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46화 (146/325)

제146화. 확전(擴戰)

한성 조당에서 천도 이야기가 나왔다.

현재의 왕도인 한성이 강역이 넓어진 조선을 다스리기에 너무 서남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 강역도(疆域圖)를 펼쳐놓고 한성의 위치를 찍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동쪽으로 뻗어나간 영토가 훨씬 넓으니까. 거기다 남쪽으로 치우쳐있다는 이야기도 맞고.

그에 따라 조당은 천도에 관한 조사를 직접적으로 개시하여 몇 군데의 후보지를 선정하기 까지 했다.

그렇게 한성의 조당에서 선정한 후보지는 과거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옛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지안)터와 평양이 조심스럽게 거론 되었다. 두 곳 모두 압록강과 대동강을 끼고 있어 기본적인 왕도로써의 기능은 가능한 지역이었다.

북쪽으로 넓어진 영토를 경영하자면 가능한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유리했다. 왕도가 북쪽으로 올라가면 대부분의 땅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북부의 개발에 더 탄력이 붙을 것이고, 사람들의 이주도 수월 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당의 대신들 중 상당수가 옛 국내성 자리를 선호했다.

평양이야 지금도 북도로 두어 중히 다루고 있는 곳이니 그 위치나 환경은 나무랄 것이 없었다. 다만 평양의 경우엔 여전히 남쪽에 치우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에 지지하는 대신들의 수가 적었다.

따라서 한성 조당의 대신들은 옛 국내성 자리를 관심 있게 검토했는데 이 경우엔 바다로의 접근이 평양보다 불편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바다로의 접근 거리가 평양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250리(약1백Km)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름대로 불편함 이상의 문제였는데 해외 5도와 대만도 및 말라카 등 해외 영토를 생각하면 바다와의 접근성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사항이 고려되고 수많은 논의가 거쳐진 뒤 결정된 한성 조당이 천도할 지역으로 선정한 것은 옛 국내성 자리였다.

이것을 한날, 조회에서 태왕에게 주청하였다.

그 청에 광해는 꽤나 놀랐다.

한나라의 수도란 단순이 지리적인 이동만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리적인 이동은 정치세력의 변동도 함께 초래하는 법이었던 까닭이다.

한성의 경우 흔히 삼남이라 부르는 전라, 경상, 충청의 세력이 강성할 기회를 주지만 만약 국내성 자리로 옮긴다면 인근의 함경, 남간도를 비롯한 북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정치세력인 지금의 조당 대신들의 권력은 당연히 줄어들거나 자칫 소멸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먼저 천도이야기를 꺼내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들의 이권보다는 나라의 미래를 먼저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조정 신료들도 많이 바뀌기는 했다.

아직 최상부를 이루는 이들은 여전히 사림 출신들이 많았지만 중하위 관료들은 인적구성과 출신 성분들이 굉장히 다양해졌다.

북부 4도는 물론이고, 해외 5도 출신 관료들도 이미 적지 않게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서부 3도 출신의 관료들도 조당의 관료로 진출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거기다 노비였던 이들부터 장사치와 기술자 등 그 출신성분도 다양해졌다. 모두가 출신을 따지지 않는 광해의 철칙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양해진 인적구성이 조당의 정책결정 방식과 과정도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조당의 주청에 대해 광해가 고심해 보겠노라 답했다.

한성에서 천도의 이야기가 나오던 시기 이순신이 지휘하는 연합군의 유라시아 대정벌은 ‘대정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평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 오란찰포 대회전에서 몽골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던 에케 바카투루가 참살되고 몽골군이 무너지거나 투항한 이후 몽골 전역의 저항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내몽골, 외몽골, 심지어 서부 오이라트와 일대의 타타르까지 거의 모든 부족이 순순히 연합군에 손을 들고 항복해왔다.

하긴 에케 바카투루라는 구심점이 무너진 상황에서 30만의 대병을 보유한 연합군에 부족단위로 대항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 덕에 오란찰포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4월에서 겨우 6개월이 지난 10월엔 과거 몽골 제국이 차지했던 북부지역 거의 대부분을 연합군이 점령할 수 있었다.

