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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43화 (243/325)

제243화. 날 버리지 않는 나라

광해의 예상대로 문제를 일으켰던 두 해병의 출신은 각기 만주 4도와 서부 3도였다.

본토인들이 아닐 것이라던 광해의 예상이 맞은 것이다. 본토인들의 사고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철산 소학당이 의무교육화 되면서 문맹률도 현격하게 낮아졌을 뿐만 아니라 상식이란 것이 통용되는 세상이었다.

만주 4도나 서부 3도, 그리고 해외 5도와 원해 4도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민족적 특성인지 아니면 시행된 시기의 차이 때문인지 그 정도가 본토와는 큰 차이가 났던 것이다.

광해는 원수부가 대한제국 군사부를 통해 각 제후국에 해당 사건의 처결 내용을 회람시키도록 했다. 다만 회람 내용에는 해당 병사들의 출신을 명시하도록 했다.

물론 국내용 문서에는 출신을 기록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광해의 명을 받은 이순신이 원수부로 돌아가 해당 내용을 그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우선 대서양군 사령부로는 광해의 명을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곧바로 대한제국 군사부의 이름으로 각 제후국에 주재하는 조선 사무국을 통해 해당 내용을 전신으로 전달했다.

조선 사무국들은 해당 전신을 해독해서 곧바로 각 제후국에 전달할 터였다.

원수부를 통해 태왕의 지시를 접수한 대서양군 사령부는 휘하 각 여단 본부로 해당 내용을 전달했다. 물론 대한제국군용이었기에 여기에는 해당 병사들의 출신이 명시되어 있었다.

해병개척단으로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태왕의 결정을 그대로 전했다.

대서양군 사령부가 아니라 태왕에게서 결정이 내려오자 강재휘 장령은 이번 사건이 태왕까지 보고가 되었다는 것에 꽤나 놀랐다.

그것은 해병개척단에 소속된 장병들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특히 문제를 일으킨 두 해병은 사색이 되었다.

살아날 구멍을 열어주었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무려 태왕까지 알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실 조선에선 태왕의 명을 어기는 일을 죄악시 한다. 조선 본토는 특히 심했고, 만주 4도가 그다음으로 그런 경향이 강했다.

그 외 지역은 왕명을 어겼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었지만 만주 지역의 경우엔 신의 말을 어겼다는 의미가 깃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이 마을에 알려지면 두 해병들 중 만주 4도 출신의 해병은 고향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어려웠다.

그런 연유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해병에게 공식적으로 해병개척단장이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조속히 혼례를 올린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며칠 후 두 해병은 해당 부락의 전통방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여전히 해당 원주민 부락의 젊은 전사들은 불만이 남아있었지만 그것이 적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휴스턴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잘 봉합된 8월 초, 1차 원정군이 부산포로 귀환했다.

12만의 대한제국군 병사들을 대규모 환영인파가 부산포 거리를 가득 메운 채 환영했다.

1차 원정군을 이루었던 대한제국 해병대 병력은 태왕의 허락에 의해 부산포에서 동래까지 개선행진을 했다.

그 길목에 조선의 백성들이 나와 환호와 꽃가루로 목숨을 걸고 제국의 영광을 위해 싸웠던 병사들을 맞았다.

잔뜩 고무된 병사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동래까지 행진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행진하여 도착한 동래 조선군 연병장에는 뜻하지 않은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장해제.

대한제국 병력의 무장해제가 황제의 명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이 술렁거렸지만 황명이었다. 거부 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지휘관들이 머뭇거리는 병사들을 독려해 무장을 걷어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 군수지원단 병사들에게 넘겼다.

나총과 이포를 포함한 각종 무장과 장비가 그렇게 수천대의 마차에 실려 연병장을 떠났다.

곧바로 해병대의 해체가 명령되었다. 연병장에 서 있던 장병들은 대한제국 해병대 편제가 아니라 각 출신지역 별로 헤쳐모이도록 명령 받은 것이다.

어수선한 가운데 각 제후국의 이름이 적힌 팻말 앞으로 장병들이 흩어져 모였다.

각 제후국에서 조선으로 왔던 처음엔 1만의 수를 꽉 채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어떤 제후국도 본래의 수를 채우고 있는 지역이 없었다.

백단위의 숫자가 차이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떤 지역의 경우엔 천단위의 숫자가 차이나는 곳도 있었다. 포르투갈 전투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던 1차 원정군의 전사자 숫자는 총 7,932명이었다.

전사자와 그 가족들에겐 모든 것을 잃은 일이었겠지만 일국의 운명을 뒤바꾼 전쟁을 치르면서 나온 피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수였다.

당장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전사자 수가 13만을 훌쩍 넘는 다는 것만 보아도 조선군의 피해가 얼마나 적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1개 여단을 구성할 때 가능한 모든 지역의 병사들이 골고루 섞이도록 편성한 대한제국군 평성방침에 따라 전사자는 11개 제후국과 조선 본토가 골고루 나왔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남간도였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에 배치되어있던 105여단과 111여단에 우연히도 해당 지역 병사들이 많이 배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고의적으로 위험지역에 해당 여단을 배치해두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출신 지역별로 모여서야 그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은 병사들의 사기가 곤두박질 쳤다. 개선행진 때의 그 기세등등함은 흔적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흩어져버렸던 것이다.

고향 친구가 또는 사촌이, 또는 형제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명확히 인식한 탓이었다.

그런 병사들에게 사전에 전개되어있던 일총이 지급되었다.

