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되치기
투삼구도 익히 이름을 들어봤던 역전의 장수들이 즐비한 가운데서 후금군의 총지휘관이라고 나선 이는 이제 서른도 넘지 않은 젊은 장수였다.
“후타이라고 합니다. 장군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투삼구라고 하오. 날 아시오?”
“신인의 칼이라 불리는 투 장군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과거 여진인으로써는 가장먼저 광해의 편에 섰던 까닭에 붙은 별명이다.
“그랬소? 한데, 얼마나 온 거요?”
“3만입니다. 약속했던 대로.”
“약속대로면 남쪽에서 올려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소만.”
“서로 다른 소속의 군대가 벌이는 작전이니 손발이 맞지 않을 터. 자칫 우발적인 충돌이라도 일어날까 싶어 차라리 함께 움직이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랬소? 그럼 나머지 후금군은?”
“역시 작전대로 칸과 함께 합비에서 명나라의 남부에서 올라올지도 모를 방해군에 대비하고 있지요.”
“남부는 어떻소? 움직임이 있소?”
“우리가 떠날 때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그렇구려. 원로에 고생이 많았을 텐데 여장을 풀고 쉬시구려. 경계는 우리 조선군이 설 테니까.”
투삼구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후금군의 장수들이 몇몇 보였지만 후타이가 손을 내저어 가라앉힌 후 답했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후금군 장수들이 돌아가자 한 조선군 장수가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알아. 뻔히 저놈들과 함께 있던 기마대의 존재를 우리가 아니까.”
“한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우리 뒤통수를 치고 싶던가, 아니면 믿지 못하는 것이겠지.”
“뭐라고 보십니까?”
“뒤통수.”
“그럼 이제 어찌 하실 겁니까?”
“일단 조용히 2대와 3대에 연락을 넣어. 잠시 보자고.”
“예. 장군.”
복명한 장수가 나가자 투삼구의 표정이 복잡해보였다. 그가 무언가 생각을 깊이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잠시 후, 눈에 띠지 않게 2대를 지휘하던 호정이와 3대를 지휘하는 니탕개가 조용히 돌아왔다.
그들에게 투삼구가 물었다.
“이야기는 들었지?”
“대충은.”
니탕개의 답에 투삼구가 다시 물었다.
“어찌 생각해?”
“뒤통수라면서? 그러면 볼 거 있나? 그냥 대가리 깨버리는 게 장땡이지.”
니탕개의 답이 끝나기 무섭게 조심성 많은 호정이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러다 잘못 안거면? 그저 우리를 믿지 못해서 예비대를 운영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런 놈들의 대가리를 깨놓으면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하고? 신인께서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걸.”
신인이 거론된 때문인지 니탕개가 처음의 강경한 태도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럴 수도 있긴 있지만······.”
“그래서 어쩌자고?”
투삼구의 물음에 호정이가 답했다.
“두고 보지. 일단 대비는 해뒀으니까.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대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그것도 그러네. 우리가 대비는 해 놓은 거니까.”
금세 흔들리는 니탕개의 말에 잠시 생각해보던 투삼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깨자. 저놈들이 일을 벌인 후에 움직이면 아무리 대비를 잘해도 우리 애들이 많이 상할 거다. 신인께 차라리 내가 잘못 판단해서 후금놈들 대가리를 깨놨다고는 해도, 진즉 눈치 챘으면서 머뭇거리다 애들 날려먹었다는 보고는 죽어도 못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이번에도 신인이 거론 되었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낀 니탕개가 흔들렸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 신인께선 워낙 애들을 귀히 여기시니까.”
그 부분은 호정이도 부담이 되었던지 되물었다.
“정말 확신해? 저것들 우리 뒤통수 까려는 거라고?”
“내 감이 그래.”
“감?”
“그래. 감.”
“빌어먹을 내가 네 감을 믿고 모가지를 거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알았다. 신인께서 지목한 지휘관은 너니까. 결심하면 따른다.”
