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내금위 위사대의 특이한 무장
태왕으로부터 야마구치시에서 시작된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조선군 원수부는 여러 가지 사유로 전환배치가 늦어지고 있는 52병단에 신속히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이미 남경(대판, 오사카)에 전개되어 있던 52병단 예하 3개 단에도 신속히 야마구치시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폭도가 몰려있는 시모노세키시가 아니라 야마구치시로의 이동을 명령한 것은 폭동의 근거지인 야마구치시를 조속히 안정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아울러 동일본 전선에서 귀환해 포항에서 재편되고 있던 해병 3여단에도 긴급 출동명령을 내렸다.
11수송함대 소속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3척이 제3해병여단을 이송하기 위해서 포항으로 향했다. 아울러 시모노세키의 전략물자 사전전개 창고에 대량의 보급품을 전투부대에 공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문제는 이 창고에 550단 예하 1개 대만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그로인해 보급부대의 운용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은 원수부는 곧바로 구주도와 사국도에 나누어 주둔 중이던 51병단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일본 열도를 관할지역으로 하는 5전단 사령부가 구주도의 후쿠오카에 설치된 이후, 줄곧 사령부 직할부대로써 운용되어온 51병단은 이번 배치조정 이전부터 구주도와 사국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51병단은 이동배치에 여념이 없었던 5전단 예하 병력들 중 완전 편제를 유지한 채 제자리에 있었던 유일한 부대인 셈이었다.
그 51병단 예하 부대들이 원수부의 명령에 따라 기동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구주도와 사국도 모두 서남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포항으로 향한 선박들을 제외한 11수송함대 소속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이 구주도와 사국도로 향했다.
조선 육군의 기동 전력이자 예비전력이었던 7전단이 해체된 이후로 유사시 투입되는 병력은 결국 각 지역에 주둔 중인 경계부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투입되는 부대가 주둔 중이던 지역의 군사력 약화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지역이 가깝다는 이유로 동원된 51병단 예하 515단이 11수송함대의 탈해급 수송선들 타고 이동하면서 기타큐슈에 소재한 대규모 군사시설들이 그대로 텅텅 빈 채 방치되다시피 했다.
물론 해당 군사시설들의 경비를 기타큐슈시 좌포분청이 인수받기는 했지만 겨우 20명 남짓한 병력으로 기존 임무였던 기타큐슈의 치안을 유지하고, 515단의 주둔지와 기타큐슈 전략물자 사전 전개창고에 대한 경비임무까지 모두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타큐슈시 예하 각 읍에 배치된 좌포분소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치안력 공백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치안력 부족사태는 이번 폭동사태로 동원되는 51병단 예하 부대가 위치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조선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겨우 2개 병단과 1개 해병여단 뿐이라는 것에 원수부는 상당히 많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영토가 된지 얼마 안 되어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나고야도에 배치되고 있는 54병단을 투입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행정구역상 북해도 관할 지역으로 재편입 된 사할린 섬과 천도열도(쿠릴열도), 그리고 웅다반도(캄차카반도)에 주둔하게 된 55병단의 경우는 거리상으로도, 또 이동수단의 부족 현상 때문으로도 동원할 수가 없었다.
북해도로 막 이동배치가 되고 있었던 53병단을 서남도로 다시 회군시키는 일도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라는 지적에 따라 고려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만주4도에 배치된 2전단이나 서부3도에 배치된 3전단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두 지역에 주둔하는 조선군은 조선의 영토를 지키는 보루로써의 역할만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지탱하는 버팀목 같은 부대였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도 아니고, 바다건너로 부대들을 빼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보니 병력적 여유가 있는 부대는 조선 본토8도에 배치되어 있는 1전단 예하 병력뿐이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황실을 옹위(擁衛)하는 충정군(忠情軍)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는 1전단의 병력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태왕의 명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에 따라 이순신이 직접 태왕을 알현하여 1전단의 이동에 대한 청원을 올렸고, 재가를 받았다.
태왕의 재가를 받았음에도 1전단 중에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4개 병단뿐이었다. 평안도 일대는 물론이고, 신의주에 주둔하면서 황도방어군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는 11병단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함경도에 주둔하는 14개마돌격 기마병단은 유사시 황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특수부대였기에 마찬가지로 동원하기 어려웠다.
구경을 비롯한 황해도와 경기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15산악병단은 지금 지세창의 지휘아래 하와이에 투입되어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동원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수부가 태왕의 윤허로 실제 동원할 수 있었던 부대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주둔관할지로 삼고 있었던 12병단과 강원도와 경상도를 주둔관할지로 삼고 있었던 13병단뿐이었다.
원수부는 이 두 부대를 12수송함대를 통해 서남도로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사항들을 시행했다.
그러한 원수부의 명령에 따라 12, 13병단 예하부대들이 각 주둔지에서 기동하면서 삼남지방과 강원도까지 소란스러워졌다.
각 지역의 항구로 12수송함대 소속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이 입항했고, 병력들이 해당 항구로 이동하기 위해 야밤에 도로를 달렸다.
그런 소란스러움에 해당지역 조선백성들이 불안해했다. 조선 본토8도의 병력이 움직인다는 것이 가져온 불안감이었다.
사실 이 불안감을 우려해서 초기엔 예비군의 투입이 검토되기도 했었지만 이미 우선 소집대상이 되는 비교적 예편한지 얼마 되지 않은 병력 순으로 30만에 달하는 병력이 이미 동일본 및 나고야 전쟁에 동원되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동원하는 것은 조선이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닌데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론지어졌다.
