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폐허가 된 암스테르담
‘충격과 공포’라 명명된 작전 계획은 완벽한 파괴에 그 중점을 두고 있었다.
점령이 상정되지 않은 이 작전은 대한제국 나아가 조선에 반했을 때 어떤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 유럽 각국에 각인시켜주기 위한 일종의 위력 시위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작전이 수립될 때 상당수 참모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강경한 작전의 구사를 주장했다.
그들은 포르투갈에 24만에 달하는 막대한 병력이 주둔해 있을 때 유럽이 다시는 도발하지 못할 정도의 뼈저린 상처를 남겨두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언제까지나 포르투갈에 지금과 같은 대병을 몰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이순신이 그 주장들을 수용했다.
곧바로 병력 선별에 나섰다.
우선적으로 선택된 병력은 소위 ‘해병 기마대’로 통칭되는 110여단과 120여단, 그리고 시크수색단이었다.
거기다 다른 여단의 포병대를 지원받아 대규모 포병세력으로 전환한 2개 여단을 추가로 선별하여 포르투갈 주둔함대와 함께 도착해 있던 조선무역선 1백 척에 나누어 태웠다.
네덜란드를 점령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추가 상륙은 상정되지 않았다.
이 수송함대에 앞서 이순신 함대가 1월 말,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헤치며 리스본을 출항했다.
이미 포르투갈 주둔함대의 임무를 띤 연합전대가 도착하면서 포르투갈 해안 일대의 경계 및 방어 임무에서 자유로워져 있던 이순신 함대는 작전에 투입되는데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
석탄을 만재한 채 석탄운반선들까지 동반하고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리스본을 떠난 이순신 함대는 곧바로 네덜란드 바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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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총독으로부터 선전포고로 받아들인다는 통보를 받은 네덜란드도 함대를 동원하여 전쟁 준비를 갖췄다.
이미 사절을 보내기 전에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 함대는 사실 사절단이 리스본을 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결성되어 있었다.
그런 네덜란드 함대가 온 바다에 깔아둔 경계망을 통해 이순신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암스테르담을 떠났다.
양측의 함대는 로테르담의 북쪽에 위치한 덴하그 앞바다에서 조우했다.
유럽에서 가장 바람을 잘 타는 뱃사람들로 정평이 난 것이 네덜란드인들이다.
같은 배, 같은 조건으로 출발해도 먼저 도착하는 것은 항상 네덜란드 선원들이 탄 배였을 정도로 그들의 범선 항해술은 탁월했다.
그런 네덜란드의 함대가 유리한 바람을 찾아 기동하는 사이 이순신 함대가 석탄운반선들과 분리되어 앞으로 나섰다.
선제공격은 이순신 함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람의 방향, 사격 위치에 구애받지 않는 주몽급 순양함의 특성을 살린 공격이었다.
일장함포의 최대사거리인 4천보(약7Km)에서부터 포격을 받기 시작한 네덜란드 함대는 패닉 상황에 빠졌다.
전혀 공격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거리와 방향에서 공격을 받은 까닭이었다.
일전에 비아나두카스텔루 앞바다에서 이순신 함대와 해전을 벌였던 에스파냐 호세 백작의 함대가 받았던 것과 같은 충격이 네덜란드 함대를 휩쓸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함대는 에스파냐 함대보다 훨씬 빠르고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일제히 배를 조선의 함선들과 직각이 되게 돌려세워 피탄 면적을 줄이고, 최대치의 속도로 돌진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대응책은 포의 발사방향이 선측으로 고정되는 일반적인 범선이었다면 상당한 효과를 보았겠지만 상대는 선회포탑을 보유한 주몽급 순양함이었다.
거기다 발사되는 탄도 부딪치는 순간 폭발하는 작렬탄이었다. 곡선을 그리는 선수부위에 빗맞을 경우 튕겨나가는 폭발탄과 달리 작렬탄은 충돌과 동시에 폭발했다.
