쳐진 결과였다.

그렇게 폭도가 물러나자 상공에서 기다리던 비행선들이 재빨리 착륙해서 병력과 보급물자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감영 건물에서 내금위 위사들과 550단 5대 병사들이 뛰어나와 그렇게 하역된 물자를 옮기고, 새로 충원된 510단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물자와 병력을 내려놓은 날틀04 비행선들이 재빨리 부상해서 현장을 떠났다. 곡물저장소로 다시 날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강습작전이 2번 정도 더 이루어진 후에야 비행선 모함에서 출발했던 날틀 03들이 날아왔다.

날틀03들이 합류하면서 폭도들의 공격은 주춤거렸다. 공투탄을 투하하고 기01을 쏘아대는 비행선들의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까닭이었다.

그렇게 대규모 피해를 남긴 채 폭도들의 공격이 잠시 멈춘 시모노세키의 하늘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

서남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란사태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순신을 비롯한 원수부의 고위 장수들은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 백성들의 반란을 군이 투입된 상태에서도 재빨리 진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제후국들과 그 외 다른 열강들에게 어떤 신호로 읽혀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조선이 가진 힘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품고 도전하려 드는 이들이 생길지 몰랐던 것이다.

그에 따라 원수부는 도상으로라도 실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경우를 상정한 훈련을 진행하기로 했다.

한창 진압작전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 도상작전은 복수의 제후국이 반기를 들고, 여기에 유럽 열강들이 편승한 경우로 설정되었다.

제후국들 중에서는 가장 먼 카자흐와 가장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티베트가 반기를 들고, 유럽에선 에스파냐와 잉글랜드가 칼을 거꾸로 잡아 조선의 영토인 남포르투갈도를 공격하는 것으로 상정했다.

이 도상 훈련이 시작된 직후 이순신과 원수부 고위 무장들은 당황했다. 비상이 발령된 조선군에서 즉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부대가 마땅하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제후국들에서 문제가 생긴 시점에 제후국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명과 후금을 견제하는 서부3도의 3전단 병력을 빼낼 수는 없었다.

명과 후금만큼이나 뛰어난 저력을 가진 할하와 북원을 북에서 막고 있는 만주4도의 2전단 병력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흔들리는 일본 열도에서 5전단을 빼낼 수도 없었다.

결국은 다시 본토8도의 1전단뿐인데 그 병력은 오랜 시간 주둔지를 비울 수 있는 병력들이 아니었다.

결국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지고, 만주의 2전단과 서부의 3전단을 예비군이 대체하고, 행동에 자유를 얻은 두 전단을 각기 카자흐와 티베트로 투입하는 방안이 시행되었다.

현역과 예비군의 전력비가 2대1인 점을 감안하면 5만의 병력을 가진 2전단과 3전단을 대신할 예비군은 각기 10만씩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뜻했다.

즉, 2만의 예비군으로 이루어진 사단 5개로 구성된 1개 군단씩을 서부3도와 만주 4도에 각기 하나씩 투입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시모노세키를 향해 가고 있는 1전단 여유병력은 그대로 진행시켜 시모노세키에서 일어난 반란을 최대한 빨리 진압하도록 명령되었다.

도상에 불과한 명령이었지만 해당 부대들의 이동이 작전상황도에 표시되었다.

문제는 티베트를 향해 서부 3도를 출발한 2전단이 후금의 영토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적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대규모 기마대가 운용되어 조선군을 급습했는데 후금군인지, 아니면 준가르의 병력인지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다.

후금과 준가르는 조선군에 대한 공격을 부인했다.

대량의 기마대를 운용하기 어려운 지리적 특성을 가진 티베트는 사태 직후,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다. 남은 것은 위구르뿐이었다.

티베트로 향하는 길목 인근에서 대량의 기마대를 운용할 수 있는 나라는 이제 위구르뿐이었으니까.

조선의 확인에 위구르는 답을 주지 않았다. 위구르 주재 조선 사무국에 배치된 조선의 무관들도 정보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이 상황에서 조선군은 딜레마에 빠졌다.