따라서 ‘서남도 반란 사태’로 규정된 이번 폭동에 대응해서는 현역 병력을 투입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예비군의 잦은 투입이 불러올 생산성 결여와 사회적 파장을 원수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현역이 투입되면서 예비군 투입 때처럼 감출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당장 대규모 군대가 드러내 놓고 이동하는데다 주둔지가 텅텅 비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러온 불안감이 결국 삼남지방과 강원도를 넘어 황도에까지 닿았다. 백성들의 불안감이 얼마나 컸던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백성들의 불안감은 위화도 국제거리에 위치한 각국의 대사관들에서도 감지했다.
정보를 접한 각국 대사들과 각국의 대사관에 근무하는 무관들은 조선이 자국 영토인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백성들의 폭동사건에 조선 본토8도의 병력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병력부족사태를 격고 있다는 것에 상당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여러 곳에서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지만 그것은 분명 이전과 다른 대응이었다. 그 만큼 조선이라는 초강대국의 군사력이 이전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각국 대사관 무관들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찾는 정보 안에는 야마구치시를 시작으로 일어난 서남도 반란 사태에 대한 조선군의 대처방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정보 안에 조선군의 현재 실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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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전투비행선대의 공격에 겁을 먹고 물러난 폭도들로 인해 비교적 안전하게 착륙하여 하선할 수 있었던 내금위 위사대는 여전히 건재했던 5대와 연합하여 감영 이근에 대한 방어를 다졌다.
5대의 병사들은 다총에 일권총, 거기다 수탄을 주렁주렁 단데다 칼도 두 자루나 차고, 등엔 활과 화살통까지 매고 있는 위사들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육군의 중무장 수준을 훌쩍 넘는 내금위 위사들의 무장 상태에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많은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서도 내금위 위사들은 재빠른 움직임을 보여주어서 그들이 저렇게 중무장을 갖춘 채 얼마나 많은 훈련을 받아왔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히 황궁에서 태왕을 보필하는 군관들로만 이루어진 부대라 꿀 빠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었던 육군 병사들은 그간 내금위에 대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했다.
5대장보다 높은 군관들이 잔뜩 모여 있음에도 내금위 위사들은 계급을 앞세워 5대장의 지휘권에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물론 전체적인 방어 체계를 수립하는 것은 내금위 위사들이었지만 그들이 세운 방어 계획이 생각보다 조밀하고 단단해서 5대장은 달리 반론을 제기할 것도 없었다.
그 전체적인 작전 지휘를 제외한 5대의 세부적 지휘는 오로지 5대장에게 맡겨졌다.
그 모습이 의외였는지 5대의 부장조차 혀를 내둘렀다.
“굉장히 절도 있는 이들이네요.”
“조선군 제일 강군이라는 소리를 몇 번 듣긴 했었지만······. 그냥 폐하의 근위대라 듣는 아부성 소린 줄만 알았더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칼은 그렇다 치고, 총이 있는데 활은 왜 차고 나온 거랍니까?”
“그렇지 않아도 물어봤는데 총알 떨어지면 활이라도 쏴야지 그러더라.”
“그래봐야 화살이 몇 발이나 된다고요.”
“그것도 내가 물어봤지.”
“그랬더니 뭐랍니까?”
“화살은 더 만들면 된다더라.”
“화살을 만들어요?”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은데 화살은 생각보다 상당히 만들기 까다로운 무기다. 휘거나 깃을 잘못 달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선의 무관들이 활을 잘 쏜다지만 화살이 엉망이면 맞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놀라는 부장에게 5대장이 내금위 위사에게 들었던 답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정규 화살은 아니고, 급한 대로 아무 나뭇가지나 닥치는 대로 깎아 만드는 목전(木箭)에 불과해도 이삼십 보는 날아간다더군.”
거리가 겨우 이삼십 보로 짧긴 해도 여하간 장거리 무기다. 적과 칼을 맞대기 전에 적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더구나 조선 무관들의 활솜씨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난 편이다. 거리가 이삼십 보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나무를 깎아 만든 화살일지라도 거의 쏘면 맞는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인정하면서도 5대장의 말에 부장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뭐랄까 말만 거창하다고 생각하는 표정이랄까?
그런 부장에게 5대장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실전에선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티 납니까?”
부장의 반문에 5대장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나는 상관없다만 저들 앞에서는 조심해. 뭐가 어째도 부장보다는 전부 까마득한 상급자들이니까.”
“아! 그야 당연하죠.”
어색하게 웃는 부장의 어깨를 5대장이 두드려주었다.
부장만 나무랄 수도 없었던 것이 내금위 위사에게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5대장도 그런 게 가능할리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적 정규군과의 전투도 아니고, 단순히 무장한 폭도들과의 전투였음에도 5대장은 물론이고, 5대의 장병들 모두는 이번 전투 내내 정신을 좀처럼 차릴 수 없었다.
아무리 첫 실전이었기 때문이라지만 그것에 대비해 수도 없는 훈련을 받아왔기에 실전을 두 번, 세 번 반복한다고 하늘과 땅차이로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장한 적과 수십 보 거리에서 마주쳐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나 훈련에 훈련을 반복했음에도 전투 사격 중 탄창을 가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병사들이 적지 않을 정도였다.
손이 떨려서 탄창을 제대로 끼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극한의 공포가 계속 반복되는 곳이 전장이었다. 그런 전장에서 총과 칼, 일권총에 수탄, 거기다 활까지? 일목요연하게 필요한 적시적소에 쓰겠다는 생각은 그냥 바람일 뿐이라는 것이 5대장과 5대 부장의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그 생각을 내금위 위사들이 듣는 곳에서 입 밖으로 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5대의 부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동한 두 사람도 내금위 위사들이 작성한 작전계획대로 방어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