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41화 (241/325)

제241화. 눈이 맞다

태자의 국혼으로 분주했던 5월이 지나고 6월 초, 헬륨기체 수송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수송선 3척이 부산포를 떠나 휴스턴으로 향했다.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을 개조해 만든 이 배엔 신라의 22대 왕이었던 지증왕의 이름을 따서 지증급이란 명칭이 붙었다.

이 지증급 헬륨기체 수송선의 호위는 태평양 함대가 맡았다. 아직 확대이전의 체제를 유지중인 태평양함대는 해모수급 전열함 1척과 왕건급 호위함 4척을 딸려 보냈다.

광해는 북미지역에서 채굴한 헬륨가스가 도착하는 대로 다량의 날틀03을 제작하여 항공모함을 운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것을 위해 이순신이 설계에 참여한 신형 항공모함이 현재 거제 건선단지에서 건조 중이었다. 광해는 이 조선의 첫 정규 항공모함을 비행선모함으로 분류하고, 발해의 건국왕인 대조영의 시호를 붙여 고왕급이라 칭했다.

이 고왕급 비행선모함은 시험선으로 건조되었던 초기 항공모함과 크기는 동일했다. 다만 내부 장비들이 상당수 실전에서 운용되기 알맞게 개량되었다.

그로인해 고왕급은 1만 마력 증기기관이 시험선에 비해 2개가 더 늘은 8개로 25노트(약46km)의 최고속도와 15노트(약27km)의 순항속도, 그리고 5천 해리(약9천2백km)의 순항거리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신형 증기철선들과 같은 것으로 연합작전을 구사할 수 있도록 통일 된 것이었다.

탑재기는 초기형 시험선과 마찬가지로 만재 시 20대의 날틀03 비행선을 탑재할 수 있었다.

그런 고왕급은 아무리 부유한 조선이라도 여러 척 보유하기 힘든 거함이었다. 따라서 광해는 고왕급을 각 대양함대와 증파전력인 이순신 함대에만 한척씩 배치하기로 했다.

현재 건조를 시작한 두 척은 각기 이순신 함대와 대서양 함대에 먼저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와 같은 일들 속에서 6월 지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이 다가왔다.

조선이 대월 전쟁에 투입 된지 10개월이 지나지만 여전히 산악전단은 초기 상륙지인 할롱 인근을 벗어나지 못했다.

막대한 피해를 꾸준히 입으면서도 대월군이 정글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유격전을 펼치며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달부터 산악전단 교육대로부터 훈련을 받은 대한제국군이 북부에서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할 예정이라 조선군 지휘부는 그것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하는 대월군의 병력부족 현상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루에도 백 단위씩 죽어나가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는 대월이지만 두 개의 전선에서 동일한 현상이 벌어지면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정글을 이용한 유격전도 한계에 부딪칠 테니까.

조선이 그렇게 때를 기다리고 이었다면 네덜란드에서 에스파냐군은 심각하게 철수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미 1년을 훌쩍 넘긴 네덜란드 전쟁은 에스파냐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다. 정치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었던 하비에르 후작이었지만 정작 전쟁에선 헛발질을 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하비에르 후작의 헛발질 탓에 조선이 제공한 폭발탄으로 승기를 잡아가는가 싶었던 네덜란드 전쟁은 수렁으로 빠져버렸다.

그나마 하비에르 후작이 정치력을 발휘한 덕에 네덜란드 남부의 병력이 전쟁에 발을 담그는 것을 저지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최근엔 그런 남부 지도자들과 협상을 통해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로 남는 것을 골자로 한 조약이 준비 중이었다.

에스파냐는 그것으로 전쟁의 승리를 선언하고 네덜란드 전선에서 발을 빼낼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최근까지 에스파냐군이 네덜란드 전선에서 잃은 병력이 4만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부네덜란드군의 저항은 끈질기고, 격렬했다. 실제 북부 네덜란드군은 에스파냐보다 많은 인명 손실을 입고 있었다.

에스파냐는 대한제국 포르투갈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나 추가 상륙을 실시해서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더 밀어 넣은 상태였고, 북부 네덜란드는 장정들의 씨가 말라가고 있다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양측의 전투는 소강 상태였다. 발을 뺄 생각인 에스파냐도, 남부의 비협조에 진력이 난 북부 네덜란드도 남부로 물러난 에스파냐군을 공격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이 개입한 2개의 전쟁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면 북미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던 3개의 전쟁은 순항 중이었다.

