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조선군 원수부
한참을 참모들과 논의한 이순신이 이 상태에서의 연합군 철군은 준가르에 치명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한성의 광해에게 주변으로의 정벌 확대를 청원하였다.
그냥 두고 철군하면 당장 준가르가 위험해질 것이고, 그것은 애써 건국을 도운 할하와 북원까지 흔들려 결국은 이번 대정벌로 이룬 북부의 안정화 작업이 무너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 지휘부의 장계를 받은 광해는 세 가지 사안을 지켜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상장군인 이순신에게 맡긴다는 비답을 보냈다.
광해가 지켜야 할 것으로 지목한 세 가지 사안은 북으로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도모하지 말 것.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을 도모하지 말 것. 남쪽으로는 무굴 제국을 도모하지 말 것 이었다.
그 외의 작전과 연합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모두 이순신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태왕의 비답을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북원과 할하로 전령을 보내 병력을 추가로 내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준가르에서도 병력을 추가로 징집하길 요구했다.
건국 조건에 들어있던 조선의 병력 동원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것에 응한 북원, 할하, 준가르 3국에서 한 달 만에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만들어 보냈다. 그들 모두가 유목 민족이라는 삼국의 특성에 따라 기마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로인해 연합군의 병력은 일순간에 40만으로 늘어났다.
이순신은 새로 늘어난 10만의 병력에 과거 오란찰포에서 투항한 병력에 후금군 기마대를 합쳐 자그마치 22만에 달하는 대규모 기마대를 구성했다.
그들을 누르하치의 첫째 아들이자 후금군의 지휘관이었던 추옌에게 맡겨 일대를 모조리 격파하고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22만에 달하는 기마대의 전투력은 끔찍하도록 강력했다. 일대의 소국들이 무수히 무너지고 점령당했다.
북으로는 볼가-우랄 타타르가 무너졌고,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의 후신이라 주장하는 사파비 제국의 국경에 이르는 투르크계 국가들이 복속했다. 남쪽으로는 무굴 제국의 변경에 접한 소국들까지 모조리 격파해 내었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그렇게 연합군이 점령하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3개월이었다.
내, 외 몽골과 오이라트 지역처럼 진군만으로 점령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투를 거친 것임에도 그러했다.
이것은 추옌의 독특한 전투 방법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는 전선에 일단의 병력을 투입해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또 다른 병력을 동원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국가, 또는 부족에 대한 점령전을 동시에 진행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전선에 병력을 투입한 국가나 부족의 입장에서는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적군이 본거지로 들이닥치는 상황이니 기겁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추옌은 추가적인 저항의 의지를 꺾고 이른 시간에 항복을 받아내는 이득까지 취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작전은 추옌의 독창적인 작전은 아니었고, 출병하는 그에게 이순신이 가르쳐준 몇 가지의 작전 중 하나였다.
스스로 이순신의 제자라 자부하는 추옌이 그것을 충실히 따른 결과였던 것이다.
그로인해 이 지역에 바람같이 달려 산사태처럼 쓸어버린다는 속담을 만들어 준 연합군 기마대의 전격적인 작전이 순식간에 끝을 맺었다.
진군이 중단 되었다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며 제국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주변국들도 상당히 놀랐다.
특히 카자흐 칸국과 접경을 이루고 있던 사파비 제국은 사신을 준가르로 보내 교류와 협력 근간으로 하는 화해를 요청해 왔다.
이로서 주변 국가들이 준가르의 군대와 연합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려주는 계기였다.
그들은 준가르군으로 아는 연합군이 사파비까지 도모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것은 무굴 제국도 다르지 않았다.
무굴 제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라 불렸던 악바르 1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자한기르 황제는 부황 못지않은 수완가로써 그는 신속히 사신을 보내 무굴 제국과 준가르가 척을 지지 않길 바란다는 뜻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무굴 제국은 준가르가 소위 조선 연합이라 불리는 동북아 연합의 일원이라는 것과 이번 전투가 그 연합군 전력에 의해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조선이라면 이미 몇 년 전부터 마드라스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라 작지만 교류를 이어오던 터라 무굴 제국은 굉장히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
마드라스 행정청과 나름대로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던 무굴 제국은 한걸음 더 나아가 교역이 가능한지를 타진했다.
마드라스를 거쳐 무굴 제국에 통용되어가는 교역품의 물량과 질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은 보아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통한 교역물품보다 훨씬 뛰어난 것들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것은 현 황제인 자한기르였다.
황실에서 사용하는 다수의 물품이 바로 마드라스를 통해 조달된 동방의 자기와 물품들이었기 때문이다.
무굴제국의 타진에 이순신은 교역의 확대를 준가르 왕실과 마드라스 행정청과 직접적으로 논의하길 바란다는 답을 주어 사신을 돌려보냈다.
그것으로 마드라스와 준가르를 비롯한 북부의 조선 연합이 같은 세력이라는 것을 확인한 무굴제국은 마드라스를 통한 교역의 확대와 준가르와의 육상 교역 확대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무굴 제국의 입장에서 확장을 거듭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포르투갈과 달리 마드라스를 차지한 이래 조용히 교역에만 집중하고 있는 조선이 교역의 상대로 나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무굴 제국은 마드라스의 조선군 무장이 무굴 제국군을 공포로 몰아넣던 포르투갈군과 비슷한 것을 확인한 터라 군사적 교류까지 확대하길 원했다.
군대를 현대화해서 포르투갈 문제를 해결해 보려했던 것이다.
