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급보(急報)
후금군을 격파한 몽골군은 다행히 조선군의 재배치가 마무리 지어진 7월까지 오란찰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덕에 조선군은 무사히 전력개선과 재배치를 완료할 수 있었다. 이번 재배치 과정에서 광해의 계획에 의거하여 조선군은 현대적인 체계로 거듭났다.
지방주둔군 체제를 전단체제로 바꾸어 5개 병단을 보유한 전단 7개로 육군 전체를 개편한 것이다.
왕도방어 병단을 포함한 5개 병단으로 구성된 제1전단은 전통적인 조선 본토 8개 도를 방어하는 충정 부대로써 편성되었다.
2전단은 남간도를 포함한 만주 4도를 방어하는 부대로 배치되었고, 3전단은 하북도를 포함한 서부 3도를 방어하는 부대로 배치되었다.
개마와 철산, 두개의 돌격기마 병단과 단병격전 병단, 그리고 산악전 부대를 통합하여 특수부대로 구성된 4전단은 함경도에 주둔했다.
북해도를 제외한 해외 5도엔 5전단이 배치되었고, 본토와 멀리 떨어진 북해도, 대만도를 포함해 해외 영토인 말라카와 마드라스의 방어임무는 6전단이 맡았다.
그로인해 6전단은 수군 해외 원정단이 이름을 바꾼 제21원정함대와 연계해 해외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부대를 교대로 운영하도록 했다.
제7기동전단으로 이름을 바꾼 타격전단은 이전처럼 동래에 배치되어 어디로든 투입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아울러 수군에 배속되어 있던 해병대를 별도의 군제로 분리해냈다.
그것을 위해 5개 여단 2만5천의 해병대를 10개 여단, 5만으로 확대하고, 해병대 안에 1만의 해외 원정단을 구성했다.
해외 원정단의 안정적인 작전 투사를 위해 수군과 별개로 구성한 해병강습함대를 해병대 직속으로 배치했다.
이 해병강습함대는 해모수급 전열함 5척과 왕건급 호위함 10척을 50척의 조선무역선과 하나로 묶어 구성되어 있었다.
이로써 조선 해병대는 수군의 지원 없이 단독 상륙작전이 가능한 군대로 탈바꿈 했다.
이런 일련의 편제 변경과 재배치로 인해 조선은 40만의 지상군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은 제7기동전단과 해병대를 통해 두개의 전장에서 동시에 전쟁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여 이전에 비해 훨씬 능동적인 군사적 대처가 가능하게 변모했다.
지켜야 할 영토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병력은 겨우 5천명 늘어난 것에 그친 이번의 조선군 재배치는 모든 병력의 전문화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 병사들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장비의 개선과 개량이 이루어졌고, 실전적인 전투훈련이 강화되었다.
조선은 향후 군 병력의 전문성을 더욱 키우기 위해 전군을 모병제를 통한 직업군인으로 대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내년부터 대규모 모병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모병제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병력자원에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떨어지면 군역 기간을 현재의 3분지 1인 1년으로 줄인 군역병들을 모두 포청에 배속시켜 치안 임무에 투입할 계획이다.
영토가 넓어지면서 포청의 순찰 병력이 대규모로 필요해 진 것에 따른 전환배치의 일환이었다.
육군과 해병대의 재배치가 끝나자 광해는 지체 없이 수군의 재배치를 실시했다.
서부 3도의 편입으로 서해가 완전히 조선의 내해(內海)가 됨으로써 일부 수영의 구성과 임무 변화가 불가피했다.
강화수군별영과 한산별영을 묶어 연안 경비단을 창설해 장갑귀선과 판옥전선을 통할하게 했다.
이로써 서해와 남해 연안을 경비하게 된 연안 경비단은 20척의 장갑귀선과 20척의 판옥전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해를 통할하는 함경 수영을 1함대로, 남해와 탐라 일대를 담당하는 전라 수영을 2함대로, 일본 전 해상을 담당했던 구주 수영을 3함대로 개칭했다.