퀘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북부 전선은 저항 세력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북미 원주민들은 전염병을 낫게 해주면서도 자신들의 자치권과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대한제국군의 방식에 호의적이었다.

물론 자신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영토의 일부를 내놔야한다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없었다. 초기에 반발하고 나선 부족들 중 대부분도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들이 내놓은 땅에 새로운 개척도시가 생기고 그들과 교역이 벌어지면서 그 인식이 달라지고 있었다.

새롭게 도시를 연 이웃들과의 교역에서 얻은 새로운 문물이 부족민들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대한제국의 본격적인 이주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척 도시에 머무는 이들은 개척도시 건설과 주둔군 임무를 맡은 일부 대한제국군 병력뿐이어서 교역량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병사들이 현지식을 먹어보자며 음식을 사거나 기념품을 장만하기 위해 몇 가지 물품을 사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건네지는 것은 대부분 자신들이 소비할 식량이거나 여분의 옷가지, 또는 삽이나 곡괭이 같은 개척 도구였다.

특히 인기가 높았던 것은 호미였다. 농경을 하는 부족들에게 호미는 본적도 없는 최신 농기구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거래되는 모든 것이 사실 군수물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모두 불법으로 적발되는 자는 군법회의에 처해질 사항이었다.

하지만 대서양군 사령부는 군법회의 대신 변상 정도로 처리하고 있었다. 종래엔 군매점(우리가 흔히 아는 PX)에서 일부 여분의 물자를 살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엔 퀘벡 인근에선 군용 방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북미 원주민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복장에 대해선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대서양군 지휘부에서 나오면서 리스본을 통해 민수용 물자를 조달해 판매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3차 원정군이 도착하면서 한때였지만 자그마치 36만의 병력이 북미 북부에 바글거렸다. 그들 중 일부가 그런 교역에 나섰다지만 그 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다 종래엔 귀환할 병사들이 너도나도 기념품을 마련하기 위해 거래에 나서면서 교역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막대한 양을 채우기 위해 대서양군이 리스본에서 사들인 물자가 적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연유를 알게 된 일부 상인들이 직접 퀘벡을 비롯한 북미 개척도시에 순회 상점을 열어 물건을 팔았다.

역시 돈 되는 것은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상인들다웠다.

대서양군 사령부는 물자 구입 및 이동을 위한 장비와 인력을 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그들의 북미지역 출입을 허가했다.

다만 만약에 벌어질 수 있는 위험 상황에 대비해 철저하게 허가 받은 상단만 장사를 허락했고, 물건 값은 리스본에서 판매되는 금액에 1할 이상 비싸게 팔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다.

허가는 일정 교육을 이수하고 명확한 신분 및 근거지만 확인되면 내어주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상단들이 이 거래에 뛰어 들었다.

종래엔 개척도시에 아예 정착해서 장사를 하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그들과 북미 원주민들 사이에도 거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점차 북미 원주민들이 상업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북부 지역이 그렇게 상호 이익을 기반으로 점령전이 진행되고 있다면 휴스턴을 중심으로 한 남부는 끈끈한 유대감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라 불렸던 데다가 푸에블로족을 도운이래,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선군은 원주민들의 친구가 되었다.

더구나 해병개척단은 남부의 점령 작전을 북미연합국에 가입한 남부 부족들이 내놓은 병력으로 치렀다.

본래의 임무에는 없던 일이다. 해병개척단의 임무는 휴스턴 개척도시를 세우고 인근에서 헬륨 매장지를 찾아 채굴하는 것이었으니까.

실제로 남부에 대한 점령 작전은 북부지역의 점령이 완료되면 퀘벡에 사령부를 두고 있는 대서양군 사령부에서 대한제국군을 투입해서 진행하기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북미연합국에 가입한 남부 부족들이 늘어가면서 어느덧 그들이 내놓은 병력이 1천 단위를 훌쩍 넘어서면서 그들을 그냥 놀리고 있기도 뭐했던 개척단장이 대서양군 사령부의 동의를 받아 점령 작전을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 해병개척단장인 강재휘 장령은 북미연합국들이 내놓은 병력을 훈련시키기로 결정했다.