네덜란드 함선의 선수를 박살내고 화염이 배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더구나 포격의 정확도가 무서울 지경으로 정확했다.
조선군은 해군이고, 육군이고, 해병이고를 가리지 않고 포병이라면 무조건 탄도학을 배운다. 강사가 자그마치 고등학당의 수석훈장이거나, 연구자들을 가르치는 대학당의 교수다.
배우는 심도와 범위가 각자가 다루는 포의 특성을 파악하는 정도인 유럽의 포수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더구나 포격술을 지원하는 각종 장치들의 도움도 받는다. 거기다 평시에도 강도 높은 훈련으로 포격술을 갈고 닦은 이들이었다.
비싼 화약이 아까워 평소 훈련에 소홀한 이 당시 유럽의 포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것이 조선의 포수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포격은 자로 잰 듯 정확해서 파도로 흔들리는 바다 위 포격임에도 불구하고 5할에 가까운 명중률을 보이고 있었다.
2발을 쏘면 1발은 맞는다는 소리다. 각종 최첨단조준 장치의 도움을 받는 현대시대로 보면 어이없을 정도겠지만 이당시의 포격술로는 거의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포격술이었다.
그런 이순신 함대의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포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네덜란드 함대는 그 이름만큼이나 기민하게 움직였다.
악착같이 무장상선들을 전방에 방패막이로 세우며 전열함들을 보호한 것이다. 그런 무장상선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초선포의 사격거리 안으로 접근에 성공한 네덜란드 전열함들의 수는 4척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접근 과정에서 모조리 격파되었다.
그렇게 큰 피해를 입으며 사거리로 접근한 네덜란드 전열함들이 일제사로 퍼부은 폭발탄은······.
네덜란드 선장들과 수병들의 바람과 달리 단 한발도 조선군 함선에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철선에 가해진 폭발탄 공격은 별다른 피해를 입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선체를 파고들어갈 수 없었다. 철로 만들어진 선체를 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간히 현식총을 사격하던 몇몇 수병이 갑판에 떨어져 폭발한 폭발탄의 파편이나 화염에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맞는 순간 폭발하는 조선군의 작렬탄은 목재로 만들어진 네덜란드의 범선에 사형선고와 같았다.
살아남아 접근했던 4척의 전열함도 곧바로 날아든 작렬탄에 직격당해 산산조각이 나며 침몰해 버렸다.
덴하그 해전이라 명명된 이날의 해전에서 네덜란드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준비했던 함대는 모두 격침되어 북해의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이날 이후로 바다에서 더 이상 이순신 함대를 막아낼 네덜란드의 해상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바다에서 조선군 함대를 막아내겠다는 네덜란드의 계획이 시작부터 산산조각 난 것이다.
네덜란드가 그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곧바로 덴하그를 시작으로 해변도시들이 모조리 이순신 함대의 포격을 받기 시작했다.
해변을 따라 이순신 함대가 북진하면서 해변도시란 도시는 모조리 포격해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마르커르호 안까지 들어온 이순신 함대가 네덜란드의 중심도시인 암스테르담까지 맹포격 하여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일방적일 정도로 강력한 조선 해군 함대의 전투력에 네덜란드 위정자들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포가 시작된 다는 것을 네덜란드의 위정자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순신 함대가 출항한 직후, 수송함대가 포르투갈 주둔함대 중 1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4척의 왕건급 호위함의 호위 하에 리스본을 출항했다.
이들의 첫 번째 목표는 오스텐트라는 작은 항구도시로 현대시대로 치면 벨기에 지방인 남부 네덜란드에 속한 곳이었다.
호위 함대가 상륙포격을 퍼부은 후, 곧바로 대한제국 해병대의 상륙이 시작되었다.
첫 상륙 대상부대는 해병 기마대였다.
이미 대규모 상륙을 경험해본 대한제국 해병대의 상륙은 상당히 유연하고 체계적이었다.