당시 무굴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협력으로 포르투갈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 보았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조선이라는 새로운 협력자에 기대를 걸어 보려던 것이었다.
이렇듯 사파비 제국과 무굴 제국이 준가르를 포함한 조선 연합과 교류를 늘려가던 것과 달리 북쪽의 모스크바 대공국은 자신들의 내분에 정신이 없어서, 또 서쪽의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유럽에 매여 있어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조선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확대와 교류는 사파비와 무굴 제국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뒤늦게 티베트와 위구르의 유력 가문들이 사신을 보내 건국에 대한 도움을 청했다.
당시 여러 가문과 부족이 난립하며 정세가 안정화 되어 있지 못했던 티베트와 위구르로 이순신은 접경을 이룬 준가르의 병력과 할하의 병력을 나누어 보냈다.
그들의 도움을 받은 유력가문들이 양쪽에 티베트 칸국과 위구르 칸국을 세웠다. 그들도 조선 연합의 일원으로 할하와 몽골, 준가르와 동일한 의무를 지어야 했다.
또한 그것은 추옌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순신에 의해 다시 재건된 카자흐 칸국도 마찬가지였다.
북부와 서부 일대에 걸쳐 세워진 이 6개 칸국을 역사가들은 조선 연합 6대 칸국이라 기록했다. 추상적인 조선 연합이란 포괄적 집단이 일정한 정치적 집단으로 실체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에 반해 추옌의 기마대를 통해 정벌한 중앙아시아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수도 없이 난립한 부족과 소국들을 정비하여 국가를 세우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이쪽의 힘을 보여 감이 도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정벌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정벌과 티베트와 위구르의 건국까지 마무리 지은 연합군은 광부3년, 서기로는 1606년 5월 회군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회군하기 전에 6대 칸국이 협력하여 외부의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놓았다. 그것을 상장군 회의라 불렀는데 이순신의 직책에서 따온 것이었다.
재미있게도 연합군의 회군 이후에도 상장군이 없는 상장군 회의는 6대 칸국에서 매년 개최되었고, 6대 칸국의 군사적 교류의 장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다.
약탈이 금지된 최초의 정벌 전쟁인 연합군의 유라시아 대정벌로 인해 연합군에 참여한 각국의 장병들은 전쟁에서 직접적으로 얻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것은 급료를 받는 조선군과 달리 오로지 군역으로써 종사해야 했던 연합군 각국 장병들에게 꽤나 큰 실망요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합군 장병들에게 상국 조선이 상당량의 은을 하사품으로 풀었다.
당장 돌아가 먹고 살길이 막막한 탓에 풀죽어있던 연합군 각국 장병들이 조선의 은덕을 칭송하며 태왕 폐하 만세를 연창했다.
그들에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자국의 국왕보다 자신들의 어려움을 살펴준 조선의 태왕이 진짜 자신들의 군왕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것은 연합군 장병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면서 조선에 대한 각국의 지배력을 더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것은 소위 조선 연합이라는 구체적인 조직의 태동을 야기했다.
승전을 하고 돌아온 이순신과 병사들에게 한성의 대로를 따라 행진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조선에서는 최초로 벌어진 개선(凱旋) 행진인 셈이었다.
백성들이 길가로 나와 늘름하게 행진하는 조선군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고, 꽃가루를 뿌려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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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이순신을 광해가 조선군 원수(元帥)에 임명했다.
조선 육군과 해군, 해병대를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조선군 최고 지휘관에 임명한 것이다. 그로인해 개설된 조선군 통합지휘부를 달리 원수부라 부르게 되었다.
원수는 삼정승과 같은 1품의 관리로 군부에서는 처음 도입된 직급이었다. 이것으로 군부에서도 삼정승에 준하는 직급이 생긴 셈이었다.
이순신이 그 무한한 영광을 안고 감격해 했다.
그런 이순신의 제의로 조선 연합이 한성 조당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막연한 사회, 권력 기반의 포괄적 집단이 아니라 실제적인 결속력을 갖는 정치적 권력기구화가 목표였다.
그러니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연합처럼 느슨한 형태의 정치집단이 아니라 미국처럼 강력한 중앙 결속력을 가진 국가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명과 남진, 후금, 그리고 나고야와 동일본 모두는 그 체제를 거부할 힘이 없었고, 조선은 그것을 강제로 실행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6대 칸국의 경우엔 조선에 대한 의지정도가 컸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것이든 거부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추진된 조선 연합 구상을 들은 광해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잘하면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국가를 조선이 세울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다수의 학자들과 정치가, 그리고 군부의 장수들이 동원되어 조선 연합이 창설 되었을 때 각국의 반응과 그 대응방법, 향후 설립 후 유지 방법 등에 대해 다각도의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모든 결과가 광해에게 보고된 것은 이순신이 개선한 7월로부터 3개월이 지난 10월이었다.
조사단이 올린 보고서를 심도 있게 검토한 광해가 조선의 속국인 11개국 국왕을 직접 조선의 한성으로 불렀다.
대리인의 참석은 불허되었다. 동일본의 경우엔 왜왕과 함께 실질적인 지도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조도 함께 명령되었다.
조선 연합의 구성 가능성을 가늠하는 첫 시험대가 그렇게 차려졌다.
새로 문호를 열거나 재건된 6대 칸국과 남진, 나고야 왕국은 두말없이 그 명에 복명했다. 하지만 명과 후금, 그리고 동일본은 주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