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선을 넘다
일왕궁의 전투는 막부의 승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그 전투의 와중에 죽어나간 이들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왕궁의 담을 타넘은 병력을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이 직접 지휘하다 전투의 와중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자신들의 주군을 잃은 막부군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담을 타 넘은 병력이 닥치는 대로 일왕궁에 기거하는 사람들을 베어 죽였다.
그 과정에서 일왕과 그 가솔들도 횡액을 피하지 못했다.
양측의 최고 수뇌가 동시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뒤늦게 다이묘들이 동원한 막부의 주력군을 이끌고 도착한 당대의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엉망이 되어버린 일왕궁을 수습하고 살아남아 있던 막부군 병사들을 모조리 베었다.
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목이었다. 마찬가지로 살아남아 포로가 된 일왕궁 수비병력 또한 죄다 목을 베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복수였다.
이로서 일왕궁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는 단 한명도 없게 되었다.
상황을 수습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동일본 전체에 일왕가의 몰살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죽음을 공표했다.
그 소식에 동일본 전체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충격에 빠진 동일본과 달리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은 진상 파악에 분주했다.
불필요한 참전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진짜로 그가 사망했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었다.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신을 확인한 다이묘들조차 없었다.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 만한 목격자조차 단 한명도 살아남아있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해 사태를 수습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모조리 베어 죽였기 때문이다.
의문이 짙었다.
정말로 죽은 것인지, 실제로 죽었다면 그 시점은 일왕이 죽기 전인지 아니면 죽고 난 후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은 해당사항을 외교부에 그대로 전달했다. 정보를 전달받은 외교부도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의 판단과 비슷했다.
일왕과 그 가문을 몰살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짐을 모두 짊어지고 자결을 했을 수 있다는 관측에서부터, 사실은 죽지 않았다는 음모론까지 다양한 추측과 예상이 쏟아진 것이다.
외교부는 판단을 보류한 채 조선 사무국에서 건너온 정보와 판단, 그리고 외교부의 추측을 담아 태왕에게 보고했다.
대한제국 황제이기도 한 광해로써는 이 상황에 개입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 무엇이든 그것은 동일본 내에서 벌어진 권력 다툼이었기 때문이다.
한성 조약상 제후국의 권력 다툼엔 황실이나 조선이 개입할 수 없다는 조항이 명문화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결과적으로 광해와 조선은 일왕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례에 조선 사무국장을 보내 조문을 하는 것에서 사태를 일단락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영악한 자로군요.”
태왕의 명을 받아 적은 도승지 허균의 말에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자신의 죽음으로 일왕과 그 가문을 몰살시킨 혼란을 한 번에 덮어버렸으니.”
사실이었다.
일왕과 그 가문의 몰살보다 동일본에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죽음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존재감이 막연했던 일왕보다 그 행보 하나하나가 영향이 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존재가 동일본 백성들에겐 더 명확하게 인식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죽음은 그렇게 일왕과 그 가문의 적몰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하오면 이제 동일본의 왕위는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허균의 물음에 광해가 답했다.
“제 놈들이 정해서 주청하겠지만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유력하겠지.”
그것을 위해 일왕만이 아니라 일왕가 전체를 죽여 없앴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광해의 답에 허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허하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왜?”
“일국의 왕이 죽었나이다. 그것에 대해 폐하의 대응을 다른 제후국 군왕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옵니다.”
“무력하다 볼 것이란 말인가?”
“그보다는 자신들을 가치 없이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될 것이라 소신은 감히 추측하옵니다.”
“가치 없이 보고 있었다라······.”
“예. 내가 아끼는 수하가 죽었다면 그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옵니다.”
허균의 말이 옳았다.
만에 하나 동일본에서 자신이 아끼는 신하가 동일본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면? 그 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개입했고, 그가 또한 그 사달의 와중에 죽임을 당했다면?
광해 자신은 결단코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 어디에 있든 우선 조선군을 투입해서 진상조사를 바닥부터 샅샅이 뒤져 그 진실을 가려내려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이 무엇이든 결단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사람들을 그냥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지금 광해 자신은······. 그저 수긍했다.
동일본의 국왕이었던 일왕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모두 신임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광해가 어느 정도 신임하는 이들은 명왕과 후금의 누르하치 정도였다.
사실 누르하치도 믿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외 제후국의 군왕들은 사실 믿고 있다기보다는 믿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터였다.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 드러난 것이다.
허균의 말에서 그것을 깨달은 광해가 곧바로 조선군 최고사령부로 나섰다. 이대로 지나가면 제후국 군왕들의 의심이 싹틀 것이란 점을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광해가 대한제국 황제로써 동일본을 다스리고 있던 일왕의 죽음에 대해 큰 분노를 공표했다. 감히 신하가 군왕을 벤 것에 대한 무자비한 복수도 다짐했다.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에서 장례의 중단과 사실 조사를 위한 조선군의 입국을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통보했다.
