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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15화 (115/325)

제115화. 유출(流出)

11월의 마카오는 조선 한성의 날씨로 보자면 따뜻한 봄날 정도의 날씨다.

그 덕에 모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배에서 내린 알링턴 선장은 매번 마카오에 정박할 때마다 들리던 술집으로 향했다.

명나라 사람인 주인의 음식 솜씨는 별로였지만 그가 파는 백주는 정말 끝내줬기 때문이다.

항구에서 한참을 걸어 도착한 선술집의 입구엔 오문포각(澳門浦閣)이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안녕하시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알링턴의 인사에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답을 해왔다.

“왔군. 알링턴 선장.”

“아직 바다의 신이 날 데려갈 시간은 아닌 모양이오.”

“당신은 못생겨서 맛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주인의 썰렁한 농담에 알링턴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주시오.”

“역시 그건가?”

“맞소. 그거.”

알링턴 선장의 말에 주방에서 주인이 가져나온 것은 파란 자기병에 담긴 백주였다.

한데 병에 이전엔 없던 글귀가 새겨져있었다.

“다른 거 같은데?”

“같은 거요. 단지 글귀가 새겨졌다 뿐이지.”

“명나라 글씨는 아닌 거 같은데.”

“조선 글씨요.”

“조선?”

“맞소. 실은 이게 조선에서 들어오는 거라서.”

조선의 물품은 유럽에서도 인기였다.

도자기에 비단, 홍삼에 최근엔 차도 조선산 차가 명나라 산 차보다 많이, 더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뭐랄까 조선산이면 고급이란 이미지가 있었다.

특히 은가(銀家)라는 이름을 달고 유럽에 팔리는 조선의 은제품 같은 경우엔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싼데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 탓에 요즘 유럽에 가짜 은가의 은제품이 많았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은가의 정품엔 조선 왕실이 품질을 보장한다는 의미의 삼태극 문양이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어 구별을 하였지만 요샌 그것까지도 흉내 내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이 조선 술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알링턴 선장이 물었다.

“하면 이거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거요?”

“안동이란 곳에서 생산하는 것이라는데 들리는 말로는 조선에서도 물량이 모자라서 외부로는 수출이 안 되는 모양이오.”

“한데 당신은 어찌 이걸······?”

“영업 비밀을 알려달라는 건데, 그건 곤란한 말이오. 알링턴 선장.”

유통경로를 전혀 말할 것 같지 않은 주인의 표정에 알링턴 선장이 쓰게 웃었다.

구할 수만 있다면 유럽에서도 비싸게 팔릴 술인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유럽에 있는 내내 이 술이 생각날 지경이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술병을 따서 술을 따르던 알링턴 선장의 눈에 선반에 올려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길쭉한 모양의 철통이었다.

저걸 어디서 봤었던 거 같았는데 도무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알링턴 선장이 주인에게 물었다.

“홍. 저건 뭐요?”

알링턴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린 주인이 웃었다.

“부적이요.”

“부적?”

“불을 내는 것이라 우린 불의 신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지. 지니고 있으면 불이 나지 않는다오.”

“불을 내는 것······!”

중얼거리다 말고 눈을 크게 뜬 알링턴 선장이 물었다.

“저, 저걸 가진 이들이 많소?”

“별로. 그랬다면 저렇게 귀하게 모셔놓지도 않았겠지. 마카오 전체를 뒤져도 아마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우지도 못할 거요.”

“저걸 내게 팔지 않겠소?”

알링턴 선장의 물음에 ‘홍’이라 불린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부적이라니까. 팔지 않는 물건이오.”

“가격은 달라는 대로 지불하겠소.”

알링턴 선장의 말에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신형을 멈추고 돌아섰다.

“원하는 대로?”

확인하려는 듯이 묻는 주인에게 알링턴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그럼 상황이 달라지지. 어디 이야기를 좀 나눠봅시다.”

의자를 당겨 앉는 주인을 바라보며 알링턴 선장이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욕심 많은 작자가 얼마나 많은 돈을 부를지 걱정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저문 마카로 거리를 알링턴 선장이 분주히 걸었다.

그런 그의 품에는 기다란 상자가 안겨 있었다. 자그마치 비단 두 상자어치의 은을 지불하고 산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분명히 그건 잉글랜드 해군 장교 클럽에서 그림으로만 보았던 조선군의 폭발탄이었으니까.

조선이 폭발탄을 사용한다는 것을 안 이후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폭발탄을 개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그 어떤 나라도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제물포 해전으로 인해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먼저 조선의 폭발탄을 알게 된 잉글랜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조선의 폭발탄을 구해 분해를 해서 복제를 시도해보려는 시도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을 위해 잉글랜드는 조선 폭발탄을 구하려 수도 없는 시도를 해왔지만 단 한 차례도 성공한 전례가 없었다고 했다.

상인을 가장한 스파이를 조선으로 침투도 시켜보고, 뇌물로 조선군 장교를 구워삶아도 보았지만 어찌나 보안이 강력한지 폭발탄은 단 한 발도 빼내 올수 없었다고 했다.

한데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 조선의 폭발탄이 버젓이 마카오의 주점에 있었던 것이다.

주인인 홍의 말에 의하면 과거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의 배를 인수받기 위해 와있던 일본인들과 조선군이 전투를 벌였는데 그때 육지로 날아들었던 것들 중 터지지 않은 것이라 했다.

알링턴에겐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은 일이었다.

알링턴은 마카오를 다 뒤져서라도 불발탄을 모조리 사들여 돌아갈 생각이었다.