호정이의 결정에 니탕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답에 투삼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싱거운 인사는 집어치우고,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
호정이의 물음에 피식 웃은 투삼구가 막사의 흙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들어온 후금놈들은 나와 1대가 맡는다. 2대는 명군 쪽을 맡아.”
“우리 2대만으로 6만을? 아무리 보군이라지만 수가 너무 많아.”
“깨버리라는 게 아니고, 혹시 모를 지원을 차단하라는 거야. 그럴 기미만 보여도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이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못할 정도로 몰아 붙여줘.”
“그런 거라면야. 맡겨줘. 명나라 보군 놈들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게 해줄 테니까.”
호정이의 답에 투삼구가 니탕개를 보았다.
“3대는 차단전력. 멀리 있다는 또 다른 후금군 기마대가 움직이면 그것들을 차단해줘. 수가 여기로 온 놈들보다 적어 보인다니까 많으면 2만 적으면 1만이다. 큰 부담은 되지 않을 거다.”
“맡겨둬. 한 놈도 이쪽으로는 기어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니탕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투삼구가 말했다.
“시작하자.”
“후.”
남간도 출신 기마대 특유의 함성을 억눌린 음성으로 남긴 호정이와 니탕개가 조용히 떠났다.
그러자 투삼구가 곧바로 휘하 지휘관들을 불러들였다.
“놈들을 친다.”
“전격전입니까?”
“아니, 말은 두고 새벽에 보군처럼 움직인다.”
“보군······처럼 말입니까?”
“그래. 저놈들이 우리에게 경비를 맡긴다지만 감시를 세워 놓을 거다. 아마 우리말들을 주시하겠지.”
“그럼 보군처럼 이라는 말씀이······.”
“기동보군 애들 하는 거 봤지. 조용히, 소리 없이 움직이는 묵음 작전이야. 주둔지를 삥 둘러싸고.”
말을 잠시 끊은 투삼구가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일제사.”
니탕개의 말에 한 장수가 말했다.
“기동보군의 적군영 소탕전 말씀이군요.”
“그래. 보군 애들 훈련하는 거 옆에서 많이 지켜봤잖아. 그대로만 따라하면 된다.”
“아쉽네요. 화끈하게 기마로 밀어버려야 속이 후련한 건데.”
“수가 우리가 적어. 2대와 3대는 다른 작전으로 바빠서 우릴 도울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은 진중에 머물고 있는 3만의 후금군을 1만의 1대만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쉽다는 말은 쏙 들어갔다.
“지금이 11시니까. 3시에 시작하지. 경비 서는 애들한테 주의 확실하게 주고. 애들보고 잘 때 한 눈은 뜨고 자라고 그래. 후금 놈들은 믿을 수 없으니까.”
투삼구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런 이들을 쭈욱 훑어본 투삼구가 말했다.
“그럼. 시작하지.”
투삼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장수들이 각자의 부대로 흩어졌다.
투삼구를 비롯한 조선군 장수들이 분주하던 시기 조선군 진중에 여장을 푼 후금군 지휘부도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경계를 조선군에게 맡기고 모두 쉬라는 명령은 잘 못 된 거요.”
노장의 지적에 후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안다면서 왜 그런 거요?”
“우리가 의심을 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작은 불협화음이 결국 저들의 의심을 키우고 결국엔 작전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요.”
“흠. 하면 그래서······. 뜻은 알겠소만 그렇다고 정말 그냥 다 조선군에게 맡겨둘 생각이오?”
“설마요. 몇몇을 보내 은밀히 조선군 기마를 살필 겁니다. 저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려 해도 말부터 챙길 테니까요.”
“그야 그렇긴 하겠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아 보이는 노장들에게 후타이가 말했다.
“그리고 병사들은 무장상태로 잠자리에 들게 할 겁니다. 그 정도면 괜찮을 겁니다.”