진군만으로 점령이 끝나는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진 결과였다. 그에 따라 이순신은 점령지에 대한 향후 처리에 대해 광해에게 비답을 청했다.

이순신의 요청에 한성 조당의 대신들은 해당 지역을 모두 강역으로 삼거나 연합국에 불하하라는 청을 올렸지만 광해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거부했다.

조선의 강역으로 삼기에는 너무 넓어서 제대로 관리하기 힘들고, 해당 지역이 이슬람 문화권과 접경을 이룬다는 것도 불안한 요인으로 보았다.

또한 연합군 각국에 불하할 경우 본토와 멀리 떨어진 해외영토를 관리한답시고 연합군 내부에서 분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고려되었다.

따라서 광해는 해당지역의 토착 세력으로 하여금 나라를 건국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조선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삼기를 원했다.

일종의 조선 연합의 일원으로 삼을 위성국가 들을 세우길 원했던 것이다.

태왕의 왕명에 따라 이순신은 내몽골에 북원, 외몽골에 할하, 그 서쪽에 오이라트가 중심이 된 준가르의 건국을 도왔다,

조선의 속국으로 태왕의 책봉을 받고, 매년 일정한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요구가 있을시 지체 없이 병력을 낸다는 조건이 붙은 건국이었지만, 모조리 조선의 땅이 될 줄로 만 알았던 토착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고 왕국까지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크게 고무되어 그 조건들을 수용하여 연합군의 건국 과정을 두말없이 따랐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투항했던 몽골군 중에서도 잔류를 희망하는 이들이 나왔다. 그들의 요청을 이순신이 흔쾌히 수용했다.

물론 연합군의 임무가 끝나는 시점까지의 종군은 의무적으로 부여되었다.

그 결과 12월이 지나기 전에 점령지에 조선의 위성국가인 북원과 할하, 준가르의 건국이 마무리 되었다.

그로써 유라시아 대정벌이 끝날까 싶었던 시기, 연합군은 생각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롭게 건국된 준가르와 접경을 이루게 된 카자흐 칸국이 위기를 느끼고 군대를 동원해 도발해 온 것이었다.

몽골의 유럽 정벌 과정에서 세워진 금장한국(金帳汗國, 킵차크 칸국)의 후신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카자흐 칸국의 전투병들은 몽골군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이 보였다.

기마에 능했고, 활과 긴 창을 썼으며 화승총에 불과했지만 총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총을 가진 이들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분명 총기를 다루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카자흐 칸국의 병력은 화포는 장비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카자흐 칸국의 군대가 서부 일대의 타타르와 오이라트로 구성된 준가르 군과 충돌했다.

당시 준가르 군은 연합군에 투항했던 이들 중 잔류를 희망한 타타르와 오이라트 병력에다 각 부족에 남아있던 전사들을 일부 합류시켜 구성한 1만 정도의 병력이었다.

준가르는 그것에 조선군식 직제를 본 따 준가르 병단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는데 그들이 카자흐 칸국의 병력과 충돌한 것이었다.

실전을 겪은 부대에다 화포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과의 작전 경험을 가진 준가르 병단은 꽤나 역동적으로 움직여 카자흐 칸국의 병력을 격파했다.

양쪽 모두 1만 정도의 비슷한 병력을 동원한 데다 전투력도 비슷해서 그렇게 쉽게 결판이 날 싸움은 아니었는데 준가르 병단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패전에 당황한 카자흐 칸국이 협상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3만의 대병을 몰아 다시 전투로 나왔다.

초기 건국과정에서 주변국과의 충돌로 준가르가 흔들리거나 무너질 경우 할하와 북원까지 문제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이순신이 전투에 연합군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미 회군을 위해 병과별 분류를 해체하고 각국의 병력으로 환원하여 대기하고 있던 연합군 병력 중 이순신이 동원한 것은 준가르 병단과의 연계가 수월한 후금군이었다.