나총과는 현격하게 다른 일총을 지급받은 병사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멍하니 일총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런 병사들 앞으로 해병대 총사인 곽재우가 나섰다.

“부대······. 차렷!”

구호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차려 자세를 취했다.

흐트러져있던 군기가 일순간에 다시 섰다. 확실히 강력한 훈련을 받고, 피 튀기는 실전을 거친 병사들다운 모습이었다.

그런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곽재우가 말문을 열었다.

“귀환을 환영한다. 살아 돌아와 고맙다.”

곽재우의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병사들이 많았다. 그런 병사들을 바라보며 곽재우가 말을 이었다.

“지금의 마음을 잊지 마라. 그 지옥 같은 전장에서도 살아 돌아왔다. 하지 못할 일이 없고,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몫까지 앞으로 더 열심히 살 것이라 믿는다.”

저마다 주먹을 굳게 쥐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곽재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무장의 변경에 대해 의아한 것이 많을 것이다. 제후국엔 나총과 이포의 반출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 말에 장병들이 술렁거렸다. 그 술렁임의 정체를 알기에 곽재우는 담담히 말했다.

“황제 폐하와 대한제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너희들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규정을 말하는 것이다. 혼동하지 마라. 폐하는 제국은 너희를 믿는다.”

자신이 말에 술렁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는 것을 확인한 곽재우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너희의 노고를 치하하시고자 군인연금을 지급하기로 하셨다.”

곽재우의 말에 다른 의미로 장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선군에 있는 군인연금 제도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똑같이 싸우고 죽거나 부상당해도 보상을 받는 조선군과 달리 제후국 병사들은 군역에 의해 끌려온 것이었기에 어떠한 보상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제국군에 복무하는 제후국 병사들에겐 대한제국 규모에서 별도로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다. 병력을 제공한 각 국이 해당 병력의 급료방식을 결정하고 지급을 모두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조선 출신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조선군 직제에 따른 급료를 조선군으로부터 받았지만 제후국에서 동원되어 온 병사들은 전혀 받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귀환하는 제후국 병사들은 죽어 명패만 돌아온 이들이거나 부상당한 몸으로 귀환한 자이거나, 무사히 돌아온 이도 그 어떠한 보상도 없었다.

한데 그런 자신들에게 군인연금을 주겠다니 놀라는 것이다.

그런 장병들에게 곽재우의 말이 이어져 들려왔다.

“폐하는 너희들의 희생과 충성심을 깊이 감탄하시고, 기억하겠노라 하셨다. 그 작은 보답으로 군인연금을 제공하시는 것이다. 알겠지만 군인연금은 전액 황실 자금으로 충당한다. 그 누구도, 설사 제후국의 군왕도 그 돈을 사사로이 공제하지 못한다. 모두 너희의 것이란 소리다.”

순간 병사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그런 병사들의 모습에 싱긋 웃은 곽재우가 말했다.

“황제 폐하 만세!”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이 따라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 모두 건강해라! 충!”

곽재우가 병사들을 향해 먼저 군례를 올렸다.

전쟁에서 고생한 병사들에 대한 곽재우의 작은 보답인 셈이었다.

그런 곽재우의 모습에 병사들이 ‘와아’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런 병사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싱긋 웃은 곽재우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해병대 정훈참모가 올라와 군인연금 액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전사자들에게 6천만 원이 일시금으로 지급되고 아울러 매월 15만원이 지급될 거라는 설명에 병사들 속에서 ‘와아’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6천만 원이면 조선에서도 큰돈이었다. 경제규모가 조선보다 작은 제후국으로 가면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처지는 나라 중 하나인 북원으로 가면 6천만 원이면 양을 수백 마리를 살 수 있고, 왕도인 카라코룸에서 제법 그럴듯한 집도 장만할 수 있을 만큼 큰 돈이었다.

거기다 부상자들에게도 부상 정도에 따라 연금이 지급된다는 소리에 함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거기다 몸 성히 돌아왔더라도 참전한 모든 병사들에게 매월 5만원의 군인연금이 지급될 거라는 말에 ‘황제 폐하 만세’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실제로 제후국으로 가면 월 5만원을 벌지 못하는 이들도 숱했다. 실제로 이 자리에 서 있는 병사들 중에서도 군역에 동원되기 전에 그 정도를 벌지 못했던 이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하긴 잘 사는 이들이 조선으로 가는 군역에 끌려왔을 리 없었으니까.

군역에 관해서는 차별이 없는 조선과는 달리 아직도 제후국들에는 부조리와 부패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후국 출신 병사들에겐 그 돈도 굉장히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게 만세 소리로 가득 찬 연병장으로 황실 내시부에서 나온 환관들이 책상을 들고 줄지어 들어와 앉기 시작했다.

참전 병사들의 인적사항을 다시금 정확히 확인하고 거주지를 명기해서 지급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에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제대로 지급하려는 것을 확인한 병사들 사이에서 다시금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에게선 무장을 바꾸면서 생겼던 불안감과 실망감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죽어 돌아온 친구의, 사촌의, 형제의 유족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는 것에, 또 자신들이 살아갈 기반을 반들 수 있다는 것에 병사들의 얼굴이 밝았다.

당장 돌아가 어찌 먹고 살지 걱정이 태산이었던 부상자들의 표정이 특히 더 밝았다.

그들에게 태왕과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의미가 새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적어도 쓰다 버리는 그간 나라의 행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는 그들의 음성엔 충만한 충성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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