북해도를 담당했던 북해 별영은 3함대에 통폐합 되었다.
아울러 광해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동태평양 함대의 명칭을 이순신 함대로 바꾸었다. 그것을 수군 총사 이순신이 굉장히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간 거제를 모항으로 삼았던 서태평양 함대를 기동함대라 개칭하여 상해로 옮겼다. 기동함대를 본격적인 유럽 항로의 방어함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처였다.
이것을 위해 기동함대엔 왕건급 호위함 20척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광해는 이 호위함들을 활용해 조선과 유럽 간의 항로를 지속적으로 순찰하도록 지시했다.
그간 동태평양 함대와 서태평양 함대에 각각 배속되어 운용되었던 수송함대를 분리하여 제11수송함대와 제12수송함대를 구성해 별도의 함대로 운용하도록 했다.
조선 무역선단급 보급함대 3개를 묶어 제13수송함대를 추가로 구성했다.
이들은 각지로 분산된 조선군에 보급물자를 수송할 세력이었다.
아울러 해외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편성된 해외 원정단을 21원정함대로 개칭하였다.
이와 같은 편제 변경을 마친 조선 수군을 해군으로 개칭하여 부르도록 했다.
또한 모든 함선의 함포를 야포, 그러니까 일포에서 이포로 개장하였다.
이로써 조선 해군이 보유한 함선들의 함포 최대 사거리가 3천보로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여러 차례 시험에서 증명된 대로 일반적인 범선의 외장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선 2천보까지는 접근해야만했다.
이때에도 사격 각도에 따라, 또는 바람의 영향에 따라 튕겨나가는 탄이 나오기도 한다.
따라서 전탄 관통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목표함선과 1천5백보로 그 간격을 좁혀야 한다는 제한 조건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시대엔 적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거리와 파괴력이었다.
수군의 재편까지 모두 마친 8월, 복수를 다짐한 누르하치의 후금군 5만이 북진을 개시했다. 이 군대에 처음으로 한족팔기가 등장했다. 누르하치가 생각보다 빠르게 점령지의 한족을 통합하고 있었다.
*****
찬바람이 불어오던 9월, 북해도에서 시범 생산된 설탕이 왕실에 진상되었다. 조선에선 설당이라고도 불렀는데 제법 달기가 현대시대의 설탕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정제가 덜 되었기 때문인지 약간의 잡맛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간 중국과 유럽 상인들을 통해 인도에서 건너왔던 설탕과는 구별이 어려울 정도의 품질을 보여주었다.
북해도는 내년부터 대량의 사탕무재배를 시작해서 대규모 설탕 제조에 나설 계획이었다.
처음엔 속을 썩이기도 했던 아이누 원주민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 사탕무 농장이나 설탕 공장에서 일을 하며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극소수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고집하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누들은 조선식의 거주지에서 조선식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굉장히 만족스러워 했다.
광해는 시범 생산된 설탕의 일부를 조선 무역선단 편에 유럽으로 보내 그 판로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시범 생산으로 만들어진 1천근(6백Kg) 중에서 5백 근이 부산포를 떠나는 조선 무역선단에 실려 유럽으로 향했다.
군항과 외국 무역항으로 사용되는 부산포의 항구 시설이 연일 확충에 확충을 거듭하고 있었다. 확대일로에 들어선 조선과 유럽 간의 교역이 부산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향항이라 불리는 홍콩도 다르지 않았다. 명과 유럽 간의 교역을 여전히 독점하고 있는 철산 상단의 교역을 담당하는 조선 무역선단들이 홍콩을 기항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활성화된 무역항로를 지키기 위해 조선은 기동함대 소속 순찰전대들을 투입했다.