반란을 일으킨 티베트로 갈 것인지 치고 빠진 위구르군으로 추정되는 기마대를 쫓아갈 것 인지 결정을 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어느 쪽을 결정하든 뒤를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2전단의 분리는 상정되지 않았다.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2전단을 분리해 병력규모를 낮출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원수부는 2전단으로 하여금 정체불명의 적을 쫓도록 명령했다. 보군이 위주인 티베트군보다 빠른 기동력을 가진 정체불명의 기마대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된 까닭이었다.

2전단이 도주하는 기마대를 따라 기동했다.

이 상태에서 티베트를 방치할 수 없었던 원수부는 예비군 동원령을 확대해서 1개 군단을 추가로 구성하여 티베트로 급파했다.

10만의 예비군 병력으로 이루어진 예비군 3군단은 서부3도와 만주4도에 이미 배치된 예비군 1군단과 2군단에 비해 전역 연도가 꽤 지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투력은 여전히 현역의 절반으로 상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낮을 가능성이 높았다. 구성 병력의 연령은 물론이고 전역 후, 시간도 훨씬 많이 지났기 때문이다.

육군 총사부가 현재 제국에 보고되어 있는 티베트군의 규모를 활용한 지휘로 도상작전에 임했다. 그런 티베트군을 맞아 원수부의 지휘로 전투에 임한 예비군 3군단이 티베트군에 패배했다.

오차가 많은 도상 훈련에 불과한 작전이었지만 충격은 상당했다.

이 작전에서 육군 총사부가 동원한 티베트의 전력은 겨우 8만이었다. 조선에 등을 돌린 티베트 대한제국군 2만 병력에다가 동일한 무장을 갖춘 티베트 정규군 4만, 여기에 1, 2차 정벌군에서 귀환한 티베트 대한제국군 병사들을 동원한 2만을 규합한 병력이었다.

일총과 일포로 무장한 이 병력이 지형의 이점을 살려 매복과 습격을 동반한 치고 빠지기 작전을 연이어 구사한 결과였다.

더 좋은 무장에,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서도 조선군이 패배한 것이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는 고산병으로 동원된 조선군의 절반이 제대로 운용되지 못했다는 제한사항이 조선군에 주어진 까닭이기는 했다.

그래도 기동 가능한 조선군 예비군은 5만나 되었다. 그 대규모 병력을 가지고서도 패배했던 것이다.

원수부의 도상 훈련은 그곳에서 멈추었다. 아직 만주 4도에서 카자흐로 향하고 있는 2전단도 있었고, 동원 가능한 예비군도 20만이나 더 남아있었지만 훈련을 지속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 처하면 지켜보던 제후국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던 데다, 남포르투갈도를 침공한 유럽 열강에 대해서는 대서양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미 대륙 깊숙이 전진한 대서양군을 회군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었던 데다 대서양군에 포함된 카자흐와 티베트 출신 대한제국군 병력이 본국과 같이 행동을 취해 조선 출신 대한제국군 병력에 공격을 가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서양군 사령부는 이 도상 훈련에서 다른 제후국 출신 병력을 나두고 북미연합국 병력을 동원했다.

자칫 다른 제후국 출신 대한제국군 병력을 동원했을 때 반란에 동조해서 칼을 거꾸로 들 경우 진압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는 점을 우려사항으로 꼽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북미연합국 출신 대한제국군 병력의 무장이 형편없었다는 점이었다.

휴스턴을 중심으로 북미대륙 남부를 점령해 나가고 있던 지역에 구성된 북미연합국 출신 대한제국군의 경우엔 다른 제후국 병력들과 동일한 무장과 훈련을 갖춘 병력이 구성되어 있었지만 퀘벡을 중심으로 움직였던 지역의 북미연합국 출신 대한제구군 병력은 전통적인 북미 원주민들의 복장과 무장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조선 출신 대한제국군과 북미연합국 출신 대한제국군만을 동원한 대서양군 사령부는 카자흐와 티베트 출신 대한제국군 병력이 일으킨 반란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총체적 난국에 이순신이 훈련 중단을 선언했던 것이다.

원수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겨우 도상에서 벌어진 가상훈련에 불과했다는 위안을 삼기엔 조선군의 움직임도, 작전 전개도 너무 굼뜨고, 가진 무장에 비해 파괴력은 작았다.

이순신이 장고에 돌입했다.

그런 상황에서 시모노세키의 전장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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