대서양군의 기본적인 북미연합국 병력운용 방침은 북미원주민 전통의 복장에 전통 무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퀘벡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미연합국 병력은 전통적인 북미 원주민의 복장과 무장을 유지한 채 대한제국군의 길잡이 임무를 수행한다.

강재휘 장령은 그 기조를 변화시키려한 것이다.

처음 그 요청을 받은 대서양군 사령부는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는 북미연합군을 현대식으로 훈련해서 무장시키는 것이 잘하는 결정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서양군 사령부를 강재휘 장령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종래엔 ‘먼저 믿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상대의 믿음을 얻을 수 없다’는 태왕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대서양군 사령부도 결국 강재휘 장령의 요청을 수용하기로 했다. 대신 무장은 나총에 국한하고, 병력은 1천5백을 넘지 않도록 조건을 달았다.

대서양군 사령부의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인 강재휘 장령이 흔히 ‘북미연합군’이라 불리는 원주민 전통복장과 무장을 갖춘 이들이 아니라 ‘북미 대한제국군’이라 불리게 되는 정규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강재휘 장령의 계획에 동원되어 있던 전사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들도 불을 뿜는 막대의 파괴력은 익히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훈련된 북미 대한제국군의 지휘는 해병개척단에 소속된 길창준 위관이 맡았다.

그보다 직급이 더 높은 마에다 준령이 있었지만 그는 초대 단병격전병단장을 지냈던 시마즈 요시히로 장군이 속한 시마즈 가문의 자손으로 유격전에 특화된 면이 강했다.

총격전 위주가 될 북미 대한제국군의 전투 지휘로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총격전 지휘는 조선본토 출신 지휘관들을 따라올 이들이 없었다. 머리도 좋고, 판단력도 빨랐기 때문이다.

대신 해외5도 출신은 유격전에 능했고, 만주 4도 출신들은 육박전에 능통했다. 하지만 서부 3도 출신들은······. 대체로 고문관으로 통했다.

그들은 명령이 없는 한 스스로 움직이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한때 원수부 고위 지휘관 회의에서 서부 3도 출신들은 군관학당에 받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몇몇 나태한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반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휘관들의 불만에 이순신 원수가 허허롭게 웃으며 ‘조금 더 닦아 세워서 사람 만들어 씁시다’라고 한 말은 군내에서 유명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회자되면서 서부 3도 출신들도 각성해서 열심히 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여하간 조선 해병 군관을 지휘관으로 삼은 북미 대한제국군은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켜가면서 점령지를 넓혀갔다.

이들도 조선의 기본 군사정책을 이어받은 대한제국군이었기에 우선적으로 상대에게 설득과 협상을 먼저 시도했다.

하지만 평소 적대적이던 부족들이 섞인 대한제국군을 믿지 못하고 공격하는 원주민 부족들도 있었다. 이 경우 나총으로 무장한 북미 대한제국군은 월등한 화력으로 적의 공격을 분쇄해 냈다.

때론 전투가 격화되고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아 위기에 봉착할 경우, 해병개척단에 전령을 보내 구원을 청하기도 했다. 이 경우 해병개척단은 기병화 된 병력을 내보내 구원에 나섰다.

다총과 현식총, 그리고 수탄을 사용하는 조선군은 거의 무적이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북미 대한제국군 병사들과 조선 해병개척단 사이엔 깊은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새롭게 합류한 부족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이었을 때는 악마와 같았던 조선군이지만 아군일 때는 그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경험한 까닭이다.

북미 원주민들의 전사는 각 부족들의 현재 지도자들이거나 미래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이 속한 북미 대한제국군과 조선 해병개척단의 유대가 깊어질수록 그들이 속한 부족들과의 유대도 강화 되었다.

최근엔 비번인 해병들이 무장하지 않은 채 인근의 원주민 부락으로 놀러가는 상황까지 되었다. 처음엔 해병 특유의 객기에서 비롯된 내기의 일환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지금은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렸다.

그렇게 원주민 부락에 놀라가는 조선군 해병들의 대부분이 피 끓는 젊은 놈들이다 보니 원주민 아가씨와 눈이 맞는 경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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