왕건급 호위함 5척으로 이루어진 순찰전대들은 상해와 홍콩 간, 홍콩과 말라카 간, 또 말라카와 마드라스 간 항로의 순찰에 지속적으로 투입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사시 말라카와 마드라스에 전개되어 있는 21원정함대 소속 원정전대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 본토를 비롯해 모든 영토에서 무서운 속도로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변화하고 있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나라들이 여전히 베틀로 옷감을 지을 때 조선은 증기기관을 사용한 방직기로 옷감을 대량 생산하고 있었다.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기술과 산업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사회 전반이 급속도로 근대화되고 있었다.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광해가 교육에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선의 영토 어디에도 학당이 설치되어 학생을 가르쳤다. 기초적인 학문은 물론이고 실전적인 현장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고등학당들이 기술자들과 실제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또한 연구소의 이름을 단 수십 개의 학술 단체가 왕실의 지원으로 꾸준히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화학연구소였다.
화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조선에 처음 화학연구소가 들어섰던 것은 광해가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던 13년 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름 현대의 기억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던 광해가 화학자를 꿈꾸는 실학자들을 모아놓고 연일 강의를 했다.
왕이 하는 강의여서였던지 화학에 뜻이 없으면서도 참여했던 일부 학자들이 화학자로 들어선 것도 성과라면 성과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악착같이 외웠던 화학 지식들이 그렇게 조선의 학자들에게 전수되었다.
왕이 설파한 많은 것들이 이 시대의 기술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조선에서 화학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학문이란 뜻의 무견학(無見學)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랬던 화학연구소가 뜻밖의 성과를 내었다. 황과 초석을 함께 태워 이전 방법보다 대량의 황산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독일의 화학자인 글라우버가 17세가 중반에 성공시킨 일을 조선의 화학연구소가 수십 년을 앞당겨 성공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엔 초석, 그러니까 질산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염초밭에서 질산을 어렵게 구하고 있는 조선으로써는 그렇게 사용되는 질산까지 공급할 여력이 없었다.
조선의 해외영토인 마드라스를 통해 인도에서 초석을 수입하는 방안이 강구되고 있긴 했지만 아직은 계획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에 따라 화학연구소는 초석의 사용량을 줄이면서 황산을 만들어내는 연구로 발전시키는 중이었다.
황산의 대량 생산은 화학과 산업 발전에 기초가 되는 물질이었다. 아울러 무연화약에도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었다.
그런 황산의 대량생산의 기틀을 마련한 화학연구소의 연구자들에게 광해가 크게 포상하고, 그 노고를 치하했다.
*****
모처럼 파란 가을 하늘아래 광해가 중전과 아직 강포에 싸인 왕자와 함께 궐내의 정원을 걸었다.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광해였기에 이렇게 소소한 시간을 낼 수 있는 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함께 걷는 중전의 입가에 미소가 깊게 자리해 있었다.
광해는 여전히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조당의 대신들이 꺾지 못한 것이다.
그로인해 요사이 반가에서 첩실을 들이는 행동을 비난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감히 왕도 하지 않는 일을 하려든다는 논리였다.
많은 수의 여성들이 그 논리로 첩실을 들이려는 낭군들을 주저앉히는 경우가 속출했다.
이전이라면 감히 생각도 못했을 일이지만 부족한 노동력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광해의 조선에서는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여성의 발언권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을 만들어낸 까닭인지 광해는 이 땅에 존재했던 역대 그 어떤 군왕들보다 조선의 여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군왕이었다.
그런 광해가 중전의 품에 안겨있는 왕자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휘가 중전을 닮아 살결이 매우 곱구려.”
말인즉 중전의 살결이 곱다는 뜻이다. 그런 광해의 말에 중전이 부끄러운 듯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런 중전을 보며 광해가 말했다.
“이제 둘째도 보아야 하지 않겠소?”
왕자의 생산이후, 왕과 중전의 합궁은 금지되었다. 빌어먹을 법도라는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하긴 아직도 부족한 의료수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광해도 고집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광해는 이제 그것을 파하자고 은근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광해의 말에 중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좋았던지 짙게 미소 짓던 광해에게 황급히 달려온 병부 관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급보이옵니다.”
“무슨 일인가?”
급보라 말하는 이가 병부 관리라는 점에서 묻는 광해의 표정에 걱정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