우선 보병 상태의 시크수색단이 먼저 내려 상륙거점을 확보하자 곧바로 110여단과 120여단을 태운 조선무역선들이 해변에 바짝 붙었고, 이내 말과 함께 대규모 상륙이 시작되었다.
이후 보급품을 실은 시크수색단용 기동마차들이 내려지고 해병 기마대가 완편(完制) 된 것을 확인한 수송함대가 해변에서 이탈하자 호위 함선들이 그들을 호위한 채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다.
오스텐트에 상륙한 해병기마대에 내려진 명령은 간단했다.
수백 년이 지나도 ‘대한제국’ 하면 네덜란드인들이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 주라는 것이었다.
이미 포르투갈 북부에서도 ‘해병기마대’라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가 나돌 정도로 흉명을 떨쳤던 이들이다.
그들이 다시금 동북아 유목민족의 거친 야성을 아낌없이 폭발시켰다.
거침없는 속도와 무자비한 파괴가 그들이 지나치는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이고, 불태웠다.
저항정신 강하기로 소문난 네덜란드인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 사방으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해병기마대는 북쪽으로 몰아쳐 암스테르담에서 다시 함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을 위해 해병 기마대는 광폭하게 몰아쳤다. 시간과 공간을 주어 저들이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병력을 모으게 만들지 않았다.
진격로 상에 위치하는 모든 크고 작은 마을과 도시를 불태우고 마구잡이로 약탈과 살인, 방화가 잇따랐다.
유럽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기마민족의 침입은 훈족의 침입이었다.
몽골의 침입이 동유럽에서 중단된 것과 달리 훈족의 침입은 당시 유럽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에 그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고스란히 유럽인들에게 공포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시간 이후로 네덜란드인들에게만큼은 가장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대한제국의 침입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만큼 해병기마대는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우고, 파괴했다.
특히 110여단의 파괴력이 발군이었다. 함께 작전을 펼치던 120여단과 시크수색단이 사색이 될 정도의 과격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악마본성을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았던 해병기마대였다.
거기다 전원이 몽골, 또는 여진으로 구성된 110여단의 특성 상, 이들의 야성을 최대치로 폭발시킨 전격전이었으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육로를 통해 암스테르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는 사이 수송함대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이미 이순신 함대의 맹폭으로 도시 전반이 파괴된 암스테르담에 상륙한 해병대는 곧바로 포병이 강화된 해병 병력을 전개, 함포가 닿지 않아 무사했던 나머지 구역을 초토화시켰다.
이 강화된 포병을 보유한 2개의 여단이 받은 명령은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를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리라는 것이었다.
그 명령에 따라 아예 도시를 평탄지처럼 만들어버릴 요량인지 두 해병여단은 가져온 모든 포탄을 암스테르담에 퍼부어버렸다.
며칠 후 폐허로 변해버린 암스테르담으로 해병기마대가 진입하자, 그들까지 다시 태운 수송함대는 이순신 함대의 호위 하에 유유히 암스테르담 앞바다를 떠났다.
그런 그들의 뒤에 남겨진 것은 완전히 파괴된 암스테르담과 해병기마대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참담함뿐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로도 한동안 주몽급 순양함을 몇 척씩을 보내 네덜란드 해변 일대를 수없이 공격했기에 네덜란드는 해변 도시를 전혀 재건할 수 없었다.
적일지라도 민간인들에 대한 한없는 관용 정책을 펼쳐오던 조선군의 기조를 그대로 내려 받은 대한제국군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무자비한 살상전이었다.
포르투갈 국민들을 통해 유럽 전역에 퍼졌던 대한제국군의 온건하고 정중하다는 평가가 완전히 뒤집히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유럽 전역에 대한제국, 또는 조선과 척을 지고서는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그래서인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대를 내세워 에스파냐에 3만에 달하는 대병을 파병해 두고 있었던 오스트리아가 회군을 결정하고 병력을 빼냈다.
그로인해 에스파냐의 위기설이 다시 유럽에 나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