잉글랜드의 예비역 해군 소령이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서 허가를 받은 사략선의 선장이기도 했던 알링턴의 입가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며칠 후, 알링턴 선장의 배가 마카오를 떠났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명나라 산 비단을 조금 사고, 조선으로 가서 도자기를 구해 돌아가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던 배는 어쩐 일인지 곧바로 귀환 여정을 잡았다.

선원들은 비단도 계획한 양의 3분의 1밖에 사지 못한 채 귀환하는 선장이 연신 싱글벙글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기분 좋아 보이는 알링턴 선장의 명으로 항구를 빠져나간 배는 모든 돛을 펴고 속도를 올렸다.

*****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12월, 포르투갈의 사신단이 부산포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왕으로써의 펠리페 3세의 친서를 소지한 그들의 알현 요청을 광해가 허락해 한성으로 불러들였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사신들이 내민 펠리페 3세의 친서를 역관이 큰 소리로 읽었다.

내용은 길었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싸우지 말고 잘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더구나 예상외로 말라카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실려 있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조선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해당 문제는 사신의 구두로 이야기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저희 국왕 폐하께오선 말라카의 사태에 대해 조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오라 하시었습니다.”

사신의 물음에 광해가 되물었다.

“말라카라. 그 해적 소굴 말인가?”

“해, 해적 소굴이라니요?”

“우리 무역선단이 그대들 나라의 배에 습격을 당한 것은 아는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처음 듣는다는 듯 말했지만 놀란 표정도 없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런 사신에게 광해가 답했다.

“그러했다. 말라카 근해에서 벌어진 일이지.”

“하면 말라카를 공격하신 일이······?”

“해적 소굴을 소탕하고 주변의 해적들의 씨를 말렸다. 소문은 들었을 터인데 요사이 말라카 인근에서 해적 보기가 어렵다고 말이야.”

광해의 말에 사신은 답을 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조선으로 오는 내내 마주치는 배들마다, 거치는 항구마다 들었던 소식이니 모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들었다고 답하자니 말라카가 해적 소굴이었다는 조선의 주장을 인정하는 꼴이고, 못 들었다 답하면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셈이었기에 향후의 대화를 위해서도 해선 안될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포르투갈의 사신에게 광해가 슬그머니 당근을 내밀었다.

일종의 대가였다.

말라카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

“하여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더 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포르투갈은 더 많은 상선을 조선으로 보내라 지금의 두 배까지 조선이 받아 줄 것이니.”

그간 조선은 각국에 할당량을 부과했다.

현대시대로 보자면 일종의 무역 쿼터제인데. 각 종 물자의 수출량을 정해두고, 어느 나라에 얼마만큼, 또 어느 나라엔 얼마만큼씩 정해진 양만 수출했던 것이다.

당연히 먼 길을 온 유럽의 상인들은 그 양 안에서만 물건을 구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품을 조선 무역선단이 직접 유럽에 싣고 가 팔았다.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의 무역을 조선이 한손에 틀어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과 포르투갈 사이의 무역확대조치를 실행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광해에게 사신은 공손히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무역이 늘어나면 그만큼 막대한 이익이 포르투갈 상인들과 그들에게서 세금을 받는 펠리페 3세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힘으로 조선을 누를 수 없는 상황에선 이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것으로 조선과 포르투갈 사이의 말라카 문제는 해결 되었다.

포르투갈의 사신이 나름의 성과를 얻어 돌아간 직후, 동일본에서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분이 바뀌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애초엔 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세이이타이쇼군, 그러니까 정이대장군이었는데 이번에 후오코쿠쇼군, 다시 말해 보국장군으로 개칭을 했다는 것이었다.

광해가 내려 보낸 책봉에 따른 변화였다.

그것으로 동일본은 조선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였다.

하긴 교서까지 내려진 것을 따르지 않았을 때 가해질 조선의 보복이 두려웠을 테니까.

그렇게 나고야 왕국의 분할로 인해 촉발된 왜 일대에 대한 조선의 속국화가 어느 정도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

서기1602년, 광해11년이 밝았다.

확대 문무백관회의가 한성의 궐에서 열렸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이고, 각도의 관찰사들과 군부의 병단장급 이상의 장수들이 모조리 궐로 모여들었다.

멀리 해외에서 작전 중인 수군 총사와 몇몇 장수들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 외에는 해외 5도와 북방 영토에서 작전 중인 부대의 장수들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여러 사안이 보고되고 결정되었다.

각도의 불안요인이나 부족한 점이 왕에게 직보(直報)되었고, 그에 대한 왕의 답이 그 자리에서 내려졌다.

몇날 며칠 상소와 비답이 오고가며 결정되던 과정이 단 몇 분 만에 끝이 나는 일이었기에 그간 쌓아두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안건들이 각도마다 쏟아져 나왔다.

행정에 관한 내용만이 아니라 군에 관한 내용도 다수라서 무반과 문반이 서로 토의하는 과정까지 거쳤다.

그조차 한자리에서 신속하게 이루어진 덕에 참석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그 만족도가 얼마나 높았던지 대소신료들이 광해에게 1년에 두 번 열어줄 것을 청하여 광해가 그것을 가납했다.

첫 번째는 지금처럼 새해 초닷새에, 두 번째는 7월 초하루에 열기로 하였다.

그것을 대회의라 칭하고, 법에 정해 전란이나 그에 준하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반드시 지키도록 하였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회의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안건들이 산재해 다음날까지 연장하여 열기로 하고 파하였다.

다음 날 다시 개최된 회의는 불행히도 속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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