아울러 해당 조치를 각 제후국 주재 조선 사무국을 통해 제후국 군왕들에게 지체 없이 설명하도록 조치했다.
조선 사무국을 통해 대한제국 황실의 조치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통보 된지 10여분 뒤엔 조선군이 에도로 직접 상륙했다.
막부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이순신 함대의 호위 하에 접근한 13수송함대가 조선 해병대 1개 여단을 기습 상륙시킨 것이다.
도쿄만(작가 주. 이 당시엔 에도만이라 불렸겠지만 앞글에 도쿄만으로 표시한 까닭에 혼동을 주지 않도록 그대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에 주둔 중이던 동일본 함대는 그런 조선군 함대의 움직임을 막아서지 못했다.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서인지 막부에서 아무런 명령도 내려오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의 독단에 의한 저지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륙한 조선 해병대 3여단은 일부병력을 조선 사무국으로 보내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본대는 일왕궁으로 직행했다.
그들을 막부의 군대가 가로막았다.
3여단장은 황제 폐하의 황명을 거부하는 것이냐고 윽박을 질렀지만 막부군은 요지부동이었다.
일련의 상황이 최고사령부에 지체 없이 보고되었다.
광해는 과감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황명으로 일왕궁에서 막부군의 퇴거를 명령한 것이다.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이 공식 외교문서로 작성하여 막부로 전했다. 막부는 황제의 옥새가 찍힌 정식 칙서가 아니라는 명분을 들어 황명을 거부했다.
정식 칙서를 전하자는 대신들의 청원을 광해가 거부했다.
“이미 사무국장이 부임할 때 동일본은 신임장을 교부한 상태였다. 그의 말이 짐의 말과 같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부정한다는 것은 짐의 말을 거역한 것과 같다. 명확히 전하라. 계속 거부한다면 동일본을 반역도당으로 선포할 것이라고 말이다.”
광해의 단호한 명령은 곧바로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을 통해 막부로 전달되었다.
그 통보에 고심하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몇몇 다이묘들이 저항을 선택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 참에 아예 대한제국에서 탈퇴하여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명분도 있었다. 한성 조약은 분명 제후국 내의 권력투쟁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후국들은 이번 사태에 개입하려는 조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더구나 조선은 북미대륙과 대월 전선에 막대한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고, 모병제 전환이후 병력 부족사태까지 겪고 있어 즉각적인 대규모 정벌전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 근거였다.
한참을 고심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다이묘들을 모두 불러 들였다.
상황이 상황인 지라 소집된 다이묘들은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의 병력을 대동한 채 에도로 들어왔다.
그것으로 인해 자그마치 4만의 병력이 에도로 집결한 모양새가 되었다. 위기를 느낀 조선 사무국이 3일을 시한으로 두어 최종 판단을 요구했다.
그 3일 동안 조선도 나름의 대비를 시작했다.
최고 사령부는 동원 가능한 병력을 선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마땅한 병력 선발에 애를 먹었다.
당장 북미 서부지역 점령 작전에 투입된 해병 전력은 4개 여단이었다. 거기다 현재 대월전선에 투입된 병력에도 해병 여단이 2개나 동원되어 있었다.
사실 동일본에 투입된 3여단도 조만간 북미 서부지역 점령 작전에 동원되도록 계획되어 있던 병력이 투입된 상황이었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해병대 전 여단이 각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육군에서 기동전단인 7전단을 투입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사실 7전단은 병력부족사태의 직격탄을 맞아서 현재 완편에서 2만이나 부족한 3만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병제 전환이후 부족해진 병력수를 한창 전투함 개량사업 등으로 병력을 축소한 해군에서 전부 감당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러다보니 주둔지역이 별도로 정해지지 않았던 기동전단에서 그 나머지 여파를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을 주장한 동일본 다이묘들의 판단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부족했지만 조선 최고 사령부는 7전단의 투입을 결정하고 곧바로 동래에 주둔 중이던 7전단을 부산포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대월 전선의 지원에 투입되어 있던 11, 12 수송함대 중 11함대를 부산포로 돌렸다.
동시에 서남도와 관서도에 주둔 중인 5전단 예하 55병단에도 2급 전투 대기태세에서 1급 전투대기 태세로 전환 발령되었다.
유사시 육로를 통해 나고야를 거쳐 동일본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동일본 사태에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각 제후국 군왕들에게서 황실의 결단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들이 조선 사무국을 통해 외교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균의 말처럼 그들이 그동안 광해의 결정과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한성 조약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고는 해도, 그것이 왕실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였지 신하가 왕을 죽이는 사태에도 가만히 있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후국들의 지지는 꽤나 명확해서 나고야 왕국의 경우엔 황제의 명령이 있다면 나고야 병력을 직접 동일본에 투입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이런 제후국들의 상황 변화를 미처 알지 못했던 동일본 막부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 첫발은 도쿄만에 정박한 채 병력을 상륙시킨 조선 함대를 그냥 지켜보기만 하던 동일본 함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