이순신의 명령을 받은 후금군은 이동속도가 느린 보군으로 구성된 한족팔기는 주둔지에 남겨둔 채 기마대만으로 출병했다.

여전히 1만7천 가량의 만주팔기와 몽골팔기의 기마대로 구성된 후금군 기마대는 곧바로 준가르 군과 합류했다.

기동성을 중시한 준가르도 모두 기마대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금군과의 연합작전은 꽤나 수월했다.

이순신이 후금군의 지휘관인 추옌에게 지시한 것은 간단했다.

<준가르 군을 지원하여 적을 격파할 것.>

여기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이순신이 생각한 격파와 추옌이 생각하는 격파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3만의 대병을 몰아친 카자흐 칸국의 군대를 화려한 기동과 화포의 연계로 박살을 내버린 후금군이 준가르군과 함께 그대로 카자흐 칸국의 영토로 진격한 것이다.

단숨에 그들의 왕도까지 진격한 후금군 기마대에 놀란 카자흐 칸국의 칸이 왕도를 버리고 피난까지 떠나야 했던 것이다.

위기를 느낀 카자흐 칸국은 다시 수만의 병력을 모아 대항을 하려 했지만 수많은 실전에 단련된 후금군 기마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수천의 전사자를 남긴 채 모았던 병력은 흩어지고, 칸은 사로잡혀 추옌의 앞에서 목이 잘려나갔다. 그가 추옌의 조상을 그의 면전에서 모욕한 대가였다.

카자흐 칸국이 그렇게 엉겁결에 멸망했다. 겨우 보름 정도의 전투를 거친 결과였다.

준가르의 건국이 마무리되고 각국의 영역을 정하며. 연합군의 회군 준비로 바빴던 이순신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일로 카자흐 칸국의 북쪽에 거주하던 볼가-우랄 타타르가 그 일에 자극을 받아 거병을 했다는 점이었다.

3만의 볼가-우랄 타타르 기마대가 무서운 기세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늦었지만 카자흐 칸국의 멸망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던 이순신의 척후대가 그 사실을 즉시 보고했다.

죽어버린 카자흐 칸국 칸의 후손을 찾아 다시 카자흐 칸국의 재건을 추진 중이던 이순신은 곧바로 후금군과 준가르군을 뒤로 물리고, 나고야 병단과 뒤에 남아있던 한족팔기를 엮어 방어 태세를 갖췄다.

아울러 제7기동병단에서 2개 병단을 호출했다.

불행히도 전투는 기동전단의 2개 병단이 도착하기 전에 벌어졌다.

3만의 볼가-우랄 타타르의 병력은 타타르라는 명칭이 의아할 정도로 서구화된 이들이었다. 하긴 일대의 유목민족 대부분을 타타르라 부르는 것이 현실 이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긴 했다.

그로인해 타타르는 멀리 시베리아부터 더 서쪽의 러시아 공국 밑의 조지아 지역의 크림 타타르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이번에 거병한 볼가-우랄 타타르의 경우 일대에선 전투력이 끔찍하도록 강력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군대였다. 하지만 연합군과의 일원인 나고야 병단과 한족팔기와의 전투에선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백년이 넘는 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데다 조선 군사고문단의 훈련으로 화포위주의 전투력을 확고하게 갖춘 나고야 병단이 그들의 거센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화포 일제사, 삼단사격을 통한 제압사 등 화약무기의 체계화된 방어전술에 휘말려 제대로 된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퇴각해야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퇴각하는 볼가-우랄 타타르의 병력을 나고야 병단에 배속되어 있던 소수의 기마대가 쫓아가며 피해를 확산시켰다.

여전히 사무라이들로 이루어진 1백 가량의 나고야 병단 기마대는 그 처절한 무력을 확실하게 볼가-우랄 타타르에게 각인시켰다.

이 전투로 사태가 일단락되길 희망했던 이순신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그 전투를 계기로 일대의 각국과 민족들이 준가르를 심각한 위협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어버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연합군을 준가르군과 구별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내 일대의 모든 나라와 부족들이 병력을 모으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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