“그렇다면야······. 알겠소.”
비로소 끄덕여지는 노장들의 고갯짓에 후타이가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
새벽3시.
깊은 어둠속에 주둔지 전체가 침묵에 잠긴 시간. 일단의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을 모아둔 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고, 주둔지 외부로 나갔다.
경계병들이 그런 그림자들의 존재를 감지했지만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배치 완료했습니다.”
수하 장수의 보고에 투삼구가 손짓을 하자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서 있던 경계병들이 일제히 모습을 감췄다.
자세를 낮춰 조용히 주둔지 외곽으로 빠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투삼구가 명령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마구잡이로 쏘아대서 장전한다고 헤매다가 일당하지 말고.”
“주의 주겠습니다.”
“좋아. 가라. 가서 대기하다가 내 사격과 동시에 시작한다.”
투삼구의 명이 떨어지자 수하 장수들이 신속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채 몇 분이 지나기 전에 주둔지 전체를 에워싸고 있던 조선군 기마대 1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공기의 흐름에서 그것을 느낀 투삼구가 짧은 총신을 가진 기마총을 공중으로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야밤에 울린 총소리에 놀란 후금군 병사들이 막사를 박차고 나왔다.
무장을 한 채 긴장 속에 잠이든 까닭인지 단 한발의 총성에 후금군 전체가 빠르게 반응했다.
그렇게 튀어나오는 후금군 병사들을 향해 조선군 기마대의 총이 불을 뿜었다.
탕타당탕탕탕!
사방에서 쓰러지는 후금군 병사들을 바라보면서도 후타이를 비롯한 장수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을. 말을 챙겨!”
비명처럼 지른 후타이의 고함에 병사들이 자신들의 말을 묶어둔 곳으로 달려갔지만 마치 그곳을 조준하고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듯 연속적인 총성과 함께 뛰어가던 후금군 병사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탈출하고 싶어도 사방에서 사격이 가해져 오는 탓에 방향조차 정할 수 없었다.
사격이 뜸하다 싶은 지역으로 뛰면 여지없이 총탄이 날아와 후금군 병사들이 속절없이 나뒹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저마다 게르나 화로 등 숙영장비를 부여잡고 몸을 숨긴 채 전전긍긍이었다.
그러는 사이 간격을 좁혀온 조선군의 사격에 후금군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위기의 순간, 후타이가 외쳤다.
“조선군. 조선군 기마가 있는 곳으로 간다.”
후타이의 고함에 그와 함께 일단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조선군 기마우리는 군진의 가장 안쪽에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장애물이 너무 많아서 사격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그곳에서 조선군 기마에 올라탄 후타이와 일단의 후금군이 무섭게 말을 짓쳐나갔다.
요란한 총소리가 울리면서 수많은 병사들이 말에서 떨어졌지만 수십의 후금군은 그대로 포위망을 돌파하고 도주했다.
곧바로 추격하려 나서는 일단의 기마대를 투삼구가 제지했다.
“지금은 추격보다 전장 정리가 먼저다. 항복하는 놈을 사로잡고, 반항하는 놈들은 모조리 쏴 죽여.”
투삼구의 명령에 추격을 단념한 병사들이 군진 안에서 버티고 있는 후금군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1시간 후. 완전히 군진을 장악한 조선군이 이리저리 널브러진 후금군 시신에 창이나 칼을 박아 넣었다.
일종의 확인사살이었다.
그런 모습을 포로로 잡힌 2천 가량의 후금군이 참담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포로들은 전부 엮어서 기둥에 묶어두고 경비대로 1천 남긴다. 그 외 병력은 모두 기동한다.”
투삼구의 명에 한 휘하 장수가 물었다.
“명군을 칩니까?”
“아니다. 최대한 빨리 3대와 합류해서 요하 쪽에 남아 있다는 나머지 후금 놈들 목을 딴다.”
투삼구의 답에 장수들이 일제히